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이혼 직전의 정부와 국민

2013-11-08     샤를르 다노

“말레이시아 중국인들의 딜레마는 경제에 더해 정치도 독점하느냐 아니면 오늘의 말레이시아를 일궈낸 분리원칙을 지키느냐이다.” 마하티르 모하마드(1981~2003년 재직) 말레이시아 전 총리가 지난 7월 에 한 이 같은 발언은(1) 중국계 주민이 국민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오랫동안 되풀이해 온 전형적인 논리다.

집권여당인 통일말레이민족기구(UMNO)의 막후 실력자 마하티르 전 총리가 말레이시아 독립 때 만들어진 암묵적인 원칙인 ‘정치는 말레이인, 경제는 중국인’을 언급하는 것은 아직도 말레이시아인들이 사회를 양극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까지 말레이시아의 정치와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양극적인 시각은 1969년에 발생한 대규모 유혈사태로 확고해졌다. 1969년 총선에서 야당의 약진을 축하하며 행진하고 있던 중국계 주민들이 말레이계 주민들과 부딪히면서 2개월 동안 공식적으로 196명의 사망자를 낸 유혈폭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 말레이 정부는 경제를 독점하고 있는 중국인들에 대한 말레이인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고 폭력사태를 정당화했지만 실제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이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모두) 아시아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 중의 하나인 말레이시아의 빈곤문제를 방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공산 게릴라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적 요구도 용납되지 않았다. 1969년 폭동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신경제계획(NEP)의 수립이었다. NEP의 근간은 ‘땅의 자식’이라는 뜻의 말레이인과 토착민을 가리키는 부미푸트라(Bumiputra)와 소수민족 주민들의 차이를 법으로 정하고 부미푸트라를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말레이인, 부유한 중국인의 구도를 만들어낸 것은 정치인들이었다. 경제학자 엘자 나파예 드 미쇼(2)는 말레이계 주민들의 빈곤은 무엇보다도 생계유지 노동과 가치생산 노동의 분리, 민족별 직업 구분, 열악한 교육환경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계급 불평등은 오히려 각 공동체 내부에서 더 심각했고 “당시 중국계 주민의 98%가 노동자거나 소규모 농민이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었다.” 

지난 5월 5일 열린 총선에서도 마하티르 전 총리는 소수인 중국인들에게 주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말레이계 주민들의 두려움을 잘 이용했다. 전략은 성공했다. 통일말레이민족기구(UMNO), 말레이시아 화교협회(MCA), 말레이시아 인도회의(MIC)가 동맹한 국민전선(BN)이 다수당이 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득표수는 야권연합인 국민연합(PR)보다 적은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의 승리였다.(3) 게다가 광범위한 선거부정 의혹이 제기되었다. “선거구 개편, 유권자들의 이유 없는 투표지 이동, 주류 언론의 편파보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거운동에 과도한 공적자금 사용, 유권자 매수 등” 공정하지 못한 조건에서 선거가 치러졌다고 정치학자이며 싱가포르 경영대학교의 부교수인 브리짓 웰시는 설명하고 있다.

근소한 차의 승리에 대해 온건주의자로 알려진 나집 라작 현 총리조차도 국민전선의 실망스러운 결과는 많은 수의 중국계 유권자들이 통일말레이민족기구(UMNO)에 예속되어 있는 무능력한 화교협회(MCA)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중국 쓰나미’라고까지 말하면서 말레이계 주민의 상당수가 야당으로 돌아선 것이 표로 나타난 결과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집 총리의 이러한 반응은 이제는 정치성향이 민족이 아니라 사회적, 지리적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을 UMNO의 지도자들이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족 간의 갈등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조장하고 있는 나집 총리는 말레이계와 중국계 사이의 ‘조화’를 강조하는 ‘하나의 말레이시아’ 정책을 주창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화해’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과학대학교의 아마드 파우지 정치학 교수는 설득력이 없다고 말한다. “문제를 촉발시킨 다음에 중재자가 되어 화해를 말하는 것이 국민전선의 오래된 전략이다.” 문제는 이 같은 전략이 과거처럼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도시지역에서는 뉴스 사이트, 블로그와 같은 대안 미디어가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전통 미디어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민의 56%가 30세 이하인 말레이시아에서 UMNO의 전략은 적절하다 할 수 없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을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인이라고 생각하고 윗세대들보다 인종차별을 덜 한다.”고 웰시 교수는 말한다. 그런데도 국민전선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당들과 연합을 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선물 주듯 선심정책을 쓰고 TV 스타, 영화배우들과의 행사를 주관하는 식의 여전히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젊은이들이 마하티르식 권위주의로 상징되는 과거 정치를 얼마나 강하게 거부하고 있는지 국민전선의 지도자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젊은 세대들은 1980년대의 눈부신 경제성장도 경험하지 않았고 말레이시아 독립에 큰 역할을 한 UMNO에 채무감도 느끼지 않고 있다. “UMNO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을 주도했고 말레이시아를 독립시켰지만 말레이시아인들은 UMNO에게 더 이상 표를 주지 않고 있다.”고 파우지 교수는 말한다. 라파예 드 미쇼 교수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말레이시아인들은 경제성장이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권위적인 정권을 감내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금융위기와 개인의 자유의 희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아시아의 호랑이 말레이시아의 경제지표는 건강하다. 공식통계자료에 의하면 2012년 경제 성장률은 5.6%, 인플레이션은 1.7%, 2013년 4월 실업률은 3.3.%를 기록하고 있다. 나집 총리는 전임자들의 정책기조에 맞추어 2020년까지 말레이시아를 고소득국가로 진입시킨다는 경제변혁계획(ETP)을 2010년 9월 발표했다. 총 3천억 유로의 예산이 소요되는 경제계획으로 공기업(특히 에너지 분야)을 통한 공적자금과 해외투자를 포함한 민간투자로 충당될 계획이다. 말레이시아 주식시장은 이슬람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투자시장이며 게다가 나집 총리의 재선 소식을 환영한 바 있다. 

나집 총리는 국내시장 활성화를 통해 수출 의존도를 줄이고 2020년까지 국민소득을 증가시키겠다고 천명했다. 2012년 5월에는 최저 임금제도를 도입했는데 월 200유로 정도로, 도시지역 생활비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다. 이번 총선의 결과를 봤을 때 경제변혁계획의 목표는 야심차지만 실현가능성을 믿는 국민은 적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 말레이시아인들은 정체된  구매력을 걱정하고 있고 공공서비스, 인프라스트럭처, 고등교육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판은 1969년 신경제계획(NEP)이 만들어낸 긍정적 차별 조치인 말레이인 우대정책에 쏠리고 있다. 이 정책으로 민족 간 그리고 각 민족 공동체 내부의 불평등을 해소시키는 데 얼마간 효과가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말레이인 우대정책은 형태가 변형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실시되고 있다. 라파예 드 미쇼 교수는 “더 이상 이 정책을 유지할 논리가 없다.”고 단언한다. 정치적으로 민족을 구분해서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중국계와 인도계 주민들을 2등 시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소수계 주민들이 공직, 학계, 부동산, 신경제계획으로 탄생한 대형 공기업에 진출하는 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말레이인 우대정책으로 공공시장의 관리감독과 자원개발이나 관광지 개발의 수익과 관련한 부패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1986년에 시작된 민영화의 물결은 족벌주의를 낳았다. 라파예 드 미쇼 교수는 “상위 20%가 말레이시아 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UMNO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정부정책의 모든 혜택을 독점해서 정작 수혜자들이 되어야 할 말레이계 주민과 보르네오 섬의 토착민들을 소외시키고 있다. 보르네오 섬의 대대적인 지하자원 개발 수익도 현지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대안 미디어의 부패 스캔들 폭로도 이어졌다. 나집 총리 자신도 국방부 장관이었을 당시 프랑스 잠수함 구매와 관련해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 곤혹을 치르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은 프랑스 법원에 제소되어 두 명의 예심 판사가 조사 중에 있다. 야권동맹인 국민연합은 총선기간 동안 투명성을 요구하는 선거운동을 했다. 하지만 총선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회모델의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민족공동체를 뛰어넘는 정당연합을 구성하고 민족적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분배정책을 약속함으로써 국민연합이 “공동체가 아니라 시민을 대표하는 정당이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라파예 드 미쇼 교수의 분석이다. 국민연합의 지도자인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가 ‘말레이시아의 다문화적 정체성의 산파’로 여겨질 정도로 현재 말레이시아인에게 정체성은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안와르 전 부총리는 재무장관 시절부터 오랫동안 마하티르 총리의 적자로 여겨졌지만 마하티르 총리와 결별 후 1998년 부패 혐의로 복역하기도 했다. 반대파들이 공직 출마를 막으려고 제기했던 ‘동성애’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말레이시아 사회의 성숙을 기대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아랍의 봄’에 영향을 받아 정치권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참여 활동이 늘어나고 있다. 시민단체 연합인 버르시(Bersih, 말레이어로 ‘깨끗함’을 뜻함)가 조직한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두 번의 대규모 집회가 좋은 예다. 두 번째는 SNS와 같은 대안 미디어의 발달이다. 2명 중에 1명 이상이 페이스북 계정을 가지고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SNS는 사회참여를 용이하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5월 5일 총선의 높은 투표율과 부정선거에 대한 의혹 제기는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정치참여가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레이시아 전국 곳곳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선거관리위원회의 퇴진을 요구하는 평화집회를 조직했다. 이에 대해 나집 내각은 국회의원, 학생, 블로거, 야권을 비난했지만 웰시 교수는 “시민사회가 확대된 것이고 시민참여도 더 늘어날 것이다. 이제 공포는 사라졌다.”고 강조했다.
선거부정에 대한 소송이 잇따르고 있지만 총리실 소속의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 결과를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피할 수 없다고 파우지 교수는 말한다. “달라진 인구구성 때문이라도 변화는 불가피하다. 정권을 잃는 것이 UMNO에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부패의 요소를 도려내고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다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성향의 공룡정당이었던 인도의 의회당이나 대만의 국민당 예를 따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2020년 말레이시아를 선진국에 진입시킨다는 야심찬 목표를 수립했다. 하지만 이 목표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찰하고 다문화의 사회가 이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능력이 되는 민주국가가 탄생되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영국 식민통치의 유산

말레이시아는 영토가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섬 북부로 나눠져 있고 인구는 약 3천만 명이다. 19세기 말레이시아 이민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기 초에는 중국 남부에서 온 중국인들이, 세기 말에는 타밀 인도인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었다. 1957년 독립과 함께 이민자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말레이시아 국적을 부여받았다. 말레이시아인의 신분증에는 인종과 종교를 표시하게 되어있다.(‘국가정보' 참조) 경제학자 엘자 라파예 드 미쇼의 설명처럼 인종과 종교 구분은 ‘임의적인 것이며 광범위하게 날조된’ 것으로 말레이 사회에서는 낯선 개념이었다. 영국 식민통치자들이 19세기 말의 인종주의 이론에 근거해 행정편의를 목적으로 주민들을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해서 식민통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실시되었던 민족 구분이 말레이시아 사회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성적으로는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레이시아 사회에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글·샤를르 다노 Charles Dannaud

번역•임명주 myjooim@gmail.com

(1) ‘Chinese better off after Merdeka’, <New Straits Times>, 쿠알라룸푸르, 2013년 7월 27일 자.
(2) Elsa Lafaye de Micheaux, <La Malaisie, un modèle de développement souverain?>(말레이시아, 최상의 개발모델인가?), ENS, 리용, 2012년.
(3) ‘국민전선’은 전체 득표수의 47.4%를 획득했지만 의석 비율은 59.9%를 차지했다. 반대로 50.9% 득표를 한 야권 동맹 ‘국민연합’의 의석비율은 40.1%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