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처럼 떠도는 고국 없는 코소보의 집시들

2013-11-08     장 아르노 데랑

하교길에 체포되어 코소보로 강제 추방된 로마족(집시) 여중생 레오나르다 디브라니의 입국을 허용하되 ‘가족을 제외한다’고 말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10월 19일 발언은 프랑스 국내에서 극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프랑스 내부의 논란을 넘어서서, 이번 사건은 로마족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됐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지난 10월 9일, 로마족(집시)의 한 소녀가 프랑스에서 추방됐다. 말도 안 되는 이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 레오나르다 디브라니는 언론의 뜨거운 관심 속에 코소보로 송환됐다. 프랑스 당국에 따르면 코소보는 ‘안전한’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국내 불법 체류 외국인의 본국 송환이 허용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코소보 내에서 완전히 소외된 로마족 공동체는 학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코소보 북부의 미트로비차에 도착한 15세 소녀 레오나르다는 자신이 알바니아어도 모르고 “코소보에 대해서는 말하는 걸 들은 적도 없다.”고 설명했다. 소녀의 이 같은 발언을 두고 그동안 소녀의 가족이 걸어왔을 복잡한 여정에 대해 갖가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재로서 레오나르다 가족은 사실상 국적이 없는 상태다. 부친은 코소보에서 태어나 아주 어린 나이에 이탈리아로 떠나 이곳에서 아내를 만났는데, 아내 역시 발칸반도 출신의 로마족 태생이었다. 행정적으로 복잡해 보이는 이 가족의 이면에는 1990년대 전쟁으로 길거리에 내몰린 수천 명의 현실이 극명히 드러난다. 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스스로 사회적 신분을 다시 만들어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비단 레오나르다 혼자만 기구한 처지가 된 것은 아니다. 이 시기 동안 코소보 출신의 수많은 로마족 사람들이 스스로를 ‘박해당한 알바니아인’으로 소개하며 서유럽 여러 나라에 망명 신청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대거 본국으로 송환되는 처지에 놓였으며, 대개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보내졌다. 스웨덴이나 독일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제1언어인 알바니아어를 할 줄도 모른다.

1980년대 말, 대략 10만에서 15만 가량의 로마족이 코소보에 살고 있었는데, 이는 그 당시 코소보 자치주 전체 인구의 5~10%에 해당했다. 더욱이 코소보는 사회주의 체제인 유고슬라비아가 발전시킨 통합 정책의 선봉에 나선 국가였다. 학교에서 로마족 언어도 가르쳤고, 코소보 자치주 내의 프리즈렌과 이어 코소보 수도인 프리스티나에서는 세계 최초의 로마족 라디오 방송과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제작되기도 했다.

로마족의 디아스포라적
유랑생활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코소보 주민 가운데 다수민족인 알바니아계 사람들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정권 사이의 대치가 점차 격화되어 가면서 상황이 차츰 악화됐다. 로마족으로선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두 진영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처지였다. 지역 내 경제 상황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외로 살 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국내에 남아있던 이들은 그때그때 소나기를 피해가며 생명을 부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바니아 사람들이 공직에서 해임되고, 또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탄압 분위기가 일자 알바니아 사람들이 대거 사임하면서 수많은 로마족이 이들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에 따라 코소보 사태가 진정된 후 로마족에겐 세르비아 밀로셰비치 정부의 ‘부역자들’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로마족을 향한 이 같은 비난은 1999년의 ‘끔찍한 여름’ 내내 로마족 공동체가 겪은 수많은 학살의 명분이 되었다. 코소보를 점거한 NATO 군인들이 태연히 지켜보는 가운데, 코소보 도시 대부분의 로마족 거주 구역에선 조직적으로 약탈과 방화가 이뤄졌다. 주민들은 마케도니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인근 국가로 피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들 지역 가운데 일부에선 여전히 로마족이 무리를 이루어 살고 있다. 주변국으로 몸을 피한 로마족 사람들 중 수십 명이 암살됐고, 알바니아로 강제 이주된 경우도 있었다.(1) 이 처참한 비극 이후 코소보에서 계속 거주하는 로마족 사람들의 수는 3만 명에 불과하며, 그나마도 무척 취약한 경제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이들이 공공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완전히 차단됐고, 전통적으로 이들이 해오던 수공업 일거리 역시 더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로마족이 여전히 6천명 규모로 거주하는 도시인 프리즈렌 정도에서나 그렇지 않은 사례가 눈에 띌 뿐이었다.(전쟁 전 프리즈렌에서는 약 9천 명가량의 로마족이 거주했다.) 하지만 대도시에서 추방된 로마족 대부분은 이제 세르비아인 거주지에 몰려 살게 되었으며, 특히 코소보 중심부에 밀집해 살았다.

1999년 6월, 알바니아계 극단주의자들은 알바니아계가 다수를 차지하던 이바르강 남쪽에 위치한 미트로비차의 로마족 거주 구역 마할라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렸다. 주로 유럽연합의 자금으로 재정 지원이 이뤄지며 마을은 다시 복구되었지만, 이전에 이곳에서 살던 주민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생계를 꾸려갈 일거리도 없어지고 여전히 인종차별 분위기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미트로비차로 돌아가는 건 그리 썩 마음이 내키는 대안이 아니었다. 이 도시로 재송환된 로마족들은 이 지역 출신이라 할지라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다시금 이곳을 떠나려 했다.
 
옆 길로 빠지는
국제사회의 지원금

1999년 이후, 코소보가 유엔 보호령 하에 놓인 이후 그 수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자금이 코소보 로마족에게 할애됐다. 유럽연합과 회원국, 스위스나 노르웨이 국내 협력 단체, 또는 ‘오픈 소사이어티(Open Society)’ 재단 같은 민간 기구 등이 아낌없이 출연한 지원금에도 로마족의 현지 통합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이들의 경제 활동에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이 자금은 모두 수많은 조직과 기구들의 예산을 불리는 데 이용됐는데, 로마족과 관련한 모든 사업이 훌륭한 자금줄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한 조직과 기구에서 로마족 지원금을 가져다 쓴 것이다. 사실상 사업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전혀 없었다. 평가 기준도 완전히 형식적인 것이었고, 로마족 공동체의 처지가 개선되지 않더라도 자금 출자자의 요구 조건만 채워주면 그만이었다. 

 대신 기금 증여자들은 이 같은 재정적 노력이 코소보 로마족의 본국 송환을 정당화 해준다고 생각했다. 로마족의 서유럽 지역 망명 신청이 기각된 이유이다. 2008년 2월 17일 독립 선언 이후 코소보는 모든 서방 정부와 재입국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로마족의 강제 송환이 허용됐고, 코소보에 아무런 연고가 없거나 이곳에 집 한 채 없는 사람이라도 예외 없이 강제 송환 규정의 적용을 받았다.

진정성없는 코소보의
‘다인종' 정책

‘신흥국’인 코소보는 다인종 국가를 표방하며, 쿼터제의 실시로 코소보 내 로마족과 투르크족, 보스니아족, 고라니족 등 소수민족의 기용을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11월 3일의 지역 선거 준비 과정에서도 나타나듯이, 국제 사회의 모든 압력은 세르비아 공동체의 코소보 제도권 ‘통합’에만 집중되고 있다. 즉, 미트로비차 북부의 세르비아인 거주지나 세르비아계 단일 구역의 통합 문제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소보 내의 로마족이 처한 신세는 무시해도 그만인 조절 변수에 해당할 뿐이다. 서유럽으로의 이주 문제가 불거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글·장 아르노 데랑 Jean-Arnault Dérens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여러 국제 보고서에서 이 같은 범죄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베오그라드 인도주의 법률 센터(Humanitarian law center)의 연구 내용을 참고. www.hlc-rd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