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계의 자율성, 그것은 환상이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와 장 클로드 파스롱은 1970년 <재생산. 교육체계의 이론을 위한 원칙들>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이들은 이 책에서 학교가 만들어내는 환상과 사회질서의 재생산을 떠맡고 있다는 환상을, 즉 교육체계의 자율성에 대한 환상과 기회 균등에 대한 환상을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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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교육체계의 상대적 자율성이란 것이, 이 자율성이 허용해주는 관행과 이데올로기의 특수성에 의해 어느 정도 완벽하게 은폐된 의존성의 반대급부라는 사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계급관계들의 구조를 참조해 그 관계들을 명확히 밝히면서, 교육체계와 다른 하부 체계들 사이의 관계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달리 말해 다른 체계에 의해, 즉 마지막 분석 단계에서는 계급관계들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 의존성의 유형과 등급이 항상 주어진 자율성의 유형과 등급에, 다시 말해 고유 기능과 외부기능들 사이에 결정된 어떤 대응 형태에 항상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행복한 무의식에 포획된 자율성의 환상
뒤르크하임(Durkheim)이 관찰한 학교제도가 그에게 교회보다 더 보수적으로 비칠 수 있었던 것은, 학교제도가 자율화를 초역사적 성향으로 간주하여 끝까지 밀고 나간 사실에도 기인하지만, 학교제도가 잘 은폐되어 있었던 만큼 교육 보수주의가 자신의 사회적 보존기능을 더 효율적으로 완수했다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전통교육의 특징인 주입하는 형식과 주입된 내용 사이의 완전한 일치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역사적 조건들을 분석할 수 없었던 뒤르크하임은 ‘과거에서 물려받은 문화의 보존’으로 정의된 모든 교육체계의 고유기능 속에, 고유기능과 외부기능들을 멋대로 조합하여 그것을 모두 포함시키려고 노력했다.
학교가 본질적 기능으로 공정하게 보존하고, 주입하고, 신성시하는 문화가 문화 보존으로 축소되고, 이 문화 보존이란 것이 지배계급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사회적 구별기능을 수행하게 될 때, 제한된 형태에서 교육체계 자체를 계속 똑같이 보존하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을 교육체계에 부여하지 못하는 교육 보수주의는 사회적·정치적 보수주의의 최고 동맹군이다. 왜냐하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고 특정 제도의 목적을 자율화한다는 명목 하에, 교육체계가 자체의 직·간접적 영향력을 통해 ‘사회질서’의 유지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교육체계의 주입 기능, 문화 보존 기능, ‘사회 보존’ 기능 사이의 일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져, 지배계급의 객관적 이익에 교육체계가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선택친화력의 행복한 무의식 속에 은폐되어 있을 때, 교육체계는 모든 외재적 요구에 대해 특히 지배계급의 이익에 대해 무관하다는 자율성의 환상을 완벽하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질서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공교육
그 어느 것도 이런 조화를 방해하지 않는 한 오랫동안, 교육체계는 영원한 회귀 사이클처럼, 번식용 가축이 자손을 생산하는 것에 만족하면서, 어느 정도 역사를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체계에 고유한 재생산의 요구와는 다른 모든 요구를 모른 체하면서, 역설적으로 교육체계가 가장 효율적으로 사회질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와 사회계급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 중 어떤 특별한 경우에, 조화가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객관적 구조들이 계급의 습성(1)을, 특히 성향과 자질을 생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성향과 자질은 이 구조들에 적합한 행동을 양산해 내면서, 이 구조들의 작동과 영속화를 허용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학교를 활용하는 성향과 학교에서 성공하는 자질은,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학교를 활용하고 학교에서 성공하는 객관적 기회들에 종속되어 있고, 이 객관적 기회들은 다양한 사회계급에 결합되어 있다. 이런 성향과 자질은, 교육체계와 계급관계의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을 객관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표시로서, 학습 기회구조의 영속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들이 되고 있다.
학교 밖의 계급 습성,
종속 관계 구조 합법화
자동제거 상태에 이르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학교와 학교가 제재한 것을 평가절하하거나 실패 혹은 소외를 감수하게 되는 것은 부정적 성향과 자질 때문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들은 학교가 객관적으로 지배계급들에게 예정해 놓은 제재의 무의식적 유형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라 그렇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교육체계는 교육체계의 주입행위가 교양 있는 습성의 생산에 절대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혹은 명백히 모순되게도 주입행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에 의해서만 주입행위의 효율성에 차이가 나므로 결과적으로 주입행위가 계급의 모든 결정과는 무관하다는 환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입행위는 극단적인 경우에 계급의 습성을 확인하고 강화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학교 밖에서 형성된 계급의 습성이 모든 학습의 성공 원칙이 되어 완벽하게 계급의 종속관계 구조를 영속화시키고 동시에, 계급의 습성이 생산해낸 학교의 계층이 사회의 계층을 재생산해낸다는 사실을 은폐하면서, 계급의 종속관계 구조를 합법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글·피에르 부르디외 & 장 클로드 파스롱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1) NDLR, 피에르 부르디외, “습성은, 이 단어가 말해 주는 것처럼, 우리가 획득한 어떤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습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습관은 당연히 반복적, 기계적, 자동적, 생산적이라기보다는 재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나는 습성이란 것이 습관과는 달리 생성적인 강렬한 힘을 가진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