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만 남은 빈곤층 주거권 보장
프랑스에서는 동절기를 맞아 3월 15일까지 중단되었던 불법 거주민 퇴거 조치가 재개되면서 주택 문제가 다시 공론의 중심에 떠올랐다. 생존의 필수 영역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예나 지금이나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시장 메커니즘에 맡기자고 한다. 보조금을 받는 세입자가 나은가, 아니면 빚을 져서라도 집주인이 되는 게 나은가? 왕정복고 시대부터 크리스틴 부탱 주택부 장관의 최근 법안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사회 주택의 역사에는 늘 긴장감이 돈다.
“누구나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담보 대출을 확대하겠다.”
2006년 9월, 니콜라 사르코지가 내놓은 주택난 대응책이다. 주택난이란 겨울이면 방송카메라가 으레 연례행사로 촬영하는 15만 무주택자들만의 문제로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다. 가계 지출 가운데 임대료 및 각종 납부금의 비중은 1980년대 말에 12.5%이던 것이 이제 거의 25%에 달한다. 1인당 평균 수입 1500유로에 자녀 둘을 둔 서민 근로자 부부가 사회 주택에 살려면 수입의 4분의 1을 지출해야 하며 민간 주택의 경우 그 두 배가 든다.1)
이와 관련해 프랑스 주택부의 어느 관리는 “부동산 가격의 하락을 주택난과 동일시하는 의견들이 지배적이다. 이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얘기다. 진짜 주택난은 가격이 상승할 때에 나타난다”면서 못마땅해한다. 이런저런 형태로(협소한 공간, 불결한 주거환경, 각종 미납금 등) 주택난의 영향을 받는 프랑스인의 수는 2007년 930만 명에서 2008년 1010만 명으로 증가했다.
국가의 정책 혼란이 사회 주택 부족 초래
이러한 상황은 공급과 수요의 단순한 격차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역설하듯 “국가는 결정적인 방식으로 부동산 시장 형성에 기여한다. 이는 특히 국가가 토지 시장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통제, 그리고 구입 또는 임대를 위해 제공하는 지원의 형태를 통해 이루어진다”.2) 그런데 공권력은 주택 건설 물량이 급감하도록 방치했고, 이로 인한 부족분은 100만 가구에 달하며, 수도권 지역인 일드프랑스주에만 40만 가구가 모자란다. 일드프랑스는 1992년 이래 연간 건설 물량이 4만 채를 넘은 적이 거의 없다. 말하자면 인구가 4분의 1에 불과한 브르타뉴와 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철거되는 사회 주택이 끊임없이 늘어나면서 이러한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사실, 일찍이 왕정복고 시대의 책자에서도 주택난을 이렇게 꼬집고 있다.3)
“주택 소유자들은 마치 곡식 독점자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빈곤층을 구경하듯이 집 없는 이들을 대한다.”
그 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런던, 파리, 베를린, 비엔나가 겪고 있던 만성적 주택 부족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오늘날의 주택난은 노동자들이 급작스럽게 대도시로 유입되면서 이들의 나쁜 주거 여건이 더욱 악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로 인해 엄청난 임대료 상승이 초래되고, 세입자들이 더 밀집해 생활하게 되며, 일부는 아예 살 곳을 구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주택난이 그토록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이것이 소시민 계층에까지 파급되었기 때문이다.”4)
당시 주택 건설을 주도한 이들은 개인들이었다. 토지 소유자는 주택을 짓고 방을 추가하며 건물을 증축할 부지를 공증인에게 임대해줬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부터 부동산 개발회사들이 등장하면서 은행 예금을 흡수한다. 이러한 자금 유입으로 서민 거주 구역의 토지 가격은 폭등하게 되고 오스만 스타일의 호화로운 저택들만 들어서게 된다. 1880년대부터는 주택 건설 물량이 곤두박질치면서 가격 상승 현상을 부추겼다. 사회학자 크리스티앙 토팔로프에 따르면 이때 공장 노동자 및 수공업자들의 “생산과 구매력 사이의 구조적 부조화”가 드러났다.5) 이들은 주택 소유자들을 “고리대금업자, 공금횡령자, 주식투기자, 지칠 줄 모르는 압제자들”이라 표현하며 거세게 반발했다.6)
주택 공급에 공적 금융 지원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혁명적 노조주의 신봉자들이 주축을 이루던 세입자 연맹이 임대료를 강제로 동결하다시피 했다. 이 조처로 가계에 숨통이 트이는 듯했으나 건설 재개나 기존 주택량 유지에는 도움이 못 됐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건물들은 파괴됐고 주택 수는 3분의 1이 더 필요했다. 이런 가운데 제4공화국은 민간 자본에 ‘건설의 참맛’을 알게 하려 애썼다. 가계 대상의 주택보조금제 실시를 반대급부 삼아 다시 임대료 인상을 허가했다. 그러나 투기가 개입하면서 토지를 위시한 가격이 폭등했다. 결국 부양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1950년대가 되자 비로소 건설지원금을 직접 지급하기 위한 공적 금융 경로를 마련할 필요성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실제로 민간자본에 비해 낮은 이율에 좀더 장기간 빌려주는 공적 자본 덕분에 비용이 줄었으며 상호부조도 가능하게 됐다. 이러한 건설지원금 시스템은 프랑스 중앙은행의 대출과 국고 보조에 힘입어 가동될 수 있었다. 여세를 몰아 저렴한 또 다른 자금조달원이 등장했다. 근로자 10인 이상 기업에서 총 급여액의 1%를 공제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시스템을 보완한 것이 두 가지이다. 한편으론 프랑스 부동산은행이 주택 구입자들에게 우대금리로 대출을 해줬다. 다른 한편으론 프랑스 예금공탁금고가 A저축예금(livret A)을 통해 저가 임대주택(HLM) 관리기관에 좀더 저렴한 대출을 제공했으며 자회사 중 하나인 부동산중앙협회(SCIC)를 매개로 주요 부동산 개발업자로 발돋움했다. 당시 이루어진 노력은 대단했다. 절정은 55만6천 채의 신규 주택이 건립된 1973년이다. 1973~75년에 총 주택 수는 절반이 늘어났다. 땅 위에 솟은 800만 채의 주택 중 약 80%가 공적 지원의 혜택을 받았다고 역사학자 사빈 에포스는 밝히고 있다.7)
자유주의적 주택정책으로 선회
그런데 1972년부터 일당의 고위 관료들이 국가 개입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공박하기 시작했다. 8) 그중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은 1958년 정부 경제부처의 고위직에 오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다. 1962~66년과 1969~74년에 경제 관제탑을 지휘한 그는 “시장의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을 복원하는 데 주력했다.9) 특히 건설지원금을 제한적으로 지급하고 부동산은행의 주택 구입 대출 독점권을 철회하면서 주택 건설 금융을 민간은행으로 넘겼다.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지스카르 데스탱은 국가 재정에 부담을 준다는 비난을 받던 건설지원금의 개혁을 담당할 위원회를 레몽 바르에게 맡긴다. 대통령의 두 측근인 피에르 리샤르(이후 덱시아은행의 대표를 지내고 2008년 9월 강제로 물러난다)와 건설지원금 개혁위원회 보고위원이자 회계감사관인 앙투안 장쿠르 갈리냐니는 지원금의 철폐를 요구했다. 이러한 제안에 끌린 자크 바로 주택 담당 국무장관(1974~78)은 “그렇게 되면 주택의 건설, 위치 선정 및 질이 시장의 움직임에 의해 결정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가장 자유주의적인 해결책이다”라고 평가했다.10) 그러나 가계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지나치게 급상승할 것을 우려해 이러한 논리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그러나 관련 작업에는 착수했다. 1977년 바로 장관은 “점진적으로 임대료 자유를 회복”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전국 부동산연합(UNPI)의 오랜 숙원을 들어줬다. 바로 장관은 “지원금을 철폐하지는 않되 감축해야 하며 이러한 지원 감소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극빈층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개별주택지원금(APL)을 창설해 이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질 때까지 지급”하기로 한다. 하나 안타깝게도 실업은 증가하고 건설 물량은 곤두박질쳤으며 주택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만다. 결국 개혁 때문에 저가 임대주택 관리기관들은 임대료를 대폭 인상하고 투자를 줄여야만 했다.
민간주택 소유자에게 유리한 정책
공적 개입 시스템은 점차 민간주택 소유자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1980~90년대에 사회 주택을 위한 공적 금융의 비용은 높아졌다. 동시에 1986년부터는 임대계약 갱신 때마다 집주인들이 임대료를 최고가에 맞춰 조정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허가되었다. 이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지난 30년 동안 가장 가난한 세입자들이 내는 임대료가 다른 계층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고 2005년 경제학자 가브리엘 팍은 평가했다. “이들 가계가 수령하는 주택보조금의 50~80%가 임대료 인상분으로 흡수되는 것으로 추정된다.”11)
다시 말해 개별주택지원금이 사실상 주택 소유자들을 위해 지급되어온 것이다. 2002년 이후로 주택 소유자들의 임대용 투자를 위한 각종 조세 감면 조처가 쏟아져나왔다. 질 드 로비엥 주택부 장관과 장루이 보를루 도시부 장관이 마련한 제도12)가 그 주축으로, 수혜자는 상장 부동산 회사들이었다. 그중 대표적 업체인 제시나를 최근까지 이끌어온 인물은 다름 아닌 장쿠르 갈리냐니였다. 이들 회사는 높은 배당금을 보장해주고 약간의 보완적 세금을 일괄 납부하는 조건만 충족시키면 소득세 한 푼 안 내고도 보유 주택들을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가계들이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이토록 막대한 재정적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었으며 반대로 국가의 재정 노력이 이렇게까지 축소된 적은 없었다”고 전국 주택총연맹(CNL)은 단언한다.13) 창출된 주택 자산 가운데 공공 부문이 기여한 비중은 2%가 채 못 되며 이 수치마저 계속 하락하는 형편이다. 참고로 제4공화국에선 그 비율이 2배에 달했다. 이미 1968년 정치인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는 이렇게 예고한 바 있다. “주택을 ‘수익성 있는 재화’의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주택난을 해결하려 한다면 이는 ‘벨에포크’(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평화로운 번영기)에나 걸맞은 해결책을 내놓는 셈이다.” 멘데스 프랑스는 주택난 해소를 위해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며 정부의 지원 한도를 없애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투기 이익에 훼방을 놓는” 대책이기도 했다.14)
좌파의 안이함과 무관심
몇 년 전, 부동산 투기 이익은 최고조에 달했다. 2005년 현재 토지 및 부동산 재산은 프랑스 국부의 절반을 차지하며 이는 5조5천억 유로에 해당한다.15) 이 총액 가운데 3조 유로는 땅 투기에서 직접 비롯되었다.
1970년대 이후 주택은 더 이상 주요 정치 쟁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 국가 경제의 23%나 차지하는 부분인데도 말이다. 이는 지난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서도 확인되었다. 양대 정당인 대중운동연합(UMP)과 사회당(PS)이 향후 5년 동안 사회 주택을 매년 12만 채씩 짓겠다는 공약을 내건 게 고작이다. 이 물량은 국제금융거래과세연합(Attac) 주택위원회, 인권연대, 전국주택연맹 등의 단체가 확인한 주택 수요의 절반에 불과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두 정당이 ‘사회계층 혼합’이라는 미명하에 서민 임대주택을 철거할 필요성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는 점인데, 이러한 조처는 일반적으로 해당 주택 거주자들을 오히려 도심에서 먼 곳으로 내몰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르코지는 대선 후보 당시 누구나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게 해주겠다는 공약을 추가했고, 그와 맞붙은 사회당 소속 후보는 신자유주의적 주택 정책에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좌파는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주 35시간 근무제뿐만 아니라 주택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리오넬 조스팽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허사였습니다.” 좌파연합(Gauche plurielle)의 마리노엘 린느만 현 주택담당 국무장관은 2005년 말 에손지역 마시의 사회당 당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며 면죄부를 구했다. 또한 린느만 장관은 침묵을 지키던 당원들에게 이렇게 속내를 터놓기도 했다. “여러분도 실태를 잘 아시겠지만, 프랑스에서는 중산층이 타격을 입기 전에는 아무도 꿈쩍 하지 않습니다!”
번역•최서연
1) 1997년에서 2007년 사이 당 가격은 2배 이상 상승했으며(140%) 임대료는 절반 가까이 증가했다(43%). 아베 피에르 재단, 주택 부문 보고서 ‘프랑스의 주거 문제 실태’, 파리, 2008.
2) 피에르 부르디외, <세계의 비참>, 쇠유, 파리, 1993.
3) 장폴 플라망, <국민에게 살 곳 마련해주기>, 라데쿠베르트, 파리, 1989
4) 프리드리히 엥겔스, <주택 문제>, 에디시옹 소시알, 파리, 1957.
5) 크리스티앙 토팔로프, <프랑스의 주택, 불가능한 상품재의 역사>, 국립정치학재단(FNSP) 출판부, 파리, 1987.
6) 로제앙리 게랑, <집주인과 세입자, 프랑스 사회 주택의 기원>, 켕테트, 파리, 1987.
7) 사빈 에포스, <프랑스 지원 주택의 발명>, 프랑스금융경제역사위원회(CHEFF) 출판, 파리, 2003.
8) 브뤼노 르페브르, 미셸 무이야르, 실비 오키핀티, <주택 정책, 실패의 50년>, 라르마탕, 파리, 1991.
9) 사빈 에포스, 같은 책.
10) 자크 바로, <미래의 주택 건설>, 프랑스엉피르 출판, 파리, 1978.
11) 가브리엘 팍, “왜 저소득층 가계는 갈수록 높은 임대료를 지불하는가?”, <경제와 통계>, n°381~382, 파리, 2005.
12) 제3자에게 임대할 목적으로 주택을 건설하는 데 소요된 금액 중 상당 부분에 대해 세금을 공제해주는 조세 제도.
13) 전국주택연맹(CNL) 총회, <주택의 비용 및 자금조달>, 파리, 2008.
14) 루이 우드빌, 장프랑수아 뒤이, <주거 환경의 문명을 위하여> 서문, 에디시옹 우브리에르, 파리, 1969.
15) 고용·소득·사회통합 자문위원회, <전환기의 프랑스 1993~2005>, 파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