“국정원장의 증인선서 거부에 많이 당황하셨죠”

2013-09-13     김종엽

지난 8월 16일 오전,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하 직함 생략)이 국회 청문회에서 증인 선서를 거부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에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하 직함 생략)도 선서를 거부했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날이 더욱 덥게 느껴진 하루였다. 두 사람이 증인 선서를 거부한 근거는 그들이 스스로 소명했듯이,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3조 ①항과 형사소송법 제148조이다. 전자에 따르면 “증인은 형사소송법 제148조 또는 제149조의 규정에 해당하는 경우에 선서·증언 또는 서류제출을 거부할 수” 있으며, 후자에 따르면 누구든 “형사소추 또는 공소제기를 당하거나 유죄판결을 받을 사실이 발로될 염려 있는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 현재 국정원 선거 개입과 관련해 형사재판 중인 김용판과 원세훈은 이 두 법률 조항에 근거해서 증인 선서를 거부한 것이다.

민주당의 무능에 대한 거센 분노

두 사람의 선서 거부가 당일 속보로 알려지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이들을 비난하는 글이 쏟아졌다. 하지만 당시 청문회에 정치적 명운을 걸다시피 하던 민주당 국정조사 특위위원들이 두 사람의 주장을 큰 이의제기 없이 받아들인 것에서 보듯이 선서 거부의 법적 타당성을 문제 삼기는 어려워 보인다. 인터넷에선 소수이긴 해도 ‘김용판과 원세훈은 자신에게 허용된 법적 권리를 행사한 것일 뿐 뭐가 문제이냐’는 의견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용판과 원세훈은 법조문을 잘 읽고 (혹은 실력 있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서) 힘겨운 상황을 얄밉게 빠져나간 것이고, 많은 사람이 표출한 분노는 기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항상 생겨나는 실망의 강도가 다소 높음을 뜻할 뿐일까. 그렇지 않다. 분노는 실망과 달리 강력한 감정이다. 이런 감정은 중대한 이유가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감정은 흔히 논리에 대립되는 듯이 말하지만 논리 못지않게 논리적이다. 감정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논리에 충분히 자각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이런 점 때문에 감정은 제대로 해소되지 않을 경우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게 된다. 실제로 법적 논리 앞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김용판과 원세훈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가 방향을 바꾸어 민주당으로 행한 것 같다. 김용판과 원세훈에 대한 청문회가 끝나자 그 과정에서 민주당이 보인 ‘무능’에 분노가 크게 일었다. 민주당은 청문회에서 좀더 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는, 김용판과 원세훈을 향했으나 주춤거리던 분노의 잔여가 많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민주당이 실패한 지점이 어디인지 좀더 분명해진다. 그 지점은 증언 선서를 거부하는 김용판과 원세훈을 사정없이 몰아붙이며 그들의 허위를 짚어내고 종내 그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오르게 하는 역량을 보이지 못한 데 있기보다는(청문회에서 의원에게 주어지는 질문 시간이나 새누리당 의원의 김용판과 원세훈 싸고돌기를 생각하면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증언 선서를 거부한 바로 그때 이미 즉자적으로 분노하지 못한 데 있다. 그들은 가장 정치적인 바로 그 장면에서 소박할 정도로 법적 논리에 함몰되었다. 만일 그때 제대로 분노했다면, 그 분노 속에서 민주당은 다수의 양식 있는 시민 편에 함께 설 수 있었다.  

정당성이 결여된 법적 논리

그렇다면 법적으로 허용된 권리를 행사한 김용판과 원세훈에게 많은 이들이 느낀 분노는 정당한 것인가. 그 감정의 논리는 어떤 것인가. 이 점을 보기 위해 먼저 왜 법적으로 이들에게 선서 거부가 허용되는지 살펴보자.  

근대 사법에서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는 일종의 자연권으로 인식되는데, 자신에게 불리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자연적 성향에 반하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형사소송법 제147조는 계몽주의의 노선을 따른다. 또한 그 조항은 역사적 이유도 있다. 중세 사법은 유죄 추정에서 출발해 피의자 고백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백 강요를 과도한 권력 행사로 파악하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해당 조항은 자유주의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비해 의회의 국정조사권 그리고 그것을 위해 증인을 요청하고 그들에게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위증죄를 물을 수 있는 법적 권능은 민주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에게 진실을 강요할 정도로 ‘무자비한’ 면모도 있다.

그런데 의회의 법적 권한과 형사소송법이 충돌할 때, 우리 법률 체제는 자유주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민주주의의 손을 들어주는 법제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의 손을 들어준 입법자의 판단과 결정이 경솔한 것은 아니다. 근대 사회의 규범적 기초를 온전히 민주주의에 두는 것은 근대 사회의 발달 경로에 비추더라도 설득력이 떨어지며, 자유주의를 부르주아 계급이 민주주의를 제약하기 위해 박아놓은 대못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단견이다. 실제 경험적 수준에서 민주주의가 문제적일 정도로 방만하게 확장되는 경우를 경험하긴 어렵지만 내재적 논리 수준에서 보면 확실히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제어를 필요로 할 만큼 무제약성이 있다. 그러므로 형사소송법을 수용한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의 해당 조항은 잘못 구성된 것이라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들여다본 법적 논리에 의해서 정당성이 입증되는 행위에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자유주의적 요소와 민주주의적 요소 간 법적 충돌 사례가 아니라 증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언어를 매개로 소통한다. 인간의 엄청난 문화·사회적 성취는 언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언어에는 중대한 약점이 있다. 언어에선 거짓말이 매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할 수 있다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므로 언어를 사용하는 한 우리는 거짓말에 대한 부담과 위험을 지게 된다. 참말과 거짓말이 공기원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으로 거짓말을 싫어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응징하지 않으며, 법적으로도 거짓말은 형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적 삶은 어떤 경우엔 거짓말에 대한 부담을 지고선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아니 많다. 그래서 인간은 거짓말을 배제하기 위해 모든 말을 참말로 전환하는 예식을 도입했다. 그것이 맹세이며, 맹세의 공식적 형식이 바로 선서이다. 이것은 손가락을 거는 행위부터 신을 소환하는 것, 아버지의 이름을 거는 것 등 다양한 양식을 지닌다. 선서는 그런 것의 법적 양식일 뿐이다.

이 맹세를 경유하면 ‘참말-거짓말’의 대립이 ‘증언-위증’의 대립으로 전환된다. 위증이란 단지 거짓말인 것이 아니라 참말로 선포된 거짓말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도 격렬한 분노의 대상이며 법적으로 형벌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선서’하는 것은 말과 말하는 주체가 각별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체가 말에 자기 존재를 거는 과정이다. 말은 습득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말의 기원은 타자이다. 모든 말은 타자의 말이며, 나는 내 이전의 말이 내 이후의 말과 연결되는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말은 말하는 주체를 통과해갈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관습적으로 말하고, 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가. 말로부터 자신을 비워내는가. 하지만 ‘맹세’는 말과 주체를 결속한다. 이 결속 때문에 말을 경유해 주체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권력이 파괴하는 ‘말'과 ‘주체'의 관계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해도 된다. 특히 어린이가 그렇다. 장삼이사도 그럴 때가 많다. 하지만 정치인, 국회의원, 고위 공직자,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미 서약한 존재이고 이미 맹세한 자이다. 그들의 말은 언제나 맹세된 말이다. 만일 그들이 말에 자기 존재를 걸지 않았다면, 말과 주체의 간극을 선서로 메운 존재가 아니라면 그들은 지도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청문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거짓말의 부담을 지고서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사회적 장면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의회 청문회일 것이다. 여기서 거짓말의 자유가 말에 서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증인들은 선서를 거부했다. 그들은 법적 논리 뒤로 도망칠 수 없는 자, 이미 선서한 자이었는 데 말이다. 더욱 당혹스러운 일은 그들이 선서를 거부할 때 청문회를 정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진행된 청문회에서 도대체 우리는 무슨 말을 그들에게서 들은 것인가. 이미 선서한 (그들이 공직 취임 시 어떤 선서를 했는지 기억해보라) 존재들이 선서를 거부하고 마치 거짓말의 자유를 얻은 듯한 위치에서 하는 발언을 우리는 어떻게 들어야 했는가.

맹세가 미래를 보증할 때 우리는 약속하는 인간이 된다. 그것의 정치적 형태가 공약이다. 지금 대통령은 공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말과 주체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 그래도 미래를 보증하는 것은 워낙 힘겨운 일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맹세가 과거 사태에 대한 참된 정보를 보증할 때 증언이 되는데, 김용판과 원세훈은 그 증언마저 타락시켰다. 확립된 과거에 대해서조차 한 사회의 민주적 의지가 집약된 정치적 권능은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체와 말의 결속을 거부하고 거짓말의 자유로 도피하는 공직자들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그것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도 말에 존재를 걸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글·김종엽
<창작과 비평> 편집위원. 저서에 <웃음의 해석학> <연대와 열광>, 역서에 <토템과 터부>, 편서에 <87년체제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