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이미지, 더러운 전쟁
리비아, 말리, 시리아…. 전쟁터에서 군부대 사이에서의 소통은 전문화돼 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다 말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공개도 안 되고, 말도 없고, 이미지도 없고, 영상도 없고, 적도 없고, 희생자도 없고, 포로도 없는 전쟁.” 2013년 1월, 말리 내전 초기 몇 주 동안 미디어도 대중도 당혹스러워 했다.
사람들은 지하디스트들(이슬람 반군)에 대한 철저히 준비된 이 같은 프랑스 군의 반(反)불통 계획, 즉 ‘대침묵’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는 자국군의 실전 경험과 뛰어난 무기, 완벽한 전술에 그 어느 것에도 도전을 받지 않고, 말리 내전의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말리 군대를 접수하고 프랑스 군을 리비아에 파병해 내전을 종식시키고 리비아에 황제처럼 입성했듯(1) 프랑수와 올랑드 대통령에게도 그런 기회를 가졌을 수 있었다.
2013년 1월 중반 내전 개입 초기 때, 몰려든 150여명의 기자들은 수도 바마코와 수도 북쪽 후방 퇴로에 발목이 묶였다. 프랑스 국방부 대변인 티에리 뷔르카르 대령은 “기자들이 초기엔 존재하지도 않는 영상을 촬영하려 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전투를 보고 싶어 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성적인 기자들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두가 행렬 맨 앞 VAB(앞부분에 방탄막을 장착한 장갑차)에 탑승하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기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1991년 걸프 만 ‘사막 폭풍’ 작전 때 그랬던 것처럼, 항공기의 순찰과 병사들의 도착과 출발 모습뿐이었다”고 덧붙였다. 2개월 후, 2013년 3월, 말리 북동쪽 끝단에 위치한 아드라르데이포가 산악 전투 때 역시 기자들은 포로와 지하디스트들의 시신 등 모든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뷔르카르 대령은 이번에도 역시 “그런 영상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쟁 장면을 촬영하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전투기 블랙호크의 추락(2) 같은 장면은 없다”고 말했다.
채널 경쟁을 조율하는 미디어 담당장교
내전 내내, 미디어를 다루는 데 노련한 이 장교는 주요 텔레비전 채널 간 상업 경쟁을 조율해야만 했다. 이 채널들은 “간혹 뉴스를 감안하지 않은 채” 경쟁을 펼쳤다. 예를 들어 한 채널은 경쟁 채널이 홀로 군 차량에 탑승하자 탑승을 모두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장-마크 탕기는 자신의 블로그 <마무스>에서 이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말리 내전에 대한 기자들의 과시적인 오프닝 보도 행태는 우리가 지금까지 봤던 관행, 예컨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소극적인 관행과는 달랐다.”(3)
정보 및 국방통신 심의회(Dicod) 소장 피에르 베일은 한술 더 떠, 말리 특파원 대부분이 군사 기술과 아프리카 현지 사정을 거의 모르는 젊은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풋내기들은 ‘전투’, ‘화염’, ‘폭발’ 등을 기다리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물류밖에 없다. 요즘 전쟁은 비대칭적이며 거의 보이지 않는 원거리 전쟁 같은 것”이라고 전했다. 프랑스 선봉부대인 특수부대의 특공대원들이 전진함에 따라, 지하디스트들은 인근 국가로 도망쳤다. 따라서 보여줄 전투는 없었다. 설사 전투가 있었더라도, 특수부대는 군사 비밀에 의해 보호됐다. 군은 전투장에 “가장 먼저 들어서는” 군인들의 움직임과 행동 방식을 보호한다. 법은 또한 군인들의 신분 노출을 금지하고 있다. 베일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기자들은 나중에 차드 군인들과 함께 아드라에서 멋진 영상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등에 파마(Famas) 저격 소총(4)을 멘 군 카메라 팀이 가장 생산적이다.”
친구들로부터 소위 ‘에어 뷔르카르’라 놀림 받는 국방부 언론홍보담당관은 수많은 기자들과 기술진들의 군용 수송기 탑승 요구를 검토하며 볼멘소 리를 낸다. “기자들은 군용기 탑승을 권리로 여긴다.” 하지만 뷔르카르 대령은 “탑승 업무를 진행하는 동안 일부 말리 시청자들도 시청이 가능한 24시간 국제 TV 뉴스 채널인 ‘프랑스 24’와 같은 마이너 채널에도 기회를 줬다”며 자화자찬한다. 두 달 사이, 그는 212개 언론사 400여 명의 기자들을 군부대에서 접견했다. 프랑스 군은 특히 군 자체 리포터들 덕분에 특파원들이 감히 구하지 못한 영상들을 제공했다고 자랑까지 한다. 뷔르카르는 군이 제작한 120개의 비디오 영상들과 500장의 사진들이 저작권에 구애받지 않고 쓰이고 있는데, “때론 이것들이 출처가 명기되지도 않은 채 쓰이고 있다”며 놀라워한다.
뷔르카르는 “우리가 보여주는 것에 기자들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프가니스탄 전투에서의 체계적인 군부대 합숙시스템이 기자들의 취재활동에 더 유용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군의 언론담당관들 입장에서 보면 합숙시스템은 유리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긴급 군사 보안작전에 기자들이 보다 민감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기자들을 운송하는 절차와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중요한 제약들이 따른다. VAB에 TV 채널 한 팀을 탑승시킬 때마다 3명의 군인을 하차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뷔르카르가 농담을 던진다. “좀 심하게 말하면, 전쟁은 뒷전이고 항공 운송만 하는 격이다!” 반대로 말리와 같은 기동전에는 기자들의 군부대 투입이 어렵다.
TV 채널 <프랑스 3>의 유명 리포터 에르베 게스키에르는 군용기 탑승에 불만을 품은 모든 사람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2009년 말, 당국과 협상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프랑스 전방부대에 체류하며 ‘수호천사’와 동반 취재하는 데 지쳤던 그는 카피사 계곡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직접 취재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2008년 8월 18일과 19일 사이 프랑스 병사 10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1명의 부상자를 낸 카불 남동쪽 50km 지점에 위치한 우즈빈의 참혹한 매복 사태가 있은 지 1년 후 잡지 <증거물>에 프랑스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에 대한 현실을 밝히고자 했다.
이후, 그는 카메라맨 스테판 타포니에와 함께 납치되어 547일 동안(5) 인질로 잡혀 있었다. 당시, 정치와 군(軍)지도층들로부터 “규율이 없는 사람”, “무모한 사람”, “경고에 둔감한 사람”, “금기를 무시하는 사람”, “취재에 눈먼 사람”,(6) “군을 위험에 빠트린 사람”, “국가에 큰 해를 끼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자,(7) 그는 전략적 문제를 제기했다. 자신의 모험이 양측(군과 자신) 모두에게 피해를 줬다고 주장하며, 자신도 희생양이라 했다. “우리가 프랑스의 두 기지, 타갑과 타라 기지 사이에 난 주요 도로에서 탈레반에게 납치됐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두 기지의 임무는 바로 아프가니스탄 동부와 파키스탄을 잇는 ‘버몬트’라 명명한 핵심 축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것은 TV리얼리티 쇼가 아니다
이 <프랑스 3>의 기자는 자신의 납치로 인해 생긴 논란을 차분하게 해명했지만, 반면에 이미 시작된 이에 대한 토론들로 인해 프랑스 전투부대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연합군의 철수보다 2년 앞당겨졌다. 두 사람이 인질로 잡혔을 당시, 프랑스 군의 지휘사령관이었던 장 루이 조르주랭은 훗날 게스키에르를 이렇게 나무랬다. “당신의 부주의가 지역의 업무를 망가트렸다. 당신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어 ‘마음과 정신’을 정복하려던 우리의 임무가 복잡해졌다.”
2009년 9월부터 2010년 4월 사이, 카불 프랑스 군대에서 20여 명의 정훈장교들을 이끌었던 중령 자키 푸크로는 게스키에르와 타포니에 등 대략 200여 명의 기자들을 접했다고 말했다. 이들 모두는 체류 초기에 간단한 브리핑, 즉 금지구역,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는 지역, 직원들과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이어 이들에겐 즉각적인 안전과 군부대와의 관계를 관리 감독할 정훈장교가 배정되었다. 중령은 기자들을 보호하고 민간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중무장 없이는 작전 수행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시장에 미국 기자들이 진입하는 바람에 생긴 그들과의 마찰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위기의 소통이라 불리는 보도 작업은 일련의 제약들이 따른다. 푸크로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한다. “이것은 TV리얼리티 쇼가 아니다. 부대, 작전을 책임진 대령은 움직이는 동안 코 밑에 마이크를 달고 다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 3> 팀에 일탈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영역’임을 경고했다고 했다. 그는 또 우주빈 사태 1년 후, 프랑스 주둔군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치러진 설문조사에서, 방송 지휘부뿐만 아니라 국방부의 고위층도 ‘(기자들) 탑승에 대한 변화’를 보여 놀랐다고 했다.
2009년 12월 29일, 경고를 무시한 기자들이 타갑 지역에서 납치됐다. 그 다음날부터 카피사 계곡 전선은 진압되고, 국제 안보지원군(ISAF) 내의 프랑스 군의 안전 캠페인 계획은 하향 조정돼, 기자들은 그 지역에서 추방되고, 수개월 동안 그 지역 안에서의 모든 취재 활동이 중단됐다. 이후, 비록 군사작전지역에서의 인질 납치 사건이 강박으로 남아 있긴 하지만, 게스키에르와 같은 사건은 재발하지 않았다. 뷔르카르 대령은 지적한다. “우리가 설명하는 정보(동네 이름이나 따라가야 할 길 이름)에 기자들은 관심을 갖고, 이들은 일반적으로 조심성을 보이려 했다. 이들은 본인들이 최고란 것도 알고, 심지어 적들은 소지하지 못한 첨단 장비를 갖추고 있어 자신들이 유일한 정보의 원천이란 것도 알고 있다. 이들은 위성 전화,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와 같은 연락망을 통해 실시간 보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베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굴 속에 있는 적들 또한 인터넷 상에서 전투를 한다. 이들도 정보를 빼낸다.”
하지만 전직 기자인 베일은(8) 기자의 권리와 의무는 정보 수집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2013년 1월 시리아 “최전방에서 사망한, 정보병,” 이브 드볘를 인용하며, 그가 이른바 무모한 사람을 일컫는 테트 브륄레(tête brûlée)나 게릴라 사진병사를 일컫는 에프티피(FTP․franc-tireur photographe)(9)에 적합한 종군기자였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2001년 9월 11일을 기점으로 서구 기자들이 적으로 간주되고 있다”며 아쉬워한다. 이때부터 제 1차 걸프전을 비롯해 발칸전쟁, 이스라엘과 파키스탄 전쟁, 아프리카 뿔 지역(아프리카 동부 국가인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지부티, 케냐 등을 지칭함-역주)의 내전 등에서 그랬던 것처럼 분쟁 지역의 양측을 취재하는 게 어려워졌다.
‘한쪽’만 취재하다 보니, 조작 위험만 커진 게 아니라 기자들에 대한 보호도 강화되고 반복적인 자체 검열이 종종 동반되거나 심지어 특정 정보나 장소에 대한 접근까지 금지됐다. 그렇다고 말리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비록 기자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영상을 얻진 못했지만, 이들은 충분한 자유를 누렸다. 이들은 다른 분쟁지역을 갈 때처럼 정부 돈으로 바마코에 간 것은 아니었다. 정부 예산 감축으로 인해 ‘여행이 포함된’ 보도 작업은 예외적인 것이 된 것이다. 정보 및 국방통신 심의회(Dicod) 소장 피에르 베일은 우스갯소리를 한다. “(기자들의) 주적은 탈레반이 아니라 공공정책 개혁(RGPP)이다.”(10) 더군다나 언론인의 군용기 탑승이 최우선인 적이 없는데다, 이들의 탑승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리포터들은 직접 프랑스 군을 대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군 언론담당관들이 정한 규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한편, 뉴스채널 TF1과 LCI의 해외-국방 보도국 편집장, 파트리시아 알레모니에르는 “언론이 프랑스 군에 취재 합류할 경우 군은 여론에 항상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분쟁 지역 취재 전문 기자인 이 여기자는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겠다’는 명분하에, 프랑스 군이 기자들의 희생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과도한 안전조치(11)를 요구하여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프랑스 군의 뱅상 데스포르트 장군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 아닌가?” 그는 전쟁에서의 심리적 측면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적들에겐 ‘양측의 피해’ 규모를 보여주는 게 좋고, 적의 반군을 지지하는 마을 사람들의 시위를 집중 조명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전투는 또한 보도 전선에서도 일어난다. 프랑스 군이 말리 북부, 가오와 통북투 쪽으로 진군할 때 비록 말리 병사들이 공격에 아무런 역할도 못하지만, (말리의) 여론과 말리 군인들을 관리하기 위해선 “이들을 맨 앞에 배치해 자국 국기를 흔들도록 해야 했다.” 그는 “순간의 영상이 작전의 최종완수를 방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약,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고 모든 것을 보도하면, 국민들은 그것들을 곱씹어 보아야 하는데, 항상 그러는 게 아니다.” 그래서 특정 “영상을 관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12)
관리되는 전쟁 이미지
그러나 이러한 정보 관리는 보도 작업의 기본 목표 중 하나, 즉 군 개입의 정당성을 바탕으로 여론을 설득하고, 병사들이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장에서 어떻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보도지침에 배치된다. 뷔르카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작전에만 강력한 정당성 부여가 필요한 게 아니라, 군인들과 이들 가족의 사기를 위해서도 정당성은 꼭 필요한 요인이다.”(13)
하지만 사망자들을 어디까지 보여줘야 할까? 지난 1월, 프랑스 방송규제위원회(CSA)가 언론들에 말리에서의 시신 영상을 유포하지 말라고 권고하자, ‘국경 없는 리포터협회'는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어린 TV 시청자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분하에, CSA가 군사작전에 대한 공식 보도를 차단하는 것 아닌가? 석양빛에 물든 전차들만 보여주는 전쟁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대중은 군의 검열을 받은 뉴스나 군이 직접 보도하는 뉴스에 만족할 수 없다.” 방송 해석 매거진 <정지 화면(Arrêt sur images)>은 우즈빈 매복 사건이 터지고 며칠 뒤, 2008년 8월 29일, ‘전쟁에서의 깨끗한 영상과 더러운 영상’을 자신의 웹사이트에 게재했다. <프랑스 3>의 기자 피에르 바볘는 당시 현장에서의 엄격한 보도 지침을 상기시킨다. 시신에 대한 사진이나 영상 촬영 금지, 우즈빈(Uzbin) 매복이 담긴 전망사진 촬영 금지, 운구를 수송하는 항공기 촬영이 금지됐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비롯한 알제리 전쟁과 걸프전 때 적진엔 리포터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서구 측의 영상들이 주를 이루었다.
독일 사진작가 호르스트 파아스는 1962년부터 1974년까지 베트남 전쟁을 취재했다. 그는 당시 사이공 AP 통신 사진부 기자로 활동하며 죽어가는 병사들이나 폭탄 투하에 질린 베트남 사람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는 당시만 해도 가족에 사전 고지만하면 사망자 사진도 게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이후 변화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쟁은 관료체제로 변했다. 모든 것을 허락받아야 한다. 현장 접근이 제한적이다 보니, 사진기자들은 기껏해야 전투 전후 상황만 보여준다. 미국 정부 또한 이상한 검열 기준을 만들어 허락 없이는 부상자 촬영도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저들(미국인들)의 얼굴에 폭탄을 날리기 전에도 허락을 받을까?”(14) 미군뿐만 아니라 이들이 동료인 유럽의 독일군들도 심리전, 즉 싸이-옵스(Psy-Ops)의 대가들이 되었다. 이들은 심리적 영향력을 미치는 이 기술을 특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나토(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에 도입시켰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 국방부는 극비리에 선전기관인 전략적 영향 사무국(OSI)을 창설해, “대대적인 언론보도와 영향력이 있는 싱크탱크 그리고 압력단체들을 통해 세계적인 수준의 여론 형성을 주도”했다.(15) 2002년, OSI는 특별 계획 사무국(OSP)으로 교체된 뒤, 2003년 또 다시 걸프 북부지역 사건 사무국(NGAO)으로 이름이 변경됐다. 이 사무국의 주된 업무는 미국의 이라크 개입을 준비하기 위해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한 진짜와 거짓 정보를 흘리며 중동 상황에 대한 기사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 사무국은 기자들의 “신뢰 수준”에 따라 리스트를 만들어 분류하는 심리전 전문 사설 기관인 랜던 그룹(Rendon Group)에 의존했다.
오랜 세월동안 우파적 행보를 보였던 프랑스 군도 정보전(16)을 이용할 줄 알았다. 1950년대 식민지 전쟁 때 공산주의 퇴치를 빌미로 정보전을 이용했다. 인도차이나 전쟁 때는 열약한 군사력을 보완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이용하는 인도차이나 민족주의자들에 대응하는 심리전담반이 가동됐다. 이 사무국은 “적의 사기와 전투 의지를 꺾기 위해” 전투 이외의 모든 형태의 행동, 이를 테면 선전, 비방, 조롱 등을 꾸며 시행했다. 알제리 전쟁 때는 게릴라를 상대하는 교육과 교화 센터가 창설되어 적의 사기를 꺾고, 설득하고 조롱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이러한 심리전 기술이 고도화되고 일반화되었다. 정보운용부대(GRE)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과 그의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오보 조작을 주도했다. 사람들은 최근의 미디어 조작 시도도 기억한다. 1989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몰락 이전, 루마니아에서는 티미쇼아라에 있는 그의 가짜 납골당이 소개되기도 했고, 1990~91년 이라크 전쟁 때는 동맹국들의 참모장들과 통신전문가들이 영상과 단어들을 철저히 검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3년엔 맞춤형 “적을 만들어”(17) 또 다시 이라크를 침공했다. 군 통신부문의 상상력은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글·필립 레이마리 Philippe Leymarie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승리를 노래하는 말리>와 <양측의 희생> 참조, 2013년 2월 1일, 2011년 9월 1일, blog.mondediplo.net.
(2) 1993년 소말리아 개입에 영감을 받아 리들리 스콧(2001)이 제작한 미국 영화.
(3) 장-마크 탕기, 2013년 7월 2일, http://lemamouth.blogspot.fr
(4) 프랑스 군에서 지급하는 소총 종류.
(5) Hervé Ghesquière, <547일>, Albin Michel, 파리, 2012년.
(6) Claude Guéant, 국방부장관, 2010년 1월 17일.
(7) 2010년 2월 21일, 군 사령관 장-루이 조르주랭 장군은 이 인질사태로 지난 2달 동안 입은 피해 규모가 이미 1000만 유로에 달한다고 평가했다.
(8) 피에르 베일, 전 신문기자이자 유럽 항공 방위 우주 산업(EADS)의 언론홍보담당관.
(9) 군 언론홍보담당관들이 기획한 전투에 참가해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작업하는 사진작가들을 지칭하는 말로써 <Fuck the Pool>이라고도 함.
(10) 2007년 국가 채무를 줄일 목적으로 도입한 공공정책 개혁(RGPP).
(11) 2013년 2월 17일,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이 파리에서 주관한 <전쟁 리포터 직업에 관한 토론>, pierrebayle.typepad.com참조, 2013년 2월 18일.
(12) 국방 기자협회 회원 모임, 2013년 2월 12일.
(13) <보도 운용 지침>, Armées d’aujourd’hui, n° 379, 파리, 2013년 4월,
(14) Gilles Klein, <Le Monde>, 2008년 9월 6일.
(15) Cf. Michel Klen, <오보 피해>, Favre, Lausanne, 2013년.
(16) Paul et Marie-Catherine Villatous, <전복 위험에 직면한 공화국과 공화국 군대: 1945~1960 사이의 심리전>, Les Indes savantes, 파리, 2005년.
(17) Cf. Pierre Conesa, <적 만들기>, Robert Laffont, 파리,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