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에 역사와 기억이 있다

2013-10-14     세바스티앙 라파크

피에르 르장드르는 일전에 이런 얘기를 했었다. “로마인들은 처음으로 세계화를 추진한 사람들이었다.”(1) 로마의 지배는 여러 나라로 확대됐고, 로마는 세계 도처에서 위력을 과시하며 이름을 드높였다. 이미 서기 23년에 태어난 로마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마치 자크 아탈리가 로마식 복장과 샌들을 신은 듯한 모습으로 열광을 보냈다. “세계를 통일한 대로마제국이 교역을 통해, 그리고 다행히도 평화로운 공동체를 통해 문명의 발전을 이룩했다는 게 모두의 보편적인 생각이며, 과거에는 묻혀있던 제품들을 포함하여 모든 상품의 쓰임새도 널리 보급됐다.”(2)

산지와 토양이 중요한 빚은 술

이렇듯 만족스러운 세계화가 세계 최초로 이뤄진 것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 건 바로 포도나무와 포도주, 포도주 제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는 <박물지> 14권에서였다. 지중해 지역에서 와인의 거래는 매우 오래 전부터 있어 왔으며, 공화정 시대가 막을 내리고 로마 제정이 시작되던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와인의 수출량과 수입량이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상인들과 농학자들은 일찍이 와인을 원산지별로 구분하여 분류하는 습관이 있었다. 기원전 2세기에 이미 와인의 품질은 양조 방식보다 포도 산지(terra)와 지방(patria)에 기인한다는 게 공통된 인식이었다. 와인의 제조 방식이 특히 중요해지는 건 향과 풍미를 지니고 정류된 수많은 와인들을 가공하는 과정에서이다. 이로써 재배 기간 동안의 태만했던 실수를 교정하고 양조 과정에서의 미비한 점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탈리아와 갈리아 지방, 스페인 지역의 특정 포도원에서 만들어진 질 좋은 와인들을 언급하고, 이어 그리스와 아시아, 이집트의 통상적인 와인들을 거론한다. 로마에서 와인을 마신다는 건 높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자본가 계급의 고급 와인이 생겨나기 전이었으나, 해외 와인의 경우는 특히 인기가 높았다. 플리니우스는 이렇듯 수입 와인의 인기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그는 시장의 확대로 와인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발생하게 될 폐단과, 이러한 상황이 인간의 기술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가늠해 보았다. 특히 와인과 같이 까다로운 손길이 요구되는 기술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지 우려한 것이다. “과거에는 각각의 왕국들이 나라 안에서만 머물었기 때문에 이들이 생각하는 범위 또한 국경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황무지를 일궈야 하는 신세가 되다보니, 이들은 어떻게든 악착같이 지식수준을 높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국경이 넓어지고 부가 넘쳐나자 이후 세대들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포도 재배와 관련하여 플리니우스는 마음가짐의 변화에 따른 실질적인 결과에 대해 애석하게 생각했다. “우리 시대에서는 완벽한 포도 장인의 선례를 얼마 보여주지 못했다.”
세계화가 진행된 오늘날의 경제에서 와인이 처한 상황에 대해 살펴보노라면 과거 지중해 주위의 세계가 처음으로 통일됐던 그 당시, 플리니우스가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떠올라 언제나 당혹스럽다. 더욱이 그가 오늘날 벌어지는 것과 똑같은 양상의 ‘와인 전쟁’(3)을 지켜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놀랍기 짝이 없다. 자연산 와인과 인공 와인, 산지 와인과 품종 와인, 장인이 담근 와인과 상인이 만든 와인, 현지에서 생산된 와인과 해외에서 들어온 와인 사이의 싸움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 사람들이 비단 와인만 마신 것은 아니었으나, 와인이 다른 술과 같지 않다는 건 그 시절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때에도 일반 와인보다 품질이 좋은 명산지 와인이 존재했고, “한 통에서 나온 와인”이라도 그 맛은 얼마든지 서로 달라질 수 있었다. “용기에 따른 차이도 있었고, 뜻밖의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와인 산지의 토양이 차지하는 비중에 경이로움을 표했으며, 피체눔에서 만들어진 와인과 티볼리 와인, 사비나 와인, 아미네 와인, 소렌토 와인, 팔레르노 와인의 맛을 구분했다. 맥주와 벌꿀술도 마셨지만, 이들에게 와인은 특별하고 신비로운 술이었다.

대량 생산되는 제조된 술

특정 포도의 품종(혹은 블렌딩)과 해당 산지, 와인 제조인의 기술, 그 해의 기후 조건 등의 조합으로 탄생하는 와인은 이 모든 요소들이 독특하게 균형을 이뤄내며 맛을 뽑아내는 기술의 꽃이자 결실이며, 이 균형감을 똑같이 재현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와인의 이 오묘한 조합과 균형에, 고대 사람들도, 그리고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에 농가공 분야의 다국적 기업들로서는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일반적인 주류를 시장에 내놓기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으며, 위스키나 보드카, 진 같은 곡주 등이 이에 더 적합했을 것이다. 이런 주류는 생산 과정에 있어서도 그 어떤 지리적 제약 요건도 없을뿐더러 원자재 수급 문제도 생기지 않고, 기상 상황을 걱정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술은 수급량 조절에 따른 어려움도 전혀 없다. 전체주의 사회를 그린 작품 <1984년>에서 조지 오웰이 증류주인 진을 승리주로 설정하며 이 세계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술로 만든 것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빅브라더의 힘에 굴복한 윈스턴 스미스는 책의 말미에서 시큼하고 무색투명한 리큐어를 마시며 마음을 달랜다.
산지 와인은 토양의 면적과 관련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단점도 있다. 로마네 콩티의 경우, 1.8 헥타르의 면적에서 연간 6천병이 생산된다. 부르고뉴 와인의 꽃을 탐내는 세계적 기업으로서는 그렇게 제한적인 생산량이 특히 발목을 잡는다. 이에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장소로서 담벼락에 둘러싸인 포도원의 한 구역이 그려진 그림보다는 브랜드 명 자체를 손에 넣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가령 샹파뉴 지역의 경우, 굴지의 세계적 명품 기업 LVMH(루이뷔통-모엣-헤네시) 그룹이 크뤼그와 돔 페리뇽을 인수한 이후로 해당 와인의 생산량이 급증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자본의 논리가 없앤 지역색

이와 관련하여 와인 전문 잡지에서는 친절하게도 ‘이례적인 재고량’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써주었다. 게다가 와인의 브랜드화는 해당 와인을 전 세계에서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모엣 샹동을 포함하여 LVMH의 샴페인은 이제 아르헨티나와 캘리포니아, 브라질, 호주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에서도 생산이 가능하다. 샹파뉴 지방에서는 연간 3억 5천만 병이 생산된다. 전 세계 신흥 중산층의 발포성 와인 수요는 10배나 증가했는데, 넓이가 한정된 지역의 와이너리였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나, LVMH의 브랜드 와인은 ‘스파클링 와인’ 시장에 제품을 공급함으로써 와인 수요를 겨냥했다. 솔직히 말하면 연구와 실험을 통해 기술적으로 맛을 재현하여 LVMH에서 만들어낸 모엣 샹동은 확실히 마실 만한 수준일 뿐 아니라 맛있기까지 하다. 사실 시인 프랑시 퐁주가 칭한 ‘와인의 비밀’이라는 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그 정도 규모로 와인을 제조해낼 수 있었을까? 시인에게 있어 와인의 비밀이란 무언가 부서지기 쉽고 금세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역의 세계화와는 맞지 않는 개념이다. 와인의 맛이 쉽게 ‘부서지지’ 않으려면 로렐과 아르디 등 <베탄느&드소브>(4)에서 활동하는 유수의 와인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황으로 ‘보호’ 처리가 되어야 하고, 맛이 변하지 않으려면 기업적 포도 재배 방식에 열광하는 연구원들이 와인의 맛을 꾸며주기 위한 각종 용품들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2004년 칸 영화제에 출품된 다큐멘터리 영화 <몬도비노>(5)에서 미국인 감독 조나단 노지터는 전면적인 경쟁 사회에서 와인도 다른 제품과 똑같은 상품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경제 분야와 접목된 기술 과학이 세계화되는 과정에서, 오늘날 기술 과학이 다스리는 제국의 반경은 브랜드를 활용한 전 세계 포도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메독과 멘도사, 나파밸리 와이너리의 빼곡히 정리된 창고에서는 포도즙을 균일하게 살포하고, 과즙의 산도를 조정하며, 색을 더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제조된 와인은 원심분리기에 돌리고 불순물을 걸러낸 후, 보르도 타입 와인 병에 담겨 국제 통용 라벨이 부착된 뒤 시판된다. 산지 와인을 고수하며 지방색을 지켜가는 사람들로서는 무언가 타협하기 힘들 만한 측면도 있다. 조나단 노지터 감독 역시 피레네 지역과 시칠리아, 아르헨티나 지역에서 반발하고 나선 포도 재배자들의 모습을 촬영하면서 이 점을 짚어준다. 이쯤에서 세계화의 다행스러운 모순이 나타나는데, 바로 브라질과 칠레, 우루과이, 그리스, 그루지야, 세르비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도 기업적 논리에 기반을 둔 농업에 반기를 든 또 다른 장인들이 곧 나타날 것이란 점이다. 매년 더 많은 포도 농원들이 동참하고 있는 산지 와인 수호 운동 역시 전 지구적 움직임으로 확산되며 ‘세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플리니우스 시대 때와 마찬가지로, 와인을 농산품으로 인식하는 진영과 상품으로 바라보는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산업화 사회가 도래하고 마케팅 방식이 발전하며 시장이 무한 개방됨에 따라 그 규모가 확대된 것만 제외하면,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게 없다.
물론 자본주의 논리가 만연한 세계에서 획일화된 와인을 꿈꾸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들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들은 물맛 역시 통일시키려 한다. 물에서 지역색을 없애기 위해 미네랄 성분을 제거한 후 새로이 미네랄 성분을 주입하여 전 세계에 팔고자 하는 것이다. 보졸레 지방에서 형편없는 와인에 맞서 신나는 유격대 활동을 벌이는 임시 조직의 대표인 마르셀 라피에르는 예전에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이들이 원하는 건 바로 맛의 기억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저들이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우려를 지울 수 없으며,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저들의 의도가 무섭게 느껴진다. 저들이 추구하는 목표 역시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한다. 하지만 뿌리내릴 곳도, 과거의 기억도 없는 이들이 플리니우스가 지적했던 부분을 망각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 같다. “저마다 편애하는 자기만의 와인이 있다. 그리고 이 맛의 기억은 어딜 가든 늘 한결같다.”


글·세바스티앙 라파크 Sébastien Lapaque
기자 겸 작가. <다르게 여전히(Autrement et encore)> 등의 저서가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감독 제랄드 카이야 Gérald Caillat, 대본 피에르 르장드르 Pierre Legendre, 다큐멘터리 ‘도미니움 문디: 경영 제국 Dominium Mundi: L'Empire du management’(DVD Ideale Audience Internationale/Arte France, 2007) 참고.
(2) 플리니우스, <박물지Histoire naturelle> 14권 참고.
(3) Alice Feiring, <The Battle for Wine and Love: Or How I Saved the World from Parkerization>, Harcourt, 2008.
(4) 매년 간행되는 <프랑스 와인 가이드 Guide des vins de France>(Éditions de la Martinière)의 저자.
(5) 조나단 노지터 Jonathan Nossiter, ‘몬도비노 Mondovino’,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