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사태가 파산시킨 프랑스 외교

2013-10-14     올리비에 자제크


제68회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을 찾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이란 대통령과 번외회담을 가졌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올랑드 대통령은 시리아 사태와 관련한 협상에서 이란을 제외시킬 것을 주장했었다. 미국의 과감한 외교술에 영감을 받은 프랑스가 변화를 꾀한 것이다.

지난 1월 말리에서 프랑스 군의 세르발 작전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 받는(1) 것과는 달리 이번 시리아 사태에서는 일찌감치 프랑스 외교의 완벽한 실패로 결론지어졌다. 과격주의자마냥 허세를 떤 뒤 동맹국들로부터 버림받은 프랑스가 받은 모욕감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러시아를 굴복’시키고 미국을 ‘리드’하고자 했던 올랑드 대통령이 최후의 순간에 보여준 어설픈 허풍은 일부 프랑스 일간지 보도와는 달리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게 됐다. 국외의 시각은 조금 더 직설적이다. 스스로 만족하는 프랑스의 모습을 보고 외교가나 외신에서는 샤덴프로이데(상대의 실패를 보고 느끼는 쾌감)가 담긴 연민 섞인 논평을 내기도 했다.

지난 9월 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유엔의 감시 하에 시리아의 화학무기 수천 톤을 ‘안정화’시키는 위기해결안을 제안해 합의를 이끌었다. 이 제안은 9월 5일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던 G20정상회의 기간 러시아와 미국의 양자회담에서 거론되었던 듯하다. 하지만 영국의 불참(2) 이후 공공연히 최고 보좌관 역할을 원했던 프랑스는 ‘강대국들(이 경우 강대국이란 국가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외교술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는 국가들을 의미한다)’ 간의 비공식적인 합의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다.  1년 전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레드 라인’ 발언으로 스스로 함정을 팠던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러시아 덕분에 이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거친 표현으로 비난을 멈추지 않으면서 미국의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다가 결국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공조를 이룸으로써 두 국가 모두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었다. 그리고 9월 20일부터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014년 7월로 예정된 시리아 사태 해결을 위한 평화회담인 이른바 ‘제네바 2’의 개최준비를 위해 제네바에서 양자회담을 가졌다.

딜레마 속 미국을 건져준 러시아

시리아 사태 해결에 중요한 열쇠를 손에 쥔 푸틴 대통령은 언제나 행동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일을 주도했고 동맹국들에게 자신이 제시한 모든 해결책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또한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정권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장하며 단순하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 있는 논거를 강조했다. 군사 목표물을 대상으로 하는 제한적인 군사작전이 과연 시리아 국민을 보호해줄 수 있는가? 무력 개입이 국제평화회담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가? 전 세계 곳곳에서 지하드 조직들을 추격하면서 왜 시리아에서는 그들을 도와주고 있는가? 세 국가의 현실정치라는 파렴치한 판에서 러시아는 오바마 대통령이 꺼려했던 군사행동에서 미국을 빼내 그를 도와주었다. 반면 구덩이에서 벗어난 프랑스는 소란스럽게 나팔을 불며 철조망을 향해 무작정 뛰어갔다.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프랑스인들은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홀로 고립되었던 올랑드 대통령의 모습과 미국의 입장과 회의 기구에 복종해야 하는 프랑스의 처지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프랑스 대통령과 외무부는 미국을 화나게 하고 영국을 곤란하게 하며 독일을 짜증나게 하고 레바논을 실망시키며 유럽연합을 한숨짓게 하고 러시아의 전략 결정자들을 즐겁게 하는 등 까다로운 임무를 한꺼번에 성공한 듯하다.

심지어 우파의 대중운동연합(UMP)의 프레데릭 르페브르 의원은 프랑스 군의 시리아 개입 욕망에 사로잡혀 이를 적극적으로 동조했다.(3) 시리아 사태에 대한 올랑드 대통령의 경솔함과 리비아 사태 때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감행한 모험 사이에 교량을 잇는 역할을 한 르페브르는 시리아 사태에 용납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그 외 프랑스의 이권과 관계없는 15건 정도의 국제 분쟁에는 관심조차 없다. 결국 말리에서 얻은 프랑스의 평판에는 금이 갔고 2003년 이라크 전쟁 거부로 쌓아 올린 긍정적인 이미지는 부족한 통찰력 때문에 한 순간에 무너졌다.

9월 19일 말리에서 성공을 맛보고 돌아온 올랑드 대통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굴욕을 지워버리려 애썼다. 바로 담화를 발표해 이제 프랑스가 시리아 반군에 공식적으로 무기를 공급할 것임을 알렸다. 올랑드 대통령은 “자유시리아군이 아닌 지하디스트로 무기가 흘러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철저한 통제 하에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올랑드 대통령의 방정식은 ‘통제’ ‘지하드디스트’ ‘자유시리아군’, 이렇게 미지수가 세 개나 포함된 고차방정식이라는 점이다. 현재로서는 모두 명확히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하다. 아흐라르 알 샴과 리와 알 타우히드처럼 ‘악명 높은 이슬람 분파’(4) 조직이나 강경한 알 누 스라 전선과 ‘자유시리아군’의 간극이 어느 정도일지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정식으로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5)는 사실로 정당화시킨 프랑스의 ‘무기 지원’ 결정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시리아의 광기어린 유혈극을 장기화시킬 것이며 아사드 대통령이 외부의 군사 개입을 규탄할 명분을 제공한 셈이다. 결국 정치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모든 국가들의 의지와는 상반된 무모한 도박이었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분석대로 1938년 뮌헨 협정 당시처럼 지적 능력의 부족으로 시리아 사태의 심각성 판단을 거부한 대중을 따른 ‘여론 외교’(6)의 실수일까? 프랑스 주간지 르 포앵의 논평가인 앙리 레비는 이 간결한 표현에 냉정함이 담겨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으로 외교적·지정학적 논리를 대신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리아 사태에 외교 실패의 첫 번째 원인은 시리아의 상황과 그 결과에 대한 편협한 평가에 있다. 몇 개월 전부터 프랑스 외무부는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중 실제로 시리아 정세에 정통한 몇몇 전문가들은 상황의 복잡성을 강조하며 시리아 국민의 일부가 어쩔 수 없이 아사드 독재정권을 지지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아랍 국가들을 보수주의로 만든 반계몽주의를 간접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극단적 과격주의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될지도 모를 국민들이 ‘새로운’ 시리아를 거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사드 정권이 붕괴되더라도 자신들의 안전은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현 정권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소문이 떠도는 가운데 진실은 시리아 국민의 대다수가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 더 정확하게는 자신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정권의 편에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인들은 사담 후세인을 버렸고, 리비아들은 무아마르 카다피를 몰아냈으며 이집트인들은 호스니 무바라크를 끌어내렸다. 모두 혹은 거의 대부분 함께 이루어낸 일이다. (이집트의 젊은 세대와 일부 리비아인들이) 새로운 정부가 이전 정권보다 더 올바르고 정의로울지 의심은 했지만 말이다. 시리아에서는 현재 정부군과 반군 가운데 어느 쪽도 이길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원인은 현 정권의 군사적 우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대다수가 체념하고 받아들인 충성심도 한 몫 한다. 시리아인들은 아사드 정권의 고질적인 족벌주의와 경비대의 보수주의, 난폭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몰아내기를 거부하고 있다. 미셀 아플라크(7)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알라위파 괴물과 무력을 행사하고(8) 완전한 이슬람 율법을 강조하며 소수파를 억압하는 괴물 사이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국면에서 기독교 마을 마룰라와 알라위파 근거지인 라타키아, 국경 쿠르드 지역에서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시리아 비극을 분석하는 데 있어 최우선 시 되어야 할 과제다.

외교해법 못찾는 프랑스식 고차방정식

일부 반군은 위압적인 과격파에 실망했지만 순풍에 돛단 듯 순식간에 순조롭게 내전을 이끌었던 이들이 과격파였다. 방송에 잘 출연하지 않는 여러 전문가들은 혼란스러운 심리가 담겨 있으면서도 매우 사실적인 현재의 복잡성을 프랑스 정부 관계자들에게 조심스럽게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에 대한 입장을 극단적인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정부는 전문가들의 모든 분석을 제쳐두었던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를 통한 과도한 외교적 반응이 시리아 사태에서 두 번째로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이다. 프랑스는 9·11테러 이후 미국인들의 카우보이식 사고를 비웃었던 당사자가 아닌가. 지금은 당연히 모두가 이에 동의하고 있다. “우리 편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이라는 신보수주의 노선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연설은 전략이 부재한 외교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9) 그렇다면 왜 프랑스 정부는 시리아 사태의 경우에 아사드 대통령을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대대적으로 공표해야겠다고 판단했었는지 의문이 든다. 사태의 심각도가 변화함에 따라 국제 관계 속에서 자국의 입장 표현이 규제되고 서로 견제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응징’ 발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가? 베르트랑 바디 교수는 “시리아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책임감(지난 2년간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0만을 넘었다)과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응징하겠다는 의지가 모두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응징과 보호는 서로 다른 말이다”(10)며 유감스러워 했다.

분노할 만하다. 8월 21일 구타 지역에서 자행된 비열한 화학무기 공격을 도저히 방관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분노 때문에 국가의 정상이 신중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현재 시리아는 내전의 상황에 있고 전쟁 통에서 인간은 원래 동물로 변하기 마련이다. ‘내전에서는 범죄가 맹위를 떨친다.(피에르 코르네유)’ 정부군과 반군 중 어느 쪽도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 상대보다 더 ‘고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현재의 전선(戰線)을 안정화함으로써 학살을 종식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러시아는 아사드 정권에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몇몇 걸프만 국가들도 각국의 지정학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른 반군 단체에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터키와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이 점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시리아 내전은 중동의 지역전으로 치닫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땅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쟁터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기대고 있는 프랑스 외무성의 역할은 다른 안정적인 외교수단을 제안하는 것이다.(11) 물론 불완전하고 당연히 불충분하다. 하지만 고차방정식의 모든 미지수에는 대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전혀 반대로 프랑스는 오히려 시리아의 소용돌이에서 추가적인 불안정 요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중재자라는 까다롭지만 꼭 필요한 역할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 냉철하고 침착한 독일이 몇 달 후 미국과 러시아의 주재 하에 열리게 될 시리아 정부와 반군의 협상테이블에서 유럽의 대표자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것이다. 여기에 아마 이란도 참석함으로써 현 위기상황을 타개할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비록 9월 25일 유엔총회에 참석한 로하니 이란 대통령과 오바마 미 대통령의 전격 회동은 무산되었지만 미국이 이란과의 외교 관계를 좀 더 현실적으로 다루기로 한 듯하다. 지난 6월 18일 올랑드 대통령도 시리아 사태 논의를 위한 다음 국제평화회의에 로하니 대통령의 참석이 “필요하다면  환영”한다며 결국 이란 대통령과의 회담을 수락했다. 국제무대에서 프로다운 실력 있는 외교로 명성을 유지해온 국가로서 유엔 조사단이 시리아 구타 지역의 참사 조사를 벌이기도 전에 유엔 안보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복수하는 역할을 자처해 ‘응징’의 슬로건을 내건 것은 최근에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실수로 남을 것이다. 이는 순진하게도 콜린 파웰 전 미 국무장관과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던 ‘반(反)국민적인 여론’(12)의 판단이었다.

이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신중을 기할 것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정치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높아지고 있다. 장 피에르 슈벤느망 프랑스 전 내무장관도 “예전에는 정의가 존재했었다. 지금은 정의 대신 도덕이 자리 잡고 있다. 도덕을 지키지 않으면 응징을 당한다. 논리는 더 쉬워졌지만 실은 매우 위험하다. ‘개입의 권리’는 언제나 강자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약자가 강자의 일에 개입한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13) 2002년에서 2003년까지 프랑스는 이라크 정권이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지만 유엔의 역할을 존중하면서 날카로운 시각으로 단호하면서도 신중하게 대응할 것을 촉구했었다.

아사드 대통령이 자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가스 학살은 1988년 후세인이 저지른 것으로 확인된 이라크의 독가스 학살과 일치한다. 여기에 시리아 폭격까지 감행해 25년 만에 이라크 침공 때와 같은 전철을 밟아야 하겠는가? 미국이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이라크의 민주주의 평화 정착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 부은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이라크 실상 보고서를 보고받고 있다는 오바마 대통령은 아마 그 대책을 알고 있는 듯하다. 무의식적으로 개입하는 프랑스 군으로서는 알기 힘든 대책이다. 결국 이것이 이성적인 해결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올리비에 자제크 Olivier Zajec

번역•배영미 petite0222@hotmail.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

(1) ‘말리, 끝나지 않은 노래 ‘테러와의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2월호.
(2) 2013년 8월 29일. 영국 하원은 시리아에 대한 군사 개입 동의안을 찬성 272표, 반대 285표로 부결시켰다.
(3) 프레데릭 르페브르, ‘나는 시리아 사태와 관련해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을 100% 지지한다’,  블로그 L’UMP d’après 인터뷰, <Le Monde> 홈페이지, 2013년 9월 5일.
(4) 아르맹 아레피, ‘시리아 내전에 대한 10가지 착오’, <Le Point>, 파리, 2013년 9월 5일자.
(5) ‘올랑드 대통령, ‘시리아 반군에 통제적으로 무기제공’’, <Le monde.fr, APF, 로이터>, 2013년 9월 20일.
(6) 베르나르-앙리 레비, ‘여론 외교에 대한 반박’, <Le point>, 2013년 9월 12일자. 레비는 이 글에서 프랑스가 예고한 ‘응징’과 1966년 드골 장군의 나토 탈퇴 결정을 비교하고 있다.
(7) 미셀 아플라크는 시리아 기독교도인으로 1910년 다마스쿠스에서 출생했으며 수니파의 살라 알딘 알비타르, 알라위파의 자키 알 아르수키와 함께 범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토대로 1947년 바트당을 설립했다. 이슬람을 수용한 아랍식 세속적 민족주의를 예찬한 아플라크는 군부에 의해 추방되었고 1989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8) 알프레드 드 몽테스키우, ‘시리아, 전쟁 공포 고조’, <Paris Match>, 2013년 9월 11일자. 
(9) ‘President Bush adresses the Nation’, <Washingon Post>, 2001년 9월 20일자.
(10) ‘무력행사는 응징의 유일한 방안이 아니다’, <La Vie>와의 인터뷰, 파리, 2013년 9월 4일자.
(11) 일명 ‘때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불렸던 유명한 로마 장군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의 전략과 비교될 수 있다.
(12) 베르나르-앙리 레비, ‘여론 외교에 대한 반박’, op. cit.
(13) ‘프랑스는 종교 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 <Le Parisien>과의 인터뷰, 2013년 9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