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아 전쟁 이후 달라지는 코카서스 지역의 지정학

2009-04-04     비켄 쉬테리앙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그루지야의 공격, 서구의 부채질? 러시아의 함정?
러시아의 새로운 전략, ‘평화의 전사’ 이미지 확산


옛 소련의 지도자인 조셉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야의 고리시 한복판에는 그의 거대한 동상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 몇백m 떨어진 옛 초등학교 교실에는 두 자녀를 대동한 46살의 나나 베루아쉬빌리 부인과 다른 네 가족이 피신해 있다. 그이는 고향인 남오세티야 에레드비에서 10여km 떨어져 있다. 그곳은 수도 츠힌발리 근처다. 전투 시작 이틀 후, 베루아쉬빌리 부인은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이제 그는 고향에 되돌아갈 수 없다. 그이의 집은 파괴됐다. “오세트인들이 나를 보고 만약 고향에 되돌아가고 싶으면 러시아 여권을 챙기라고 하는데, 이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루지야인들이다!”고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렇지만 베루아쉬빌리 부인은 오세트인들에 대한 아무런 증오감도 없다. 그는 이웃 마을 주민들과 각별하다. 그이가 츠힌발리 시장에 마지막으로 간 것은 전쟁이 터지기 이틀 전인 2008년 8월5일이었다. 그는 그날 샐러드와 토마토를 시장에 내다 팔고 몇 가지 장을 본 뒤, 버스를 타고 에레드비로 돌아왔다. 비록 그루지야 경찰들이 그이의 동네를 감시하고 있고, 오세트인들의 주거 밀집 지역이 그이의 집을 둘러싸고 있지만, 운명의 날이 닥치기 전까지 마을은 아주 평온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고통과 입은 손실에도, 오세트인들이 오로지 평화와 안전을 소망하는 좋은 사람들이라고 평한다.

그루지야 사람들이 오세트인들이나 러시아인들에게 심한 증오심을 느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소수민족 밀집 지역은 러시아어가 주로 쓰인다. 소비에트공화국 시절 말기 몇 년 동안 소수민족의 동원 및 공동체 간의 긴장감이 몇몇 충돌과 남오세티야 전쟁을 포함한 전쟁들을 부른 적은 있지만, 오늘날 그루지야에 그런 문제는 더는 없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라는 질문이 중대한 정치적 문제로 남았다.
그루지야의 러시아 공격에 미국은 냉담

2008년 8월7일 터진 5일간의 전쟁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왜 그루지야인들은 러시아 군대가 유엔의 허락 아래 츠힌발리에 주둔하고 있는데, 그곳에 자국의 군대를 보냈을까? 왜 서방 국가들, 특히 미국은 그들의 동맹국이 파괴될 수도 있었는데 온 힘을 다해 저지하지 않고, 다시 한번 그들의 국제적인 지위가 흔들리는 것까지도 무릅썼을까? 과거 그루지야와 러시아군이 남오세티야와 아브하즈 자치공화국 내 그리고 그 주변에 밀집 배치됐을 때, 지금 같은 폭력의 징후가 감지됐다. 그러자 미국은 2004년과 2006년 그루지야의 남오세티야 침공을 반대했고, 2007년 새해는 츠힌발리에서 보내겠다고 약속한 매파인 국방장관 이라클리 오크루아슈빌리를 낙마시켰다. 그런데 왜 이번에 그루지야의 침공에 미국은 반대하지 않았을까?

그루지야 대통령 미하일 사카슈빌리의 측근이자 당시 안보장관이던 알렉산더 로마이아1)는 그루지야의 전략과 전략 실패에 대해서 묻자, 서방 언론들이 그루지야의 공격을 유발했다고 보는데 그건 실수라고 지적했다. “러시아 지도자들의 주장처럼, 러시아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은 아니다. 전쟁은 남오세티야는 물론이고 심지어 그루지야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지역을 장악해서 일방적으로 유럽의 지도를 새로 만들고 싶은 러시아의 속셈 때문이다.” 그는 좋지 않은 두 나라 관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그루지야 지도자들이 모스크바와 협상할 준비가 돼 있었고, “우리는 러시아 파트너들에게 주권과 국민 통합 문제만 빼고, 모든 현안에 대해 협상할 준비가 돼 있다고 분명히 전달했다”고 밝혔다. 로마이아는 8월7일 밤, 많은 러시아 군대의 움직임(150대가 넘는 군용 트럭들이 코카서스 지방의 러시아 산들을 넘어 로키터널을 통해 남오세티야로 진군했다)을 감지하고, 그루지야는 영토를 지키려 반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그루지야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주장했다.2)

그러나 언론들이 작성한 사건 일지는 그루지야의 자기 방어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러시아 군대가 ‘완충지대’에서 철수하고 채 며칠 지나지 않은 2008년 10월, 우리는 서츠힌발리에서 겨우 2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에르그네티 마을을 방문했다. 그 지역 대부분이 파괴되어 있었으며, 주거지 대부분은 노략질당한 뒤 방화로 불에 타 있었다. 하지만 성한 집에 박힌 총알과 폭격 흔적으로 미뤄볼 때, 그 지역 전투가 심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루지야 군대가 예상할 수 있는 러시아의 침공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고 싶었다면, 그러한 노략질과 방화 사건에 개입했어야 한다. 
 
서방 언론의 무기력한 그루지야 지지

전쟁이 발발하자 서방 언론들은 그루지야가 츠힌발리 공격에 나섰다며 그루지야를 대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3일도 채 안 돼, 그루지야 군대는 와해됐고, 러시아 군대가 그루지야의 심장을 향해 진군해, 고리시를 비롯한 서부 도시 주그디디·포티·세나키를 장악하며 나라를 두 동강 냈다. 우리 모두는 러시아 군대가 트빌리시로 진입해서 그루지야 지도자들을 체포할까 염려했다. 만약 모스크바가 그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어떤 군사적인 장애물도 그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그루지야 영토에서 남오세티야와 아브하즈 자치공화국 옛 소비에트 행정관할 구역 뒤로 철수하자마자 상황은 변한다. 그래서 ‘그루지야가 왜 공격을 했을까?’라고 묻는 것이다.3) 그루지야 지도자들은 여전히 충분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고, 언론들도 그루지야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뉴욕타임스>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두 군사전문가의 진술을 토대로 “실전 경험이 없는 그루지야 군대가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고립도시 츠힌발리를 8월7일 공격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대포와 로켓을 사용하며 시민을 비롯해 평화유지군과 비무장 러시아 군사전문가들을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에” 충돌이 생긴 것이라며4) 책임을 그루지야 쪽에 돌렸다. 그루지야 책임자들은 그들의 군사작전이 츠힌발리 주변 여러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그루지야 소수민족들을 대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답변만 반복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의 보도처럼, 이에 대해 트빌리시 주재 외교관들을 상대로 사실확인에 들어갔던 유럽안보협력기구의 군사전문가들은 그런 징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충돌을 유발한 책임의 소재를 두고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야당 지도자들의 압박 아래, 그루지야 의회는 이 문제를 명확히 밝히려고 일련의 청문회를 열었다.
 
그루지야 사태 해결에 무능한 국제사회

한편 유럽연합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5) 그 책임자로 스위스 여성 외교관인 헤이디 타글리아비니를 임명하고 그녀의 능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든, 그 결론이 정치적으로 꽤 적절한다는 평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위원회는 2009년 11월 보고서를 내놓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미국, 유럽연합은 이미 태도를 정리했다. 그리고 그루지야 사태를 책임지고 있는 국제기구들은 무능함만 입증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날선 경고에도, 국제사회는 2008년의 폭력 사태가 촉발되는 걸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그루지야 정부를 강력히 지지했다는 증거가 있다. 2008년 10월22일, 브뤼셀에서 두 나라는 그루지야에 34억4천만 유로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6) 국제사회의 지원금은 인도적 지원과 재건뿐만 아니라 재정을 안정화하고, 충돌이 유발할 수 있는 경제위기를 방지하는 데 쓰일 것이다. 이 지원금이 경제 침체와 트빌리시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야당의 시위를 막아줄 것이기 때문에 그루지야 정부한테는 이 돈이 필수적이다.

“남오세티야에서 일어난 일은 오래전부터 러시아가 계획했던 선동이다”라고 옛 그루지야 의회 의장 대변인인 니노 부르자나제는 주장한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서둘러서 우리를 그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그는 아브하즈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야의 충돌을 해결하려면 “힘을 사용하지 않는”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정부가 신뢰를 쌓을 능력이 없다”고 그이는 한탄한다.

 8월18일부터 그는 전쟁이 일어난 이유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7) 그루지야 정치계에서 오랫동안 2인자로 불렸던 부르자나제는 지난 4월 이미 대통령 사카슈빌리와 거리를 두었다. 이후 둘 사이는 멀어만 갔다. 그리고 11월 그는 새로운 야당을 만들었다. 12월 말, 새 야당에 합류한 옛 뉴욕 주재 그루지야 대사 오라클리 알라사니아는 총선을 치르자고 호소했다.
이런 새로운 탈당 사태가 그루지야 야당을 견고히 해줄까? 사카슈빌리 행정부의 운명이 다한 것일까? 확신할 수는 없다. 다른 야당들은 부르자나제 쪽에 합세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그는 그루지야 당국이 2007년 11월 야당 시위를 탄압했을 때도, 그리고 내무부 소속 경찰들이 <이메디TV>의 사무실을 까부수었을 때도 집권 여당의 실세였기 때문이다.
 
그루지야 대통령의 집권욕과 야심

2007년 가을, 그루지야 야당연합은 사회와 경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수천만의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동원했다. 그러나 야당은 전략 부재와 무능함을 보여주었다. 야당의 새로운 총선 요구에 맞서,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우선 대선을 준비했고, 2008년 1월 1차 대선 투표에서 53.47%를 획득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야당이 많은 선거 부정을 지적하며 거세게 반발하면서 2차 투표를 요구했지만 게임은 끝나버렸다. 5월에 치른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국민연합운동이 승리했다. 서방국가들이 사카슈빌리 지지를 철회하고 주요 경제위기가 새로운 시위를 촉발하지 않는 한, 그루지야의 야당은 현 정부를 전복하거나 현 정부의 생명을 약화하는 것조차 힘들 공산이 크다.

어쨌든 국민들은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2007년 3월, 트빌리시 인권기관인 ‘인간의 권리 센터’(HRIDC)는 그루지야가 1992년 벌인 전쟁에 대해 아브하즈 국민에게 사과하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다.8) 처음 있는 일이다. 이 비정부기구는 15년이 훌쩍 지난 이 사태에서 그루지야가 무슨 구실을 했는지 따지고 싶어한다. 그것도 새로운 전쟁이 촉발될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이 시기에 말이다.
이 캠페인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루지야 쪽에서 전쟁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아브하즈 국민들의 실존적 공포를 인정함으로써, 두 민족의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루지야 정치 엘리트들은 아브하즈와 오세트 국민들의 실제적이고 합당한 두려움을 줄곧 무시해왔다. 취약한 상태에 놓인 아브하즈 국민들은 장기화하는 그루지야와의 충돌 속에서 멸종되지 여전히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아브하즈 자치공화국에 거주하는 아브하즈인은 9만4천 명으로 추정된다.9)
남오세티야에서는 공포감이 이보다 즉각적으로 감지된다. 아브하즈 국민들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이전의 전쟁(1989∼92)에서 ‘인종청소’를 경험하지 않았다. 남오세티야와 그루지야는 휴전협정 이후 관계 정상화를 재촉했다. 진지한 평화 전략이 없음에도, 또 공화국끼리 서로 분리돼 공식적으로 봉쇄된 상태임에도 사카슈빌리가 2004년 집권한 뒤 오세트인들과 그루지야인들은 공동 정부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루지야는 러시아 공격 이후 남오세티야를 자신의 품 안에 되품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압박을 다시 시작해 오세트인들의 입지를 약화했다. 3만 명이 거주하는 츠힌발리시는 즉시 사방이 그루지야 마을로 포위됐고, 그루지야인들이 치안도 담당하고 있다. 츠힌발리에서 자동차로 채 30분도 안 되는 고리시에 중요한 군사기지가 건설되고 있어, 오세트 수도의 주민들은 지속적인 위협을 느끼고 있다.10)
 근본적인 차이가 아브하즈와 남오세티야를 갈라놓고 있다. 남오세티야는 아브하즈와 달리, 주요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가난한 산악 지역이긴 해도, 긴 흑해의 해안선을 끼고 있어 농업과 관광 분야에서 막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남오세티야는 여러 번 러시아연방과 통합하기를 희망했다. 크렘린은 남오세티야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을 임명했다. 옛 북오세티야(러시아연방 공화국) 국세청장 아슬란베크 부라트세프가 최근 남오세티야 총리로 임명됐다.11) 이와 반대로, 아브하즈는 줄곧 독립을 지키기 위해 힘써왔으며, 한 번도 러시아연방과 통합하기를 소망해본 적이 없다.

러시아가 아브하즈와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인정한 것이 단기적인 측면에서는 츠힌발리를 안전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의 근본 문제는 지속되면서 커져만 가고 있다. 2008년 8월 전쟁은 남오세티야 내의 그루지야 소수민족 문제를 종식시켰다. 그들의 마을은 약탈당하고 파괴됐다. 남오세티야는 코카서스 남부 산악지대까지 장악했고, 그들의 통신망이 그루지야 중앙 계곡을 통과하고 있다. 그 지역을 그루지야의 나머지 지역과 단절시켜 러시아에 귀속시키려는 계획은 정치적 의도가 지리적 형세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사태는 지속적으로 긴장만 고조시킬 수 있다.

또 러시아 군대는 남오세티야와 아브하즈에 군사 기지를 구축할 계획이다. 그루지야는 최근 경험을 바탕으로, 대전차포와 대공포를 갖춘 군대를 재건할 계획이다. 전쟁이 위협을 가중하고 있다. 이전에 트빌리시는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운동에 맞서 싸웠고, 2008년에는 러시아 군대와도 싸웠다. 또 바투미와 아카라라키에서 러시아 기지를 철수시킨 지 채 1년도 안 됐는데, 이번 전쟁 와중에 그루지야 심장부에 러시아 군사기지가 다시 생겼다. 지난 3년 동안 트빌리시에 살면서 그루지야의 군사계획을 지휘했던 퇴역한 미국인 장군 로널드 맨검은 “8월 충돌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그루지야가 로키터널과 카즈베키 도로를 차단하면 자국의 동쪽 절반을 지킬 수 있었지만, 이제 남오세티야의 중심부에 러시아 군사기지가 들어서면서 ‘남오세티야’라는 큰 장벽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아브하즈 외교통상부 차관 막심 군지아는 갈등이 소강 상태에 빠진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그루지야 군대가 “상황을 악화하려고 지속적으로 아브하즈 침공을”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그루지야 당국이, 최근에 그루지야 내무장관이 지지하는, 아브하즈 남부의 갈리 지역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그룹 ‘숲 속의 형제들’의 옛 지도자 다토 센젤리아를 석방했다고 주장한다. 2004년 사카슈빌리가 선출된 이후 이러한 게릴라 세력은 와해됐지만, 2008년 초부터 활동을 재개한 것으로 보인다.12) 다토 센젤리아의 석방은 게릴라 세력을 소생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듯하다. 분명한 것은 지난여름의 전쟁이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새로운 냉전’을 야기하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루지야가, 강대국들이 힘의 한계를 실험하는 실험실이 돼버린 것은 자명하다.
번역•조은섭

1) 충돌 후 로마이아는 러시아군과의 협상에서 핵심 구실을 맡았다. <르몽드>, 2008년 10월3일. 2008년 12월 이후, 그는 뉴욕 주재 유엔 그루지야 대표를 맡고 있다.
2) 그루지야는 자국의 입장을 분명히 하려고 러시아군과 남오세티야군 사이의 통화 내역을 공개했다.
3) 2008년 10월28일 <BBC뉴스>에서 팀 위웰은 이같은 질문을 던졌다.
4) C. J. 시버스와 엘렌 배리, ‘Georgia Claims on Russia War Called into Question’, <뉴욕타임스>, 2008년 11월7일.
5) 필리파 러너, ‘EU Drafts Broad Mandate for Georgia War Probe’ <EUobserver>, 브뤼셀, 2008년 11월19일.
6) ‘그루지야 기증자 회의’, <EU. europa.eu>, 브뤼셀, 2008년 10월22일.
7) 매트 로빈슨과 마가리타 안티제, ‘까다로운 질문을 하기로 약속한 그루지야 야당’, <로이터>, 트빌리시, 2008년 8월18일
8) www.apsni.org 참조.
9) 2003년 발행한 아브하즈의 공식 자료를 따르면, 아브하즈 자치공화국 국민의 수는 21만5천 명이다. 또 다른 자료는 아브하즈 자치공화국에 거주하는 아브하즈인의 수를 7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0)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7월호.
11) 제임스 클리너, ‘South Ossetia appoints former Russian official as PM’, <로이터>, 2008년 10월22일.
12) ‘국제적인 위기 그룹’, ‘아브하즈를 놓고 충돌하는 그루지야와 러시아’, <유럽 리포트 제193호>, 2008년 6월5일.


그루지야 전쟁이 미친 영향

때 아닌 친선 외교 붐

역설적이게도 그루지야 전쟁은 코카서스 지역 나라들에 놀라운 긴장 완화를 가져다줬다. 전쟁이 아르메니아 및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접촉을 촉진했다. 압둘라 귈 터키 대통령은 2008년 9월 예레반에서 치른 터키와 아르메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간 경기에 참석했다. 두 나라의 복잡한 관계를 볼 때 이례적인 사건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17년 동안 터키는 줄곧 아르메니아와 외교 관계 수립을 거절해왔다. 터키와 아르메니아 사이의 국경만은 폐쇄돼 있었다. 터키 정부는 카라바흐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르메니아 군대 철수를 수교 조건으로 내세웠다. 터키가 여전히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아르메니아 학살의 그림자가 양국 관계의 정상화를 가로막고 있다. 터키 대통령의 예레반 방문과 두 나라의 비밀 협상이 봉쇄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사건도 아주 특별했다. 2008년 11월 2일 모스크바 인근 마인드로프 성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 입회 아래 세르즈 사르키샨 아르메니아 대통령과 아제리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회동했다. 세 정상은 카라바흐 갈등에 대해 ‘정치적 해결’을 추구하는 공동 선언문을 체결했다. 이 선언문이 1994년 휴전협정을 체결한 이후, 20여 년이나 묵은 분쟁에 구체적인 해결책을 가져다준 것은 없지만, 두 나라가 인정한 첫 문서다. 이 시도는 이전에 아제르바이잔이 쓰던, 군사적인 수사적 기교와는 딴판이다.

 2008년 코카서스 지역 나라들은 그루지야가 통과무역 지대로서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바쿠와 세이한 사이의 송유관이 며칠 동안 폐쇄되자 아제르바이잔은 1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봤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의 해외 거래의 80% 이상이 그루지야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앙카라, 바쿠, 예레반 사이에 관계가 개선되고 외교적 교류가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러시아가 압박하고 있다는 방증이며, 그루지야를 고립시켜 이 지역에서 허브 구실을 못하게 하겠다는 모스크바의 응징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8월에는 실패했지만, 그 이후 러시아의 외교적 성공은 이 지역에서 위신이 몰락하고 있는 미국과는 대조적이다. 미국의 딕 체니 부통령이 전쟁 이후 첫 순방 장소로 바쿠를 방문했을 때, 그곳의 반응은 꽤 냉랭했다.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은 여태껏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미국의 고위 지도자가 아제르바이잔을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음에도 외교통상 장관에게 그를 영접하게 했다. 게다가 그는 가스와 석유 수송, 나부코 프로젝트에 대해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그루지야에서 군사 행동을 취하고, 아브하즈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야의 자율성을 인정한 것에 대해 서방 뿐 아니라 코카서스 전역이 놀라고 있다. 또 러시아는 평화의 전사 이미지를 갖추려 공을 들이고 있다. 한편 터키는 워싱턴의 정치 변화를 우려하고 있다. 새 대통령이 자신의 공약을 실천하고 1915년의 아르메니아 비극을 학살로 인정하며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