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의 변화에 직면한 이란-시리아 관계

2013-10-12     알리 모타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9월 20일 <워싱턴 포스트>와의 대담에서 시리아 분쟁에 대해 중재를 제안했다. 30년이 넘은 다마스쿠스와 테헤란의 전략적 관계가 위협을 받고 있는가? 이슬람 공화국이 자국의 정책을 변경하여,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내칠 준비를 하는 것인가?

 1996년부터 이라크의 나자프(Nadjaf)에 망명해 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1978년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바스당 정권의 압력을 피해 이라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몇몇 측근들은 당시 호메이니에게 시리아를 선택할 것을 조언한다. 시리아 역시 바스당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지만, 시리아의 바스당은 사담 후세인에게 완전히 적대적인 분파였다. 하지만 이라크에서 겪은 일로 혼쭐이 난 호메이니는 결국 프랑스를 선택하게 된다. 이런 불신에도 불구하고 1970년부터 권좌에 오른 아사드 가족이 지배하는 시리아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전략적 동맹국이 되었고 그리하여 30년 동안 재정적·군사적·경제적 이익을 얻어낸다. 이후, 다양한 사건들이 이들의 동맹에 기여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전주곡인, 안와르 사다트(Anouar El-Sadate)와 멘하임 베긴(Menahem Begin) 사이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서명된 1978년부터 하페즈 알 아사드(Hafez El-Assad) 대통령은 카이로를 대신할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걸프만의 아랍 군주국들과는 반대로 하페즈 아사드는 1980년 9월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한 것을 비난함으로써 테헤란의 주요 동맹국이 되었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후 레바논에서의 헤즈볼라 창설, 발전은 동맹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시아파 조직인 헤즈볼라로 향하는 무기들이 시리아를 경위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마스쿠스 주재 이란 공화국 대사만이 최고지도자가 직접 임명했다는 사실이 이런 동맹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징후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런 특별 대사들의 리스트와 그들의 경력을 훑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하마드 호세인 아크타리(Mohammad Hossein Akhtari)와 호세인 무사비(Hossein Moussavi)는 이란으로 돌아간 후, 외교부에서의 경력을 던져버리고 최고지도자실에서 일했다.

‘아랍의 봄' 에 대한 외부 책임론 제기

1997년 모하마드 하타미(Mohammad Khatami)가 이란 대통령에 당선되자, 테헤란과 헤즈볼라 사이의 관계가 약화됐다. 이란의 개혁주의자들이 걸프만의 아랍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이란 외무부 장관 카말 하라지(Kamal Kharazi)가 2002년 4월 레바논을 방문해 헤즈볼라에게 좀 더 신중해줄 것을 요청하자,(1) 헤즈볼라 사무총장인 하산 나스랄라(Hassan Nasrallah)가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에게 불평을 털어놓기 위해 테헤란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시절 레바논 주재 이란 대사관과 헤즈볼라 사이의 교섭 업무가 불신으로 가득차면서, 이란 혁명수비대가 업무를 이관받아 헤즈볼라와 직접 교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타미 개혁정부는, 2002년 1월 조지 부시 정부가 이란을 악의 축에 포함시키는 결정을 하자, 국제관계와 지역관계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멈추게 된다. 미국 행정부는 2004년 11월 프랑스, 영국, 독일의 유럽 3개국 외무장관과 당시 이란의 최고국가안보위원회 사무총장이었던 하산 로하니가 함께 서명한 핵문제 협상안을 거부했다. 이 협상안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중지한다고 예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런 강경한 태도 때문에 2005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가 승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보안군과 혁명수비대가 지역 관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헤즈볼라에 대한 지원은 더 단단해지고, 2005년 2월 14일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가 암살된 후 고립되고 약화된 시리아 권력과의 관계도 강화된다. 미국과 프랑스는 총리 암살에 시리아가 연루되어 있다면서 시리아를 비난했다.

2011년 초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발하자, 이란의 지역정책은 혼돈에 빠지게 된다. 우선, 테헤란은 이런 ‘혁명들’이 자체의 내재적인 혁명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상을 퍼뜨리려 노력한다. 다시 말해 이슬람주의자들이 권력에 오른 것을 두고, ‘이슬람의 각성’을 예언했던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예언이 실현된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2년 전에 자국의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했던 이란이 시리아에서의 반란을 서구와 이스라엘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면서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과 바레인의 혁명들에 지지를 보냈다.

이런 부조리한 논리는 테헤란이 자국의 정치를 변화시키기로 결정하고 다마스쿠스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배제한 권력이양 가능성을 검토하기까지 1년간 지속됐다. 이후 이란은 시리아 반체제인사들과 대화를 시작했고 조정자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전략은 일정 부분 미국의 전략적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쟁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경쟁은 결국 종교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다른 시아파 전투 그룹을 지원하는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살라피스트 그룹(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수니파의 지하드 그룹을 전폭 지원한다. 이런 식의 극단적 파당화(派黨化)는 시리아든 레바논이든 이라크든 간에 그때까지 상대적으로 조화롭게 살아왔던 주민들을 크게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살라피스트 그룹은 시아파를 표적으로 삼고, 반면 헤즈볼라 같은 시아파 정치조직은 살라피주의와 지하드 분파를 주적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로하니 대통령, 사우디와 관계 호전 시도
 
테헤란과 리야드의 경쟁은 종교적 차원이나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으로만 축소되지 않는다. 이란은 ‘아랍의 봄’과 튀니지와 이란의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을 지지했고, 무슬림 형제단과 가까워졌다. 반면에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슬림형제단을 비난하고, 모하메드 무르시 대통령에 대한 2013년 7월 3일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테헤란은 이슬람 혁명의 원칙과 모순되게도 다마스쿠스의 권력과 동맹을 맺었다. 다시 말해 이런 동반관계는 종교적 신념보다 지정학적 이익을 더 따르고 있는 것이다. 2013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슈에서 최고지도자의 관할인 이란의 외교정책은 논의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공식적인 합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의 결과인 국제 제재와 이 지역에서의 계속되는 고립을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전임자의 외교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로하니 후보가 눈에 띄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런 비판 덕택에 많은 표를 얻게 된다.

2013년 6월 선거에서 승리한 후,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최초 담화에서, 외교안보정책의 복잡한 사정을 꿰고 있는 로하니 당선자는, 하타미의 전략을 다시 계승하여, 리야드와의 관계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1998년 최고국가안보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안보협정을 조인했던 로하니는 사우디아라비아를 ‘형제이며 친구’(2)라고 표현했다. 9월 중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몇몇 매체들은 로하니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압달라 국왕의 공식 초청을 받고 성지순례 기간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란 대통령실의 새로운 업무 스타일과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Mohammad Javad Zarif) 외교장관의 메시지가 이런 변화를 증명해주고 있다. 2013년 9월 5일 전직 미국 하원의장의 딸에게 보낸 트위터 메시지에서 자리프 외교장관은 전 세계의 유태인들에게 새해를 인사를 했고, “이란은 홀로코스트를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부인하는 자로 알려졌던 사람은 이제 떠나고 없다.”고 주장했다.

최악의 경제상황을 물려받은 로하니는 무엇보다 먼저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국제적 압력과 제재를 풀고자 한다. 의회의 감사(監査)와 신행정부에 따르면, 이란의 경제상황은 올해 5.6% 하락했는데도, 전임 대통령은 6% 상승했었다고 주장했다. 스스로 서구와의 데탕트라고 부르는 비약적인 접근을 하면서, 로하니 대통령은 여러 가지 금기사항을 깨고 있다. 그는 혁명수비대 내에 존재하는 마지막 저항자들을 무력화하고 최고지도자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9월 17일 담화에서 이란 외교의 ‘비범한 유연성’(3)에 경의를 표했다. 서방에 대한 개방 가능성은 아마 핵문제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핵문제에 관한 관리권한은 현재 이란 외교부장관에게 넘어갔다. 처음으로 이란 대통령은 시간이 서구에게뿐만 아니라 테헤란에게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4)

많은 징후들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란의 권력은 여세를 몰아 시리아에서 다른 시나리오들을 상상하고 있을지 모른다. 8월 29일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손녀인 나이메 에스라기(Naiimeh Essraghi)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전직 대통령 하셰미 라프산자니가 다마스쿠스 교외의 가스 사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말을 올려놓았다. “자국민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한 권력은 그로 인해 끔찍한 재앙을 당할 것이다.” 며칠 후 사바쿠(Savakouh) 마을에서 같은 말을 하는 라프산자니의 담화비디오가 인터넷에 떠돌았다.(5) 이에 대해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부인하지 않은 채 적당한 수준의 반박에 만족했다. 또 다른 징후는 전직 혁명수비대 사령관이었던 사르다르 알라에이(Sardar Alaei)가 2013년 9월 13일 선언한 내용에도 들어있다. “불행하게도 시리아 사태가 터진 이후, 반(反)이란 분위기가 아랍세계 주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당신들이 시리아의 독재체제를 지지합니까?’ 아랍 국가들에서 지난 3년간 발생한 혼란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 때문에 아랍 사람들의 사고에서 이란의 영향력이 상당히 축소되고 있다.”(6)

이란-시리아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참모총장도 역임했던 알라에이는 시리아에 대한 정책 변화를 주장했던 초기 인물들 중 하나에 포함된다. 일 년 전, 전직 프랑스주재 이란 대사가 운영하는 이란 외교 사이트에서 대담을 하면서, 알라에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 시리아 체제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인사들은 바샤르의 퇴진이 진정한 개혁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란 역시 조금씩 ‘바샤르 알아사드 없는 시리아’를 생각하고 있다.”(7) 당연히 이런 선언에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혁명수비대의 알쿠드(Al-Quds) 부대 카셈 솔레이마니(Qassem Soleimani) 장군은 이란이 ‘끝까지’(8) 시리아를 지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어도 토론은 시작된 것이다.

이란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나돌고 있다. “시아파 성직자는 권력을 잡기까지 이슬람 탄생 이후 1400년을 기다렸다.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란이 지난 30년간 겪었던 모든 위기는 이란의 적응 능력뿐만 아니라, 내부 토론에 의한 노선 변화 능력도 확인해 주었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하고, 내부의 분쟁과 국제적 제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체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88년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라크와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유엔안보리 결의안 598호를 받아들일 경우 ‘이슬람 선지자에 대한 불복종 행위’로 생각하며 이를 ‘무효’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는 며칠 후 결의안에 동참했다. 거부할 경우, 지역 분쟁을 연장시키고 자신의 국가를 더욱 고립시키게 되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라크와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7년, 호메이니는 이스라엘과 심지어 이라크와의 문제도 잊을 수 있지만, 앞으로 어떤 관계도 다시 맺어서는 안 되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에 대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1년 12월 10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하셰미 라프산자니는 그 시절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였던 미래의 압둘라 국왕을 만났다. 시리아의 현 상황에 대해 테헤란은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즉 무조건적으로 아사드의 권력을 계속 지지하여 전쟁을 지속하거나 혹은 자국의 이익을 보존하면서 지역 정책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상황인 2006-08년 레바논 위기 때, 이란은 헤즈볼라가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하는 도하협정에 서명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 결과 위기에서 벗어나 선거가 치러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란은, 다른 민병대들의 무장은 해제되는 반면 헤즈볼라의 무장은 계속 유지된다는 조건 하에, 1989년 타에프 협정을 지지하여 레바논의 기나긴 내전에 종말을 보게 해 주었다.

테헤란이 아사드 외의 다른 세력을 지지하는 이런 유의 시나리오가 가능할까? 기나긴 소모 전쟁은 이미 약화된 이란의 경제에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고 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이란은 시리아 군대의 봉급을 책임지고 있다. 분쟁이 지속되면 이란의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아랍 국가들과의 정상화에 방해가 될 우려가 있고, 심지어 이란이 혁명 이후부터 피해온 터키와의 위기국면을 맞게 될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예고한 다마스쿠스 정부와 반군 사이의 협상에, 그리고 이란이이 협상에서 차지할 수 있는 지위에 많은 것이 달려 있을 것이다. 이란은 다마스쿠스에서 시아파들이 축출되고 동시에 살라피스트 세력이 대두하는 것을 막을 보장책을 찾으려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종교 대립이 서아시아의 기본적인 단층 구조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의 분쟁은 이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고, 테헤란의 동맹국인 사담 이후의 이라크에서는 수니파가 지금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도전하게 될 것이다. 현재 이란 권력은, 전쟁의 결과가 자국에게 전략적 패배를 안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제네바 협상 과정에 참여할 자국의 의지를 상기시키면서, 기회주의적 정책을 펴고 있는 것 같다.
 

글·알리 모타디 Ali Mohtadi
세계평화·안보연구전문가. 주요 저서로 <The Race for What's Left : The Global Scramble for the World's Last Resources>(Metropolitain Books, New York, 2012) 등이 있다.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1) 2002년 4월 12일 담화.
(2) IRNA(이슬람공화국 공공뉴스) 통신사, BBC 의 이란 모니터링 서비스가 인용, 런던, 2013년 9월 19일.
(3) BBC의 이란 모니터링 서비스, 2013년 6월 17일. 이 표현은 661년 자신의 적과 협정을 서명한 이맘 하산이 한 일을 가리킨다.
(4) 이란 텔레비전에서의 담화, 2013년 9월 10일, BBC 이란 모니터링 서비스가 인용, 2013년 9월 18일.
(5) Radio Free Europ, http:www.rferl.mobi/a/25094229.html
(6) 일간지 <샤르그(Sharg)>, 테헤란, 2013년 9월 14일.
(7) 2012년 9월 4일.
(8) FARS(이란 뉴스) 통신사, 2013년 9월 4일, BBC 이란 모니터링 서비스가 인용, 2013년 9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