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역사를 훔친다 역사는 영화를 이용한다

2013-10-14     오동진

안 그런 척, 영화는 늘 역사를 도용한다. 거의 모든 소재를 역사 속에서 찾아낸다. 예를 들어 지난 추석 연휴 시즌을 통과하면서 9백만 가까운 관객을 모은 영화 <관상>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영화는 1453년 계유정란의 얘기를 그린다. <관상>은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기까지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의  얘기다. 김종서가 처단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도륙됐던 시대를 한 관상쟁이인 김내경(송강호)의 시점에서 풀어간다. 사람들은 왜 영화 <관상>에 주목했을까. 과연 누가 권력을 잡을 상(相)일까가 궁금하기 때문이었을까. 박근혜가 과연 그런 상이었을까. 그렇다면 앞으로는 안철수가 잡을까? 아니면 문재인일까? 그도 아니면 손학규인가? 등등. 그렇지만 사람들이 관심이 있었던 것은 단순히 권력의 향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관객들은 잘 안다. 자신이 어느 한 쪽을 지지한다 한들, 그리고 그 지지의 대상이 처음엔 ‘정치적 올바름’을 지니고 있었다 한들, 결과적으로는 모두 이전투구의 권력욕만을 앞세우게 된다는 것을. 결국 남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승리한 권력뿐이라는 것을.

구복의 염원에서 계급혁명론까지

관객들은 수양대군의 시대처럼 지금도 정치사회적으로 대혼란의 시기인 만큼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리고 그 어떤 무엇이, 자신들을 구해줄 것인가를 궁금해 한다. 혼란은 늘 구복(求福)을 부른다. 자신의 입과 배를 채워주고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복을 달라고, 잘 살게 해달라고 애걸한다. 그 염원이 올곧이 <관상>에  발걸음을 몰리게 한 것이다. <스파이> 같은 액션 오락물이 역사와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아마도 2,30년 후에 어떤 정치평론가는 2010년대 초반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파이>가 제격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첩보액션영화인양 굴고 있지만 사실은 이 시대 소시민들의 얘기다. 날이면 날마다 나라가 어떻고 국가관이 어쩌고 하는 사람들인데다 실제로 사건 현장에서는 날고 기는 폼생폼사의 액션맨들이지만 사실상 알고 보면 5만원짜리 간이 영수증을 ‘위에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를 가지고 시시덕거리는 쫌생이들이다. 몇 시간 전까지 태국 첩보 현장에서 총탄이 쏟아지는 곳에 있었건만 지금은 어머니 회갑연에 늦어서 마누라에게 혼날 것을 생각하며 쩔쩔매는 샐러리맨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국가를 위한다고? 영화는 그건 웃긴 얘기라고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대 첩보원들은 댓글을 쓰라면 그게 무슨 얘기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골방에 앉아 그냥 기계적으로 수백 건, 수천 건의 댓글을 다는 일을 한다. 국정원이 그 꼴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 영화가 바로 <스파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처럼 아예 대놓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얘기하고 있는 작품도 있다. 그 누가 이 영화를 보면서 칼 마르크스의 계급혁명론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폰 엥겔스와의 공저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설국열차>는 새로운 빙하기의 시대에 긴 열차 속에서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혈투를 그린 얘기다. 꼬리 칸에 탄 사람들은 맨 앞 황금 칸 사람들에 비해 인간 이하의 삶을 이어 간다. 그들이 먹는 것이라고는 프로틴 블록이라는 것 하나 뿐인데 이건 바퀴벌레가 원재료인 것이다. 어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화 속 주인공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자신의 멘토(존 허트), 그리고 동생 에드가(제이미 벨) 등과 함께 꼬리 칸의 문을 부수고 황금 칸으로 진격해 나간다. 진실로, 그들이 잃은 것은 쇠사슬뿐이다. 그런데 그들이 얻은 것이 전 세계인지는 불분명하다. 영화 <설국열차>는 마르크스의 계급혁명론이 지금 이 시대에 얼마만큼의 유의미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찰하려 한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설국열차>는 마르크스의 이론의 문제는 이론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해석을 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에 있음을 직시하게 한다. 이 영화가 9백만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는 점은 역설의 기적이다. 아무도 이렇게 ‘딱딱하게 굳은’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는 게 지금 시대 영화판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관객들의 생각은 달랐다. <설국열차>는 열광적인 환호 대신 냉철한 지지를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2010년대의 관객들 상당수는 자신들 역시 꼬리 칸에 탑승해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황금 칸으로 나아갈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꼬리 칸의 문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더 이상 프로틴 블록 따위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설국열차>는 2010년대를 직필(直筆)로 써내려간 영화이며 그래서 오히려 기이한 존재감을 드러낸 작품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 영화로 2010년대의 사회상을 기억하고 짐작해 낼 것이다.
 
영화는 때론 역사를 배신한다.

영화작가들은 역사를 통해서 시대의 해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물들이다. 일부의 어떤 감독은 역사를 오독해 자신의 신분이 상승하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그가 그걸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이후 더 나아간 역사가 판별해낼 것이다. 지금은 그저 논란에 그칠 뿐이다. 예컨대 중국 장이모우 감독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는 2002년 작품 <영웅>으로 중국의 대표적 반체제 지식인 계열에서 당 서열 20 몇 위까지 오르는 대변화를 이루어냈다. <영웅> 한편으로 그는 광저우의 대표적인 축제인 수상 가무쇼의 총감독 직을 오랜 동안 맡기도 했고 대형 오페라 <투란토트> 연출자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의 총연출을 맡기도 했다. <영웅> 전까지 그는 주로 작은 영화를 만들었다. <국두> <홍등> <책상 서랍 속의 동화> 등등이 그것이다. 장이모우는 그 작품들을 통해 급격하게 자본주의화로 치닫는 중국사회에서 한없이 사회 소수자로 전락하는 중국 농민들의 피폐한 삶의 현장을 그려 나갔다. 중국의 지배체제는 그런 그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랬던 장이모우가 어느 날 <영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중국 공산당 편이 됐다.

영화는 기원전 221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에 대한 얘기를 그린다. 진시황은 자신의 나라 진(秦)을 통해 연,조,한,위,제,초 등 6국을 병합해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폭정이 이루어졌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 혹은 그 나라의 충신이었던 이들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것은 어찌 보면 자명한 일이었다. 영화에는 네 명의 자객이 나온다. 무명(이연걸)과 파검(양조위), 비설(장만옥), 은모(견자단)가 그들이다. 파검과 비설, 은모는 ‘십보필살기법’, 곧 십보 안에 있는 존재는 모두 없애버릴 수 있는 비법의 소유자 무명에게 모든 일을 맡기려 한다. 이들 셋은 서로의 무예를 다투다 무명에게 모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얘기를 꾸미는 데 합의한다. 세 명 모두 진시황이 두려워하는 고수의 암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무명은 드디어 진시황을 알현할 기회를 얻는다. 진시황은 무명이 한 명 한 명을 처치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를 자신의 앞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이윽고 십보 앞까지 다다른 무명은 그러나, 진시황을 끝내 죽이지 못한다. 무명이 진시황 처단의 여정을 떠나기 직전, 파검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지금 우리의 농민은 전쟁터에 끌려가지는 않고 있지 않소.’ 진시황이 아무리 폭군이고 또 지금이 무한한 독재의 시기라 해도 계속되는 전쟁에서 농민들이 죽어 나가고 있지는 않느냐는 얘기였다. 무명은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유령처럼 맴도는 매카시즘 광풍

장이모우의 <영웅>이 나왔을 때 프랑스의 한 유력 일간지는 문화면 기사를 통해 ‘장이모우의 정치적 변절’에 대해 언급했다. 이 예리한 기사는 장이모우의 변신을 예견했다. 장이모우는 영화 속 인물 파검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중국에서 집회결사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창작표현의 자유가 억압돼 있다 하더라도, (천안문 사태를 생각할 때) 그리고 중국 공산당 외에 다른 민간 정당이 제대로 존재할 수 없다 하더라도 중국의 경제개발은 현재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어쨌든 중국 인민은 지금, 예전보다 먹고 사는 게 훨씬 좋아진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부질없이 정치적 투쟁일랑 하지 말자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진시황을 죽이지 말자는 것이다. 그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장이모우는 변절자일까. 그는 매도받아 마땅한 인물일까. 그것 역시 훗날의 역사가 판단할 문제다.

영화는 역사를 통해 지금의 시대를 재해석하려고 노력한다. 2005년 할리우드 유명 스타 조지 클루니가 직접 감독한 <굿 나잇 앤 굿 럭>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1950년대 미국을 ‘미친 국가’로 만들었던 조세프 매카시 상원 의원에 맞서 시대의 정의를 위해 싸웠던 ABC 기자 에드워드 머로(데이빗 스트라탄)의 얘기를 그린 작품이다. 미국의 매카시즘은 머로 때문에 극복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가 방송 말미에 했던 마지막 멘트가 바로 ‘굿 나잇, 굿 럭’이었다. 이 혼란과 공포의 시대에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 그리고 (내일은 부디)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는 그의 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희망을 주었겠는가. 영화는 그가 조세프 매카시를 향해 일갈하듯 방송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만든다. 2005년은 부시 체제의 부조리함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다. 영화를 만든 조지 클루니는 2005년이나 50년 전인 영화 속 시대나 매카시즘의 광풍이 부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봤다. 그 역사의 혜안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일부 아트하우스에서 상영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용히 종영된 <세상의 끝까지 21일> 같은 디스토피아적 로맨틱 코미디에서 에드워드 머로의 숨결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것은 일상의 기적 같은 일이다. <세상의 끝까지 21일>은 지구가 멸망하기 3주 전의 상황을 두 남녀(스티브 카렐, 키라 나이틀리)의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사랑 이야기로 그려낸다. 주인공 남자는 매일 혼자서 버릇처럼 TV 뉴스를 켠다. 다 떠나 버린 방송국에서 한 앵커가 평소처럼 뉴스를 전한다. 그가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지금 저는 오늘 마지막 방송을 하려고 합니다. 지난 27년 동안 저를 아껴주신 시청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가족들과 식사를 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모든 일이 잘되기를 기원합니다.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기를.(Good night and good luck. God bless you.)’ 과거 에드워드 머로의 방송 고별사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로린 스카파리아 감독은 지금 시대가 지구가 멸망하기 3주 전과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매카시즘이 난무했던 그 엄혹했던 시대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얘기하려던 것이 아닐까. 역사는 반복된다. 영화감독은 그 반복의 역사를 담아내려 노력한다. 영화는 역사를 버리지 못한다. 역사도 영화를 버리지 못한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글·오동진
연합뉴스와 YTN 기자, FILM2.0 편집위원을 지냈고,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동의대학교 영화과 산학협력 부교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