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화려한 귀환

2013-11-08     자크 레베스크

동맹국들에 대한 일상적인 첩보활동이 폭로되어 워싱턴이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된 반면, 모스크바는 스노든 사건과 시리아 문제를 통해 국제무대에 성공적으로 복귀하는 것 같다.
가공할 만한 외교력을 물려받았지만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이 몰락한 이후 약화된 러시아는 마침내 자국의 강대국 지위를 되찾았다고 평가한다.


지난 몇 달 동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두 가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8월에 국가안보국(NSA)의 도감청을 폭로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미국의 컴퓨터 기술자 에드워드 스노든에게 망명지를 제공해 주었다. 그때 푸틴은 러시아가 워싱턴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국가라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런 요구를 피하기 위해 중국이 발뺌을 했고, 뒤이어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심지어 쿠바도 발뺌을 했는데, 이 국가들은 다양한 핑계거리를 댔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젊은이를 받으려 한 정부들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행사한 압력이 푸틴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워싱턴은 알 카에다의 예전 지도자인 오사마 빈라덴이 구현한 안보위협에 버금가는 짓을 스노든이 저지른 것처럼 행동했다. 워싱턴은 심지어,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미국의 컴퓨터 전문가를 수송한다고 의심받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1)의 비행기가 해당국 영공을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분위기가 러시아 정치무대 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푸틴의 ‘대담한 행동’이 빛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 모스크바에서는 푸틴의 수많은 반대파들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 옹호라는 이름으로, 푸틴의 행동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푸틴은 파급효과가 훨씬 더 컸던 시리아 문제에서 진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푸틴이 바샤르 알 아사드에게서 국제 사회의 통제 하에 자국의 모든 화학무기를 폐기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덕택에, 오바마는 본인이 고려했던 응징폭격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백악관은, 러시아가 다마스(시리아의 수도) 체제를 지원하고 유엔의 모든 제재에 반대한다고 비방하면서, 러시아를 국제 사회에서 고립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현재 푸틴은 가공할 결과를 가져올 군대 파병을 피하게 해준 정치인으로 비치고 있다.

푸틴은 여기서 한 번 더 미 행정부의 잘못된 계산 덕택에 쉽게 승리했다. 자신이 고려했던 군사작전에 영국이 협력을 거부하는 예상치 못한 쓴 맛을 본 후에, 오바마는 미 의회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실패를 맛볼 순간이었고 그것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미국의 신뢰 문제 때문에 군사보복 작전에 찬성했던 국무장관 존 케리는(2), 9월 9일 본인이 ‘아주 제한적인’ 작전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미 행정부의 오판 덕택에 승리한 푸틴

푸틴이 협상을 성립시킨 다음날, 러시아 일간지 <이즈베스티아(Izvestia)>는 “러시아가 오바마를 구원해 주었다”(2013년 9월 12일)는 제목을 달았다. 푸틴 대통령은 신중하게도 자신의 아첨꾼들과는 달리, 미국을 기분 나쁘게 비꼬지 않았다. 푸틴은 자신의 외교단과 협력하여 최근의 사건에서 시대적 징후를 살피고, 특히 망치지 말아야 할 역사적인 기회를 포착하고 있다. 만약 스노든이 6월이 아닌 10월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면 스노든은 아마 모스크바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2년 전부터 시리아의 분쟁에서 보여준 러시아의 태도는 자국의 두려움과 좌절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펼칠 자국의 장기적 목표와 야망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그 태도는 푸틴이 국내 무대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도 드러내고 있다. 두 번의 체첸 전쟁(1994~1996년과 1999~2000년) 은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진압 기동대에 대한 테러 행위와 공격이 같은 규모도 아니었고 유사한 희생자를 낸 것도 아니지만, 이런 테러 행위와 공격이 북(北)코카서스 지역에서 빈번해졌고, 특히 다그헤스탄 지역과 잉구셰티야 지역으로 퍼져가고 있다. 비록 우리가 거기서 보게 되는 대립과 범죄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강도질에 가까울지라도 그렇다. 체첸 반군은 덜 조직화되어 있고 더 흩어져 있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2012년 7월 전례 없는 두 번의 테러행위가 타타르스탄을 강타했다. 타타르스탄이 북 코카서스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스스로를 코카서스 국왕으로 칭하는 체첸 반군 지도자 도쿠 우마로프는 2014년 2월 소치 올림픽이 열리면 공격하겠다고 장담했다.

러 영향력 약화를 꾀하는 미국의 전략

워싱턴에 소재한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연구원인 고든 한의 주장처럼,(3) 상당수의 러시아 언론은 수백 명의 러시아 출신 전사들이 시리아에서 반군으로 싸운다고 추정한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간접적으로 알 아사드 정부에 무기가 지속적으로 배달된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푸틴과 그의 측근들에게 있어서 시리아 군대의 해체는 시리아를 새로운 소말리아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에서 작전 중인 반(反)러시아 전사들에게 배후기지를 제공하고 더 많은 무기를 가진 위험한 지역이 될 수도 있다. 알 아사드에 충성하는 군대를 과소평가했던 워싱턴이 이런 두려움을 공유하기 시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국제정치의 쟁점들에 대해 말하자면, 사람들은 시리아 분쟁에서 러시아가 바라는 것이 지중해에 위치한 타르투스, 즉 러시아의 유일한 해군시설(해군기지라고 할 수는 없는)을 보존하고, 무기시장의 고객 중의 한 명에게 권력을 계속 유지시켜 주는 것으로 그 목적을 축소 해석했다. 이런 고려 사항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항들이 러시아의 완강함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러시아는 특히 소련 이후 국제질서에서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되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푸틴이 출현하기(2000년에 대통령으로 선출) 훨씬 전인 1996년부터 아카데미 회원인 에프게니 프리마코프가 외교부를 장악하고 나자,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 어떤 교감이 생겨난다. 이 교감은 그 후 계속해서 강화되었는데 러시아가 하찮은 강대국으로라도 다시 등장하는 것을 미국이 끊임없이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분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가 발트해 국가들과 동부의 여러 나라에까지 계속해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과, 이 기구에 조지아와 우크라이나까지 포함시키려는 미국의 의지를 증거로 보고 있다. 미국의 이런 행동은 통일된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허락받기 위해 고르바초프에게 했던 약속을 위반하고 있다.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미국이 가장 합법적으로 러시아의 이익이 달려 있는 지역에서조차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고 단언한다.

크렘린이 볼 때, 국제적인 강제 제재와 1999년의 코소보 전쟁,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과 동맹국들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회피한 것은 워싱턴으로 하여금 러시아의 중대한 이익을 강제적으로 고려시킬 모든 협상을 피한 것일 뿐이다. 모스크바는 해외군사작전에 대해, 특히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지 없이 멋대로 조작한 정권교체에 대해 심각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다.

러, 미국과 세력균형 도모

러시아는 시리아에 대한 모든 군사작전에 반대하면서, 끊임없이 2011년 리비아의 전례를 상기시켰다. 러시아는 유엔 결의안 1973호를 통과시킬 때 기권했다. 이 결의안의 원래 목적은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결의안은 카다피 체제를 전복하고 군사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묘히 활용되었다. 이 시절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이었는데, 크렘린은 백악관과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현재 모스크바는 국제적 관심사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지정학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1996년부터 대외정책의 중심적이고 공식적인 목표는, 점차적으로 미국의 일방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전 세계에서 다극화 경향을 강화하는 것이다. 자국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능력을 현실적으로 직시하고 있는 푸틴은, 이전의 프리마코프처럼, 다극화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여러 파트너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중국은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가 되었고,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 두 나라의 협조체제는, 이란, 리비아 혹은 2003년 이라크 전쟁 문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리아 문제에 대해 특히 지속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다. 더 참을성이 있고 자국의 능력에 대해 더 자신감이 있는 베이징은 모스크바가 그들의 공동지위 방어에서 제 1선을 담당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크렘린은 국제정치를 중재하는 유일하고 합법적인 장소인 안전보장이사회를 신성시한다.

이런 파트너십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서구의 분석가들은, 러시아 엘리트들이 중국의 거대한 인구와 경제적 영향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얼마 안가서 파트너십이 쇠퇴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협력은 경제적 측면(러시아의 석유와 무기 수출), 정치적 측면(상하이협력기구에서의 협조체제)(4) 및 군사적 측면(거의 매년 양국은 육·해·공군 합동 훈련과 작전을 펼쳤다)에서 끊임없이 증가했다. 당연히 양국 간에 알력이 있는 지역들이 있다. 예들 들어 구소련 이후 탄생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 문제가 그렇다. 중국은 2009년부터 러시아보다 이 국가들과 더 많은 교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베이징은 이 지역에서 현재까지 러시아의 지정학적 이익을 우선적으로 인정해, 이 지역에 기지를 건설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중국은 모스크바와 이 지역 대부분의 국가들 사이에 서명된 집단안보조약기구를 인정하고 있다.(5) 반면에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협력 틀로서 북대서양조약기구와 집단안보조약기구의 협력을 원하는 크렘린이 누차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기지 설치나 자국군의 보급통로 같은 모든 문제에 대해 각 국가와 개별적으로 협정을 맺는 것을 선호하면서, 러시아의 제안을 항상 거부해 왔다.

푸틴은 당연히 능력도 없으면서 전(全)방위적으로 미국과 경쟁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냉전의식을 갖고 있다고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워싱턴이 겪는 국제적 좌절을 러시아가 즐기는 것은 복수 때문에 그렇기보다는 원통해서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하는 것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둘러 후퇴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시리아 문제에서 대결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국제 놀이 규칙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새로운 원칙에 입각하여 미국 및 유럽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재(再)균형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가 방어수단을 잘 갖춘 몇몇 분야에서도 경쟁을 거칠게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자국의 사우스 스트림(South Stream) 가스관 프로젝트가 워싱턴의 지지를 받는 나부코(Nabucco) 프로젝트에 대해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6)

푸틴, 미국과 상대적 평등관계 추구

크렘린이 고집스럽게 추구한 위대한 재(再)균형의 시기가 다가온 것일까? 하찮은 역할이 아닌 중요한 역할을 다시 해보려는 러시아의 야망이 실현되고 있는 것일까? 푸틴이 시리아 문제에서 거둔 성공은 워싱턴이 다극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지만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 동맹국인 영국의 불참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G20정상회담이 개최되었을 때 벌어진 토론도 다극주의의 징후일 수 있다. 정상회담에서는 시리아에서의 모든 군사적 개입을 반대하는 소리가 강력히 표출되었다.(7) 미 의회에서 군사개입에 반대해 표현된 혐오감 역시 다극주의의 또 다른 징후일 수 있다. 가장 점잖은 러시아 분석가들에 따르면, 다극주의에 대해 미 의회의 신(新)고립주의자들을 믿어서는 안 되고 일차적으로 오바마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바마는 미국의 불참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 타협을 기반으로 하여 가장 위험한 분쟁들을 예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위협적인 두 가지 분쟁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시리아와 이란 문제다. 이 분쟁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러시아는 자국이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한다.

시리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접촉은 러시아가 9월에 화려하게 복귀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2013년 5월 존 케리 장관은 러시아 외교장관에게, 알 아사드의 퇴출을 계속 요구하면서도, 시리아의 미래에 대해 토론할 국제회의를 여는 것에 동의해 주었다. 북아일랜드의 로크 에른에서 G8정상회담이 개최되었을 때, 푸틴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시리아에 대한 공동성명을 그 자리서 내지 못하고 연기했다. 알 아사드가 화학무기 폐기에 동의하고 그런 사실이 확인되면, 러시아 지도자는 서구 지도자들에게서 합법성을 얻게 될 것이다.

모스크바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정된 국제회의에, 만약 이 회의가 결론을 내려면, 테헤란이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사주를 받은 미국이 이를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는 이란의 새 대통령인 하산 로하니와 오바마 사이에 시작된 대화를 활성화시키려고 노력한다. 핵문제에 대해 타협의 실마리가 조금이나마 잡힌다면 전반적인 추진력이 활성화될 것이다. 모스크바는 이란과의 관계를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왜냐하면 2010년 워싱턴이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요구한 수많은 제재에 동참함으로써 이란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는 그 당시 SS-300 대공방어미사일의 인도를 취소했다.

푸틴은 적어도 상대적인 평등을 기반으로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고 여러 번 노력했다. 우리는 2001년의 9.11테러 사건 이후에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푸틴은 그때 기회의 창문이 열리고 있다고 믿었었다. 그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위해 중앙아시아의 자국 동맹국들에서 기지를 설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데탕트 흐름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가려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쿠바에 있는 소련의 마지막 군사 감시시설들을 폐쇄했다(중요하지 않지만 사실이다). 그런데 몇 달 후 조지 부시는 발트해 3개 공화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대(對)미사일 방어 무기를 엄격하게 제한했던 탄도탄요격미사일 협정(ABM협정)에서 미국이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소강상태는 끝났다. 푸틴은 이제 좀 더 유익한 협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하나의 중요한 가설이 변화의 기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 가설은 소련의 내부문제에 속한다.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군중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2012년 대통령직에 복귀한 푸틴은 자기 권력을 더 잘 안착시키기 위해 반미주의를 러시아 민족주의의 한 성분으로 배양하고 있다. 외국자금을 받는 러시아 비정부기구들은 아무리 그 액수가 적을지라도 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새로운 법에서 반미주의를 보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KGB에서 교육 받은 흔적을 보게 된다. KGB는 외부의 영향력이나 술책을 국내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으로, 정치적 불안정의 요인으로 간주한다. 푸틴이 자기 권력의 합법성을 더 잃거나 혹은 반대로 합법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국제적 야망을 실현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러시아 외교관들의 영광과 환멸

‘위대한 애국 전쟁(1941~1945년)’이 끝난 후 세워진, 외교부가 자리 잡고 있는 모스크바의 27층 건물은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양식 때문에 러시아가 초강대국이었던 과거를 상기시킨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이 건물이 건설되는 동안 공산주의의 모험은 세력을 넓혀갔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RSS)의 외교활동은 모든 대륙에서 활발히 펼쳐졌다. 당시 외교부에서 일하는 것은 가장 영예로운 직업 경력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후보자들은 학업능력이 뛰어나고 청년공산동맹에서 활동을 눈부시게 펼친 사람들 중에서 엄선되었다. 외교부의 외교아카데미(1934년 설립) 혹은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 연구소(1944년 설립)에서 교육받은 이들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다른 부처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러시아와 구별이 안 되는 소비에트 조국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해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감명보다는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가진 매력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전 세계 혁명의 운명이 모스크바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유럽에 대한 열등감을 겪은 후에 어떻게 외교관이 그 시절의 러시아가 누린 국제적 지위에 대해 향수를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탈린 시대 건축 유산의 무게가 냉전 시절에 러시아 혐오 반응을 키우는 데 일조했을지라도, 그 무게가 소비에트 권력 해체에 우호적인 서구화된 국가 엘리트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URSS의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1991년 12월 25일 핵 가방을 보리스 옐친에게 넘겼던 순간에 러시아 외교부 장관인 안드레이 코지레프는 스몰렌스크 광장의 마천루에서 이미 자신의 협력자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1991년 12월 18일 서명된 칙령에 의해 러시아의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은 소비에트공화국의 모든 해외 대사관과 대표기관들을 넘겨받았다.

URSS의 파괴자 역할을 했던 러시아 지도자들은 결과적으로 외교적 연속성을 완벽하게 그대로 넘겨받았다. 동시에 러시아 지도자들이 ‘문명화된 세계’라고 불렀던 서구 세계에 편입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들은 러시아가 맺은 국제협약으로 인해 지게 된 모든 의무를 특히 군비축소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고 확인해 주면서, 서구의 대사관 사무국들을 안심시켰다.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12월 24일 자의 간단한 편지를 통하여, 옐친 대통령은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자신의 국가가 안전보장이사회의 URSS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통고했다. 아주 놀라운 다른 사건이 벌어졌다. 코지레프 장관이 모스크바 주재 외교단 수장들에게 1992년 1월 2일 짤막한 구두 메시지를 보내, 외국 정부들에게 해당국에서 신임장을 받은 소련 대표들을 러시아 연방의 대표들로 간주해 달하고 요구함으로써, 옛 소련의 대사관과 영사관에서 여전히 근무하고 있었던 비(非)러시아인들을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원래 코지레프는, 러시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할 수 있으며, 러시아의 이익과 자유 민주주의 이익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까지,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서구와의 접근을 서두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지나친 낭만주의는, 비록 현실주의 정치를 더 중시하지는 않는다 해도, 같은 무게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현실주의 정치를 양립시켜 가면서 형성된 외교 기구를 엄청난 회의에 빠지게 했다. 본능적으로 옐친 대통령은 코지레프를 신임하지 않았으며, 결국 공개적으로 새로운 임무 수행을 하기에는 외교부 장관이 무능하다고 비판했다. 예산이 삭감되는 상황에서, 외교직의 인기가 엄청나게 떨어졌다. 1991년과 1993년 사이 러시아는 36개 대사관과 영사관을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옛 소련제국에서 독립한 위성국가들과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부서들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외교부는 간신히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유럽 언어에 대한 지식 수요가 외국기업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증가되었기 때문에, 민간부문이 제공하는 구미당기는 근무 조건에 매료당한 수많은 외교업무 종사자들이 외교관직을 내던져 버렸다.

외교부 장관이 추진한 황당하고 극단적인 서구중심주의 국제정치가 외교 군단에 동기 부여를 하지 못했고, 1990년대 내내 러시아가 겪은 국제적 모멸감은 외교직의 명예를 끊임없이 추락시켰다. 경제활동이 1990년에 비해 약 40% 정도 추락하면서,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민주적이라고 자처했던 세력들은 신용의 상당부분을 잃게 되었다. 1996년 1월 외교부 장관직에 에프게니 프리마코프가 임명된 것은 의기양양한 범(凡)대서양 동맹에 대해 정책을 변화시킨다는 신호였다. 아랍세계 전문가이면서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 국제관계연구소 소장으로서의 그의 아카데미 경력이 1991년 8월 쿠데타가 무산된 이후 고르바초프의 요구에 의해 정보기관 국장으로 뒤늦게 수행한 역할보다 훨씬 더 많은 점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담당 부서의 수장이 외교부 수장이 된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현실주의 정책에 대한 자신의 고전적 비전을 통해 그가 강제적으로 러시아를 존중하도록 만든 점과 다극 질서의 건설에 대한 그의 호소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옐친은 대외정책에 대한 모든 재량권을 그에게 줄만큼, 자신의 장관을 신임하지 못했다. 옐친은 자신이 그처럼 두둔했던 서구와의 접근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임자의 노선을 변경함으로써 수많은 옐친 반대파들에게 자신의 장관이 호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옐친은 반대파에게 양보하는 것처럼, 1998년 9월 11일 프리마코프를 총리에 임명했지만, 얼마 후인 1999년 5월 11일 그를 사임시켰다. 이 사건은 프리마코프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소수 지배자들의 수장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를 엄청나게 기쁘게 했다.

우리가 옐친의 초기 시절과 비교하여 러시아 외교기구의 현 상황을 점검해 보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상황이 호전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국가조직을 인상적으로 재건하기 시작한다. 이는 에너지 분야를 다시 장악하고 탄화수소의 가격이 엄청나게 급등함으로써 가능해졌다. 그 효과는 곧바로 대외 정책에 반영된다. 외교기구의 위엄을 다시 선양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이 취해졌다. 2002년 2월 10일을 ‘외교관의 날’로 제정하는 결정이 내려진 것도 이런 조치의 일환이다. 이 날짜는 1569년 이반 황제가 처음으로 ‘외교부서’ 창설을 언급한 날짜와 일치한다. 국가 공복들의 시대와 역사에 대한 이해방식이 엄청나게 넓혀졌다. 공산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대범하게 과거의 영광스러운 차르 시대에 사용하던 다양한 상징들이 복원되었다.

외교장관의 활동은 이제 당연히 대통령의 권력에 확실하게 종속되어 있다. 반면에 대통령 관저와 외교기구 사이에 팽배했던 상호불신은 일종의 밀착 관계로 대체되었다. 이런 밀착 관계가 2004년 3월 9일 현 장관인 세르게이 라브로프가 임기를 시작하면서 특히 심해졌다. 이 노련한 외교관은 러시아의 유엔대사로 10년간 일했다. 옛 소련의 강성함에 대한 향수와 서구에 대한 뿌리 깊은 환멸 때문에 이런 밀착관계가 생겨난다. 러시아 외교는 구소련체제의 메시아적 시대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가 버린 것을 인정하고, 친(親)슬라브적이고 동시에 유라시아적인 문명부흥을 꿈꾸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구소련 이후의 러시아가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는 것을 포기하지만, 러시아는 미국이 자국과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푸틴이 <뉴욕타임스>(1)에 기고한 미국의 예외주의에 대한 비난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모스크바나 워싱턴의 폐부를 찌르고 있다. 예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러시아는 현 국제시스템의 일극주의에 저항하여, 러시아의 대의명분을 지지받을 수 있는 국제포럼에서 정책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할 것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상하이협력기구를 생각한다. 상하이협력기구는 미군의 중앙아시아 주둔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도 연장되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사람들은 또한 브릭스(Brics: 브라질,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룹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이 그룹은 국제통화 본위로서의 달러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시각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좀 더 최근인 2013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된 G20정상회담에서, 미국이 근동에 일방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거대한 운동을 러시아가 주도하는 것을 목격했다. 스탈린 시절에 세워진 스몰렌스크 광장의 마천루에서 시리아의 화학무기 폐기에 대해 논의하는 미·러 양자 간 협상이 러시아 외교기구의 향수를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있다.


글·자크 레베스크 Jaques Lévesque
<러시아의 복귀>(바리아, 몬트리올, 2007년)의 저자.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1) “유럽에 감금된 볼리비아 대통령인 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8월호 참조.
(2) Patrick Wintour, “존 케리는 시리아에게 화학무기를 폐기하는지 아니면 공격을 받든지를 선택하라며 일주일의 시간을 주었다”, 2013년 9월 10일, TheGuardian.com
(3) “코카서스와 러시아의 시리아 정책”, 2013년 9월 26일, http://nationalinterest.org
(4) 2001년 6월에 창설된 기구로 중국,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타지키스탄이 가입하고 있다. 옵서버 국가들로 인도, 이란, 파키스탄 등이 참여하고 있다.
(5) 러시아를 포함해 아르메니아,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 회원국들이다.
(6) 사우스 스트림 프로젝트는 우크라이나를 거치지 않고 러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가스관 프로젝트다. 나부코 프로젝트는 카스피해 가스전을 유럽에 연결하는 가스관 프로젝트다.
(7) Michael T. Klare, ‘워싱턴의 엄청난 간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