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 독립을 향해 가는 카탈루냐
회합은 모든 것이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한 시대에 사람들이 동시에 느끼는 들뜬 감정과 억제된 감정으로 생기가 넘친다. 바르셀로나 시우타트 벨라 지역의 오래된 지하실에 모인 익명의 1백여 사람들이 카탈루냐의 주권 수호자인 변호사 킴 토라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한다.
그는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1) 때인 1714년 9월 11일 필립 당주 지지자들에 의한 바르셀로나 함락 이후 종식된 카탈루냐의 분리 독립에 대해 얘기한다. 맨 뒷줄에, 40대의 안나 페리가 결연한 태도로 앉아 있다. 줄곧 분리 독립주의자였다는 그녀는 저녁 모임의 동태를 유심히 지켜보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이 유토피아적이라 생각해 실제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도, 2012년 3월, 3만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분리 독립 조직 “카탈루냐국민의회(ANC)”가 창설되며 큰 변화가 생겼다. 이제 그녀는 확신한다. “상황이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자신의 지역구의 정치적 책임자가 된 페리 여사는 매주 (분리 독립에 관한) 강연을 기획하고 있다.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대학의 사회학자 마리오 도밍게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975년 변혁 이후(2) 처음으로, 카탈루냐의 주권 투쟁이 대중 투쟁의 길을 모색하며 사회기층에 유기적으로 연결된 시민 투쟁으로 거듭났다.” 이전까진, 카탈루냐 자치정부, 제네랄리타트(Generalitat)가 기관들의 전략 대부분을 주관했다.(3) 2000년 우파,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의 국민당(PP)의 승리 이후,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수반(首班)은 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마드리드와의 관계에서 강경책을 썼다. 현지 엘리트 정치인들은 1979년 헌법의 한계를 규탄하며 카탈루냐의 새로운 자치법안, 에스타투트(Estatut)를 제안했다.
이 법안은 1980년부터 2003년까지 제네랄리타트의 상징적인 수반이었던 조르디 푸욜이 했던 주장의 연장선이다. 이것은 카탈루냐의 경제를 약화시키는 중앙정부와의 재정연대의 종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실, 스페인은 비대칭적인 지방분권화 체제이다. 이 속에서 일부 지역은 분화된 중앙정부의 사무권한 이양 혜택을 누리고 있다. 카탈루냐는 현재 주민과 기업에 자유롭게 소득세를 징수하고 있는 에우스카디와 나바르, 즉 바스크 지역과 동일한 신분을 원한다. 이는 페르난도 국왕이 16세기에 나바르 왕국을 합병한 이후 나바르 왕국에 허용한 종합세법(Fors)에 준거한 것이다.(4) 2010년, 스페인 헌법 재판소가 에스타투트의 많은 법 조항, 특히 “카탈루냐 국가”에 대한 모든 참고조항을 폐기처분한 이후, 카탈루냐 주권 문제는 의회의 소관을 떠났다. 하지만 이 법안은 현지 유권자의 73%가 선택한 것이었다. 페리 부인이 회상한다. “마드리드는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취당한 느낌을 받았다.” 카탈루냐는 거대한 시위장으로 변했다. 2010년 7월 10일, 비영리 단체 옴니움 쿨투랄(Òmnium Cultural)과 카탈루냐 언어 및 정체성 홍보 단체가 조직한 시위에는 150만 명이 참여해 가두행진을 펼쳤다. PP를 제외한 카탈루냐 정당 대다수는 “우리는 하나의 국가이다. 우리가 결정한다”는 기치 아래 펼쳐지는 이 시위를 지지할 것이다.
카탈루냐는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2012년, 스페인의 1인당 국내 총생산(GDP)은 2만 7430유로인데, 이 지역의 총생산 규모는 스페인(2만 2700유로)과 유럽연합(2만 5134유로)의 평균 총생산 규모를 상회한다. 그러나 2010년 시위는 비록 경제가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지속적으로 언어문제가 민족주의의 동력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또한, 카탈루냐의 주권 주장은 별로 합리적이진 않지만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카탈루냐 왕국을 합병한 스페인 왕국의 복합적인 특성,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역사와 정치적 관점에 기반을 둔 것이다.
17세기 이후, 카탈루냐 공화국은 네 번에 걸쳐 공표됐다.(5) 나폴레옹 시대 때, 네 개의 도(道) 형태로 프랑스에 합병된 이후, 카탈루냐 산업혁명은 19세기 스페인 르네상스를 등장시키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유럽의 낭만주의와 조합운동을 비롯한 무정부주의에서부터 스페인 내전(1936~39)에 기반을 둔 중대한 문화 운동이 카탈루냐 자치 운동을 부각시켰다. 이와 달리, “민족주의적·가톨릭적인” 성향을 띤 보수 이데올로기는 군사적인 탄압으로 프랑코 정권을 수용하게 하며 오랫동안 스페인 민족주의를 불법화했다.
“우리는 국가다. 우리가 결정한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부동산 거품 붕괴 이후, 경제위기는 카탈루냐의 재정 적자 문제를 구체화·공론화시켰다. 사실 제네랄리타트에 따르면, 이 자치지역이 가장 부유한 것은 맞지만, 부채 또한 550억 유로로 가장 많다. 왜냐하면 스페인 정부에 내는 분담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엔, 카탈루냐 부의 일부를 2012년도 1인당 GDP가 1만 5394유로로 스페인에서 가장 취약한 자치지역인 에스트레마두라로 재분배하는 것이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재정분배의 규칙, 특히 민주주의 전환기에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역할을 규정한 것은 정치적 힘의 역학관계와 뿌리 깊은 독립주의를 염두에 둔 처사였다. 한편, 스페인의 소수 민족 문제 전문가인 브장송의 한 대학 강사 마티유 쁘티톰은 국내 연대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정치문제”라고 분석한다. 또한 대부분의 카탈루냐 주권 지지자들은 카탈루냐 독립국은 유럽연합의 회원국이 될 것이고 유럽 구조 기금을 통한 경제연대 원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2012년, 카탈루냐의 대중운동은 전례 없는 시도를 하며 주권 논쟁에서부터 제도적인 논쟁까지 주도했다. ANC 창당, 세금납부에 대한 시민 불복종 운동, 헌법 개혁 절차,(6) “카탈루냐 해방 지역” 창설,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 등 자치지역의 5분 1이 통합해 출범한 이 지역은 스페인의 행정권을 거부하고 있다. 이후, 분리 독립 지지자들의 입장이 확산되어, 모든 사회 영역에 침투되며 사회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별이 박힌 카탈루냐 깃발이 외진 마을뿐만 아니라 바르셀로나나 타라고나의 대로변에, 창가에 대거 등장하고 있다. 준 공공연구기관인 사회 투자센터(CIS)에 따르면, 현재 카탈루냐 주민의 57%가 분리 독립에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해서 2012년 9월 11일, 카탈루냐 ‘건국 기념일’인 디아다(Diada) 축제 날, ANC의 호소에 또 다시 1백 50만 인파가 바르셀로나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유럽에 새로운 국가를”이란 슬로건을 들고 행진을 벌였다. ANC 집행부의 일원이자 교사인 호셉 콜로메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의 목표는 조기선거를 통해 의회에 주권 선언을 강제하고, 카탈루냐 국민의 자율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카탈루냐의 특이성은 대중 운동이 국민의 권리를 내세우며 제네랄리타트와 힘의 역학관계를 형성한 데 있다. 따라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마드리드의 중앙정부와 힘의 역학관계를 형성한 셈이다. 디아다 축제 이틀 후, 카탈루냐 민주 연합당(CiU)의 의장이자 제네랄리타트의 수반인 아르투르 마스는 ANC와 지역 조기선거에 합의해, 2012년 11월 28일 자주적 결정에 유리한 국민투표로 조기선거가 치러졌다. 투표방식이 카탈루냐 투표를 강화하며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 주요 좌파세력인 카탈루냐 공화주의 좌파당(ERC)이 좋은 성과를 거두며 CiU는 결국 이전보다 적은 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135석 중 83석을 차지함으로써 절대 다수를 유지하고 있다.(7)
브뤼셀에 그들만의 압력단체 창설
바르셀로나 외곽의 삭막한 ‘도시 외곽 베드타운’ 코르넬라에서 귀 기울여 서로 다른 지역 억양을 듣다보면 스페인을 두루 돌아다니는 느낌이 든다. 1950부터 1975년 사이, 카탈루냐의 놀라운 경제 발전에 이끌린 140만의 스페인인들, 주로 안달루시아와 갈리스의 농촌지역 출신들은 카탈루냐에 정착했다. 독재기간 동안 행정부, 종교계, 군부의 수장들인 프랑코 지지자들 또한 이 같은 국내 이주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30년 전부터 제네랄리타트가 동화정책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 사회엔 사회언어학적인 뿌리 깊은 간극이 지속되고 있다.
코르넬라 주민의 75%는 다른 이베리아 지역 출신의 이민자들이다. 이들은 카탈루냐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심지어 아예 사용하지 않으며, 투표도 주로 사회당과 마리아노 라호이의 PP당에게 한다. 사실, 두 대립, 즉 좌·우파와 카탈루냐와 스페인 간 대립은 카탈루냐 의정 생활을 항상 무척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선거 여파로, 정당들이 지역 주권 투쟁에 나서며, 여하튼 CiU당 대표 아루투르 마스와 ERC당은 오랜 반목을 청산하고, 2013년 1월 23일, ‘카탈루냐 국민’의 ‘정치적·법적인 주권 문제를 의제’로 정했다. 그리고 2013년 4월 11일, 카탈루냐 의회는 우선 조기 대책, 예를 들면 2014년 카탈루냐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주관하고 새로운 독립 카탈루냐의 모든 분야의 발전성을 검토할 국가 인수위원회를 조기에 가동시켰다.
늙은 대륙의 우연한 아젠다일까 역사적인 전환기일까?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의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지지자들은 영국 총리 데이비드 카메론과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유럽연합과 함께하는(8) 플랑드르, 바스크, 그린란드, 쉬드티롤 지역들, 이른바 “지역 국가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확실히 드러내는 경향, 즉 유로 지역의 경기 침체로 인한 사회적 갈등 이전의 현상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1982년 이후, 제네랄리타트는 브뤼셀에 자신만의 경제 압력 단체인 카탈루냐 경영자협회를 창설했다. 1986년 스페인이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카탈루냐는 유럽지역 단체·지역 이사회·유로시티 네트워크·유럽공동체 등의 내부에서 투쟁하는 유럽지역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9)
이 같은 ‘유사외교’는 2012년 11월 카탈루냐 공공 외교의회, 디플로카트(Diplocat)의 창설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디플로카트는 최근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 시앙스포에서 국민의 자율권에 관한 일련의 토론을 개최했다. 사람들이 이런 동력에 대해 스페인 총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면, 그는 항상 다음과 같은 답변을 했다. “유럽 국가들 사이에 이름을 올리려면 강대국이어야 한다. 약소국들은 절대 이름을 올릴 수 없다.” 실제로 바르셀로나는 유럽의 승인 부재에 직면해 있다. 왜냐하면 다수의 유럽 국가들이 자국의 분리 독립 운동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또한 마드리드가 유럽연합은 “회원국의 영토 통합”을 준수해야 한다고 명시된 유럽 연합 조약 제4조 2항을 정기적으로 거론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2012년 10월 4일, 유럽위원회 부의장 비비안 레딩은 스페인 정부에 지지 서한을 발송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총리 알렉스 샐먼드에 따르면 “스코틀랜드는 영국에서 분리 독립하면 자동으로 유럽연합 회원국이 될 것”이라고 했다.그렇다면 카탈루냐는 사실상 EU 회원국이란 말인가? 지난 5월 8일, 스페인 헌법 재판소는 이런 개연성을 감안해 결국 1975년 스페인이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한 이후, 전례가 없는 선례를 남기며 1월 23일의 카탈루냐 주권 선언에 대한 효력정지 판결을 내렸다. 마스는 강하게 반발했다. “카탈루냐 국민은 투표를 통해 민주적으로 행사한 자신의 의지가 무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마스가 갈 수 있는 마지노선이 어디까지일까? 마드리드 정부가 넘을 수 없는 마지노선은 존재할까? 분명한 것은 민족자결권 행사는 이제 스페인 정부에 대해 법치를 요구하는 CiU 간 전례 없는 단절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카탈루냐 경제 기관들이 독립지지선언을 한다는 것은 이들이 시장의 안정성을 걱정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콜로메르가 말을 잇는다. “그래서 (독립)프로세스의 진행은 카탈루냐 서민층의 대규모 시위에 달렸다.” 따라서 ANC가 쐐기를 박았다.
2013년 6월 1일, ANC는 “분리 독립을 위한 투표에 서명하세요”란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의 목표는 카탈루냐 의회로부터, 추후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전주곡인,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2014년 5월 31일 이전에 치르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다. ANC는 옴니움 쿨투랄과 함께 디아다 축제날인 2013년 9월 11일 카탈루냐 전국을 잇는 기다란 인간띠를 준비하고 있다.
카탈루냐는 EU 회원국?
연기가 나는 공장으로 둘러싸인 작은 산업 도시 타라고나의 남부, 레우스의 극좌파 정당인 인민당(CUP) 후보는 집회 때 노골적으로 세금 납부 불복종을 호소했다. 그 여파로, 날이 갈수록 스페인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고 제네랄리타트에 내는 관행이 빈번해지고 있다. 3명의 의원이 당선되며 CUP는 2012년 11월 카탈루냐 의회에 성공적으로 입성했고, 이들의 입성과 함께 CUP가 대변하는 민주주의 개념(재임불가와 수당 상한선 제정)을 비롯한 돌직구 화법과 티셔츠에 귀걸이를 착용한 의원들의 의상도 함께 의회에 입성했다. 활기가 넘치는 30대 의원 조르디 살비아는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목표는 정권정복이 아니라, 카탈루냐 정부를 마드리드와 단절 쪽으로 밀어붙이는 강력한 법률 제정이다.” 그는 이어 “국가의 해방은 당연히 사회적 혁명의 프로세스를 동반해야 한다.” 살비아는 CUP의 의정활동 가담이 카탈루냐 좌파인 ERC으로 하여금 덜 사회민주적인 경제 프로젝트를 채택하도록 강제했을 것이라 했다.
개발 모델 문제는 분명 중요하다. 카탈루냐가 스페인에서 GDP가 가장 높다는 사실이 국민들한테는 반드시 번영의 동의어는 아니다. 현재 바르셀로나시에서만 빈곤율이 29%를 상회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사비에르 살라 이 마틴과 조르디 갈리를 신봉하는 카탈루냐의 경제체제는 “고유 국가”를 선택하는 동시에 긴축대책과 유연한 노동시장, “매력적인” 세금정책의 타당성도 함께 옹호한다. 독립 원칙을 기반으로 한 CiU와 ERC 간 조약은 기업과 임금 노동자에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 ERC의 경제 문제 책임자인 알베르트 카스텔라노스는 다음과 같이 자기 입장을 변호한다.(10) “독립이 카탈루냐 지배층의 정치적 이념을 공유해야 한다거나 옹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카탈루냐 지배층이 국가의 일부이며 계층 간 해방 프로세스의 일부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바르셀로나 대학의 사회 인류학 교수인 제라르 오르타는 원외 좌파당의 적극적인 투사이기도 하다. 지난 5월 말, 그는 한 무리의 교수들과 함께 대학 시스템의 파괴를 규탄하기 위해 총장실을 점거했다. 그는 대학 시스템의 퇴보가 “테크노-봉건 모델로의 회귀”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긴축 정책을 규정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의 표현에 따르면, 분리 독립주의자들의 회귀 또한 ‘고통 경제(긴축 정책)’의 성장거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오르타는 결코 카탈루냐 우파가 주권을 사회 해방의 기제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대략 300년 전, 카탈루냐는 자신의 독립을 잃은 순간부터 귀족들을 필두로, 19세기와 20세기엔 중산층들이 카스티야 식민지 프로세스에 가담했다. 새로운 세계질서의 등장, 즉 자본주의의 구조조정과 함께, 사람들은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목도했다. 카탈루냐 엘리트들은 현재 독립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마드리드에 의해 장악된 채 위협받는 자신들 계층의 이권을 지키려 애쓰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위기를 핑계로, 스페인 정부는 정치·경제의 재(再)중앙집권화 공세를 펼치고 있고, 은행 개혁의 맥락 속에서, 영토 주권의 지렛대 중 하나였던 저축 은행들이 사라지고 있다.
카탈루냐 중소기업 경영자 협회의 주도하에, 중소기업들은 “고유 국가”의 창설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다. 왜냐하면 카탈루냐는 단일 시장 덕분에 자신의 경제를 가장 역동적으로 만든 스페인 지역이기 때문이다.(11) 2011년 이후, 카탈루냐가 유럽 지역에 수출한 규모는 52.9% 대 47.1%로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 수출한 규모를 웃돈다. 프랑스기업인연합회(MEDEF)와 진배없는 포멘트 델 트레발(Foment del Treball)의 소장 요하킴 가이 데 몬텔라는 2013년 5월 초반 “독립의 이점”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다만 카이사 은행과 같은 거대 금융그룹들은 자신들이 스페인에 정치적·경제적으로 정착했다는 이유로 대다수가 독립에 반대한다. 카탈루냐의 분리 독립은 이베리아 왕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왕국의 GDP는 20% 감소할 것이고, 유럽연합 내에서 대표성을 상실하는 동시에 라틴아메리카에서 정치적 신망도 잃는 고통을 감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스페인의 통합 이념, 바스크 지역은 물론이고, 발레아레스 제도처럼(12) ‘카탈루냐 지방’ 이외의 다른 지역들이 동참할 수도 있는 통합이념을 훼손할 수도 있다. 카탈루냐 문제에 직면한 라호이 정부는 카탈루냐 분리 독립 요구를 자극할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는 헌법재판소와 상원의원 다수의 지지를 받아 재중앙집권화 추진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연일 부패 스캔들이 터지며, PP는 몸살을 앓고 있다.
카탈루냐 분리독립 시
스페인 GDP20% 감소
이른바 신(新)보수주의로 불리는 이 정치 세력은 신자유주의 경제 비전을 옹호하면서도 미국의 티파티 운동(Tea Party movement, 미국 정부의 막대한 경기부양책에 대한 일종의 시민 불복종 운동)처럼 당국의 원칙, 즉 국가와 종교의 위대함을 복원하려 애썼다. 실제로 스페인 우파 내에서 근본적인 쇄신의 바람이 불었다. 2012년 말, 스페인 군부와 PP의 유럽의원 알레호 비달 콰드라스는 심지어 여태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무장 충돌을 언급했다. 이 의원은 “스페인 헌법 제 8조는 ‘영토보전’ 수호를 군대에 위임하고, 지역을 장악할 권리를 중앙정부에 부여했다”고 말했다.
“포스트 독재”라 일컬을 수 있는 이 같은 선언은 유럽의회 내에서 반발을 샀다. 유럽의회의 우파 성향 그룹 대표인 벨기에인 기 베르호프스타트는 분개했다. “이런 콰드라스의 주장들은 민주주의가 지난 60년간 투쟁한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기에, 현재 정치권에 이런 주장들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유럽 위원회의 법률을 통한 민주주의 중재 전문가이자 학자인 장 피에르 마시아스는 “스페인의 지역 갈등이 스페인 사회의 민주화의 결함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우리는 합의에 의한 제도 변화에 부합하는 민주주의의 전환기를 맞았지만, 이 기간 동안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 여파로,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사회학적 프랑코주의가 끊임없이 고개를 들고 있다. 국제사면위원회의 명징한 보고서들, 예컨대 경찰들의 일탈,(13) 사법부의 비(非)독립성,(14) 부패사건에 연루된 정치인들에 대한 무(無)처벌, 사법부 장관 알베르토 루이스 가야르돈의 낙태 처벌에 대한 최근 주장 등이 프랑코주의 회귀를 방증한다.
사실, 민주주의와 진짜 단절하고자 하는 카탈루냐의 열망은 분리 독립 감정 속에 녹아 있다. 페리부인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마드리드는 군대식·종교식 식민주의를 지속적으로 펼치며 공포를 뿌리고 있다. 사람들이 스페인인이나 카탈루냐인으로서 자유를 느끼는 카탈루냐를 건설하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암울한 스페인에서 벗어난 카탈루냐를 건설해야 한다.”
글·장 세바스티앵 모라 Jean-Sébastien Mora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1700년, 후계자가 없던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손자 필립 당주를 후계자로 임명한 뒤 사망한다. 카탈루냐인들은 오스트리아의 대공 찰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프랑스에 포위된 바르셀로나는 영웅적인 저항 끝에 1714년 9월 11일 (카탈루냐 건국일) 항복하고, 필립 당주는 펠리페 5세란 이름으로 국왕에 등극한다.
(2) 1975년 프랑코의 죽음 이후, 국왕 후안 카를로스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1980년, 첫 자유선거가 치러진다.
(3) Alicia Fernández et García Mathieu Petithomme, <현대 스페인의 민족주의>, Armand Colin, Paris, 2012.
(4) 그 대가로, 바스크 자치 공동체는 스페인 정부의 일반적인 비용의 일부, 주로 국방비와 외교비를 지불했다.
(5) 17세기엔 파우 클라리스가, 19세기엔 발도메르 로스타우가, 20세기엔 프란체스코 마시아가 그리고 1934년엔 루이스 콤파니스가 카탈루냐 공화국을 공표했다.
(6) 바르셀로나 대학의 헌법 교수인 제라르도 피사렐로와 같은 연구원들이 주도한 헌법 개혁안은 진보세력과 군부 그리고 독재의 잔당 간 합의의 산물인 1979년 헌법과 달리 국민을 주체로 한다.
(7) 2010년도와 2012년도의 총선 결과를 비교하면, GU는 62석에서 50석으로 준 반면에 ERC는 10석에서 21석으로 증가했다. 주권을 지지하는 정당들이 135석 중 83석을 차지하며 절대 다수가 됐다.
(8) Laurent Davezies et Philippe Rekacewicz, <지역 국가에 반대하는 지역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02.
(9) Joaquín Trigo Portela, Ramon Tremosa i Balcells, Salvador Viñeta, < L’empresa catalana en l’economia global>, Papers d’economia industrial, n° 19, Generalitat de Catalunya, 2003.09.
(10) 1998년, 독일의 바덴 부르템부르크 지역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자치 지역,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역, 프랑스의 론 알프스 지역은 다자간 업무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Angélique Bizoux, <대외정책에 등장한 카탈루냐>, L'harmattan, coll. <Inter-national>, Paris, 2006.
(11) Albert Castellanos, <Deu raons per superar la crisi amb independència>, Revista EINES, n°13, 2010.11.
(12) 용어 “카탈루냐 지방”은 카탈루냐 문화가 깃든 영토, 즉 카탈루냐어가 사용되는 지역을 말한다. 인민당이 카탈루냐 텔레비전 채널(TV3)에 외부로의 방송 송출을 금지했는데, 이는 분리 독립이 야기할 공포를 반증하는 것이다.
(13) Amnesty International, Spain: Adding insult to injury : The effective impunity of police officers in cases of torture and other ill-treatment, 2007, www.amnesty.org.
(14) 2010년 3월, 스페인 현직 판사의 절반인 1400명의 판사들은 마드리드에서 사법부의 정치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