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어떻게 진화돼왔는가
‘비핵·개방·3000’으로 표현되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신뢰프로세스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에 신뢰프로세스는 개념과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 모호하다는 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등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지난 정부의 성과를 계승하겠다는 점, 북한이 위기를 조성하는 상황에서도 신뢰프로세스를 포기하지 않은 점, 우리도 핵을 보유하자는 안보 포퓰리즘에 휩쓸리지 않은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가 ‘타산지석’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모습 드러낸 ‘신뢰프로세스’
박근혜 정부 출범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신뢰프로세스는 조금 구체화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많은 정책 가운데 대북정책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경제와 복지 정책에서 저평가를 받았지만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 지지가 박근혜 정부의 집권 초반기를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 집권 6개월간 개성공단 가동 재개를 위한 남북협상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협상이 있었다. 지난 8월 통일부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다.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높지만 신뢰프로세스는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통일부가 밝힌 소책자에 따르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신뢰를 바탕으로 ‘남북관계 발전-평화 정착-통일기반 조성’이라는 3단계를 추구하고 있다.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실행 가능한 합의와 합의 사항 이행 △북한의 잘못은 비판하고 긍정적 행동변화는 지원 △큰 그림이나 목표보다는 작은 합의와 이행 등을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뢰프로세스를 추진하기 위한 원칙으로 △균형 △진화 △국제사회와 협력을 제시했다. 균형이란 안보와 교류협력 사이의 균형, 남북협력과 국제공조 사이의 균형을 말한다. 노무현 정부에서 균형외교를 제시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있었으나, ‘균형’은 대북정책이나 대외정책에서 초정파적로 합의할 수 있는 개념이 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균형’이란 대립되는 두 가지 가치가 가지는 장점을 모두 취하겠다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하게 대북정책이나 대외정책에서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다양해지고 있다. 이런 것을 반영해 안보와 대북정책, 국익과 세계 보편적 가치 등 다양한 대립되는 가치들을 조화롭게 추구하려는 것이다. ‘진화’라는 것은 대북정책을 앞으로 보완·발전시켜나가겠다는 것이다. 신뢰프로세스에서 균형과 진화를 추진 원칙으로 내세운 것은 신뢰프로세스가 고정불변의 정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신뢰프로세스는 앞으로 남북관계 변화,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서 신축성 있게 변화해갈 수 있다.
6·15 공동선언과 남북 신뢰
통일부가 발표한 신뢰프로세스는 초기에 비해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과 절차는 여전히 미흡하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해서는 여전히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합의’라는 이름으로 지난 정부의 합의에 대해서 긍정성을 수용하겠다고 하지만 긍정성에 대한 평가보다는 기존 합의에 대한 조건부 이행이라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신뢰프로세스가 균형과 진화를 원칙으로 내세운 만큼 앞으로 보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수십 년간 적대적으로 대결해온 남북 사이에서 ‘신뢰’는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과 같이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남과 북은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선언, 10·4 공동선언 등 중요한 합의를 했다. 남북 합의에서 신뢰의 필요성을 처음 약속한 것은 6·15 공동선언이다. 6·15 공동선언 제4항에서는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하였다”고 약속하고 있다. 10·4 남북공동선언 2항도 “남과 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남북관계를 상호존중과 신뢰 관계로 확고히 전환시켜나가기로 했다”는 신뢰에 대한 조항이다. 북한의 긴장 조성과 박근혜 정부 지지율신뢰는 양자의 관계를 돈돈하게 하지만 어떻게 해서 신뢰를 구축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양자의 합의가 필요하다. 신뢰는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15 공동선언에서는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하면서 여러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약속했다.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과 절차로서 남북 사이의 교류와 협력을 제시했다. 10·4 공동선언에서도 남북관계를 ‘신뢰관계’로 전환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구체적인 합의를 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6개월이 되었지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아직도 모호하고 수단과 방법을 충분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시기에 박근혜 후보가 제시한 신뢰프로세스는 선거용이었다. 완성된 개념이 아 니었다.
현재 모습을 드러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원칙과 철학보다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대북협상과 회담의 결과에서 영향을 받은 바 크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진행되어온 내용을 신뢰프로세스라는 개념과 접목한 것이 통일부가 제시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남북 장관급 회담을 둘러싸고 북한과 ‘격’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미친 영향이 크다. 회담의 성공보다는 국민에게 북한에 큰소리치는 모습으로 보여서 지지율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남북관계가 지금처럼 복잡하게 왜곡되고 국민이 북한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된 데는 올 상반기에 조성된 한반도의 위기가 큰 역할을 하였다. 북한은 1998년부터 2012년 4월을 강성대국 원년으로 선포하고 이날에 맞춰 인공위성을 발사하려는 준비를 해왔다. 북한은 인공위성이 미사일 기술을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김정일 시대에서 추진해온 것이기 때문에 김정일의 유훈이 되는 사업이다. 북한이 2012년 4월과 12월에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것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이다.
작년 12월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자, 지난 1월 22일 유엔 안보리가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결의안 2087’을 채택했다. 북한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한반도 위기가 시작되었다. 북한은 각종 성명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를 향해 일전불사의 발언을 쏟아냈다. 언론은 북한의 연속적인 위협 발언을 ‘말폭탄’이라고 불렀다. 북한은 우리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협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이 말폭탄은 남한 국민에게 그들의 호전적인 모습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이것이 국민 가슴속에 자리잡은 북한 이미지가 되었다. 이에 당당하게 맞서서 북한을 변화시켜 주기 바라는 정서가 국민 사이에 확산되었다.
말폭탄을 퍼붓던 북한도 변하기 시작했다. 지난 4월 12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한-중-일 3국을 순방하면서 6자회담과 양자회담 등 대화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부터 북한도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남북대화를 비롯해 미국. 중국, 일본과 대화를 시도했다. 북한으로서는 오랫동안 추진해왔고, 김정일의 유훈이기도 한 위성발사에 성공했고, 이에 대한 유엔 조치에 대해 한반 도 위기를 조성시키는 말폭탄 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김정은 체제에 필요한 것은 경제개발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대화이다. 이를 위해서 남북대화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과거와 달리 오마마 정부는 남북 대화 없는 북미 직접대화를 희망하지도 않는다. 이에 따라서 북한은 지난 5월부터 대화 국면으로 전환을 시도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이런 북한의 대화 제기를 대화를 위한 ‘초반 첫수’(Beginning Gambit)로 보았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진화를 위해
이 맥락에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은 지난 6월 6일 남북대화를 제기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정작 남북당국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에서 수석대표의 ‘격’ 때문에 남북장관급회담은 무산되고 말았다. 정부는 남북당국회담 실무회담에서 회담수석대표를 합의하지도 않은 채 당국회담을 약속하는 미숙한 회담전략을 보여주었다. 그러다 보니 남북은 수석대표의 ‘격’을 다르게 발표했다. 애초 장관급회담으로 제안된 남북당국회담을 수석대표로 우리는 차관을 내세웠는데, 북한은 조평통 국장을 내세웠다. 조평통 국장은 북한에서 장관급이라고 하는데 우리 정부의 국장급이라고 말하는 언론도 있었다. 그렇다면 CIA 국장도 국장급이냐는 조소도 있었다. 결국 이른바 ‘격’의 논란으로 남북당국회담은 무산되었다.
정부의 미숙한 회담전략에 국민은 뜻밖에도 지지를 보내주었다. 올 상반기에 보여준 북한의 호전적인 태도를 기억하는 국민들은 남북이 ‘격’을 가지고 다투는 것을 박근혜 정부의 북한 버릇고치기로 받아들였다. 인과관계가 전혀 맞지 않는 이런 결과가 발생한 데에는 당연히 호전적인 언사를 남발한 북한의 책임이 크다.
지난 수십 년간 각종 여론조사를 본다면 국민은 남북 사이의 화해협력을 일관해서 지지하고 있다. 국민이 올해 상반기 북한이 말폭탄 공세로 우리의 안전을 위협한 북한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희망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단호한 조치로 남북 사이에서 회담에서 ‘기 싸움’만 계속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남북관계는 ‘만성피로증후군’에 걸려버릴 수도 있다. 결국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서 표방하는 균형과 진화의 원칙에 따라서 단호한 조치의 결과로서 남북 화해협력을 복원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이 남북대화에 적극적이고, 북한 역시 경제개발과 6자회담 재개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추동력을 지니고 있다.
이 추동력을 살려나가기 위해서는 남북회담에서 기 싸움을 통해 북한을 관리하고 국내 지지층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패턴이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신뢰프로세스의 추진 수단과 방법, 콘텐츠를 풍부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필요하다.
글·김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