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교육, 퇴로 없는 골목?
직업교육이란 본래 젊은이들에게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교육을 의미했지,
결코 젊은이들을 ‘미래의 노동자’로만 인식하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직업교육의 의미는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오로지 기업의 요구에 부합하는 인력을 양성하는 것만을 중요시할 뿐,
더 이상 시민을 양성하거나 전문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흔히 실용적 지식을 관념적 지식과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오로지 학업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우수한 성취를 이루는 것만이 유일하게 지식인 것인 양 인식한다. 직업기술을 연마하거나 생산직이나 사무직 노동자에게 필요한 직무능력을 습득하는 것은 그저 일자리를 얻거나 혹은 그 일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곧 어떤 전문 노하우가 이제 생존 이상의 목적은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노동을 통한 사회 해방이 결국 퀴퀴한 유물 기념관 신세나 져야 할 한물간 이상향이 되어 버렸다는 말일까? 그리하여 노동을 통한 사회해방의 이상이 가장 고도로 구현한 ‘대중교육’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그런 현실을 우려해야 하는지 모른다. 오늘날 미래 생산직·사무직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 모든 논의에서 제외되고 있는 현 실태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상 직업고등학교나 견습 직업훈련이 직무나 노동시장의 현실에 적합한 직업능력을 습득하도록 젊은이들을 도와줘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도 흔히 정치지도자들은 직업계열의 위상을 제고하자는 주장에서 좀처럼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법이 없다.
직업 중시파
VS
학교 중시파
이처럼 청소년 초기 직업교육(기업이 아니라 직업고등학교나 견습 직업훈련과 같이 교육제도의 틀 안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직업교육-역주)에 대해 그저 팔짱을 끼고 침묵하거나 혹은 조용히 가슴만 아파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초기 직업교육은 사실상 매우 중요한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전문적인 노하우·직무능력·직업자격증의 인정 여부나 노동자의 지적 능력 고양, 전문 기술 습득을 발판으로 한 사회적·문화적 신분상승 가능성 등의 중대한 문제가 바로 초기 직업교육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 문제들과 관련해 현 시대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힘겹게 일궈놓은 성과를 마치 페넬로페가 실타래를 풀어헤치듯 해체하고 있는 추세다.
프랑스 혁명기 동안 동업조합과 도제제도가 폐지되면서, 기존에 전문 기술을 전수하거나 훈련하던 방식이 대대적으로 변화했다. 이로써 근대 임금노동자의 탄생이 예고된 것이다. 직업학교를 창설하려는 지역 단위의 노력이 지속됐지만 20세기 초까지 이른바 ‘견습의 위기’라 불리는 견습생 부족 사태는 멈추지 않았다. 당시 이 문제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직업중시파’와 ‘학교중시파’의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먼저 ‘직업중시파’는 경영자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젊은이를 양성할 수 있도록 개별적 노동시장의 현실에 적합한 직업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기업 차원에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경영자의 가치가 무엇인지는 1913년 상공회의소 부소장이 직업교육 강좌 개설을 둘러싼 자금 지원에 관한 도청 질의서에서 회답한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직업교육 강좌가 과연 우리가 기대했던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물론 현실성 있게만 운영한다면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업무를 마친 저녁 시간에 야간 강의를 개설하고, 오로지 전문가만이 강좌를 이끌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학교중시파’는 무엇보다 직업교육에서 학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권자로서의 시민을 양성하거나, 취득 자격증을 국가가 공인해주는 문제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에게 “직업학교는 어쨌거나 산업기관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관대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노동계급 자녀에게 지적, 도덕적 소양을 키울 수 있는 결정적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느냐 하는 여부”(1)였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탄생한 첫 번째 개혁안이 ‘1919년 아스티에법’이었다. 하지만 아스티에법은 근본적인 모순은 해결하지 못한 채 미봉책에 그치고 만다. 그럼에도 어쨌든 이 법은 어느 정도 대중을 대상으로 한 무상의무 직업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 성과를 올린다.
롤러 코스터 위의 ‘직업교육'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비로소 학교중시파의 노력에 힘입어 학교 직업교육 훈련이 황금기를 맞이한다. 견습직업훈련소(CA)(기술교육중학교(CET)의 전신으로 1975년에 직업교육고등학교(LEP)로, 또 그로부터 십년 뒤에는 직업고등학교(LP)로 바뀐다)가 프랑스 학교제도 속에 깊이 뿌리 내린다. 견습직업훈련소는 생산직의 직무능력을 인증해주는 가장 대표적인 자격증인 직업적성자격증(CAP)을 취득할 수 있는 코스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반면 기업이 제공하는 직업교육 훈련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진다. 이로써 견습 직업훈련소는 직업교육 특유의 문화가 형성되는 토대를 마련한다. 노동자의 연대망이 형성되고, 노동윤리관이 정립되고, 직업자격증을 사회적으로 공인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한편, 대외개방적인 직업교육 문화가 형성된다. 사실상 학교의 생산직·사무직 노동자 양성교육이 성공을 거둔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학교의 직업교육 훈련을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프롤레타리아 교육이자 민중 노동자 교육, 내지는 계급교육’(2)으로 인식한 노동총연맹(CGT)과 공산당 당원들,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재건을 위해 하루 빨리 숙련된 노동력을 확보하는 게 절실했던 유력단체 금속산업연합(UIMM) 등을 필두로 한 기업경영자들이 서로 의기투합해 이뤄낸 결실이었다.
벨 에포크, 즉 ‘영광의 30년(1945~1975년)’이라 불리는 전후 경제호황기 동안 직업교육의 앞길에는 장밋빛 미래가 펼쳐져 있는 듯 보였다. 학교의 직업교육 훈련이 인기몰이를 하면서, 기업 차원의 직업교육 훈련 프로그램은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추락했다. 가령 1975년 직업자격증을 준비하는 전체 청소년 가운데 기업 차원에서 직업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밟는 학생은 기껏해야 19%에 불과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돌연 상황이 급변한다. 이 시기부터 직업고등학교는 고유의 직업교육 문화를 존속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 이미 직업고등학교는 1967년 입학시험제도가 전격 폐지되면서 낙오된 학생들이나 밟는 전형적인 열등생 교육코스로 전락한 터였다. 여기에 1966년 BEP(직업교육수료증) 신설로 우수한 학생들이 ‘대학입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을 준비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직업고등학교의 추락은 더욱 심화됐다.
재정적 인센티브와 좌파(1987, 1993년)와 우파(1992년)가 잇따라 실시한 개혁에 힘입어 ‘직업교육 실시 기업’이 새로운 대세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덕분에 기업의 직업교육이 다시 활기를 되찾는다. “‘노동계약 하의 직업교육 훈련’이나 학업과 취업을 병행하는 ‘순환직업교육’이 얼마나 현대적이고 혁신적이며 차별화된 교육 개념인지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2002년 상공회의소 상임위원회 초대 부위원장이었던 미셸 드레아노는 니콜 페리 여권 및 직업교육부 장관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현대적’이고, ‘혁신적’이며, ‘차별화된’ 개념이다. 이것만으로 이미 게임은 끝났다. 학교 직업교육의 위상은 가차 없이 추락했다.
‘평생교육', 그 이면에 숨은 불편한 진실
1987년 이후 기업의 직업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의 종류(CAP(직업적성자격증)에서 기사자격증(그랑제콜 졸업 후 취득 가능-역주)에 이르기까지)가 더욱 늘어났다. 기업의 직업교육 훈련 프로그램은 사상 초유의 양적 성장을 기록했다. 가령 2000년 대학입학자격에 준하거나 혹은 그 이하의 자격에 해당하는 직업자격증을 준비하는 학생들 가운데, 기업의 직업교육 코스를 밟는 학생 수가 3분의 1로 치솟았다. 1985년 대비 무려 10%포인트가 증가한 수치였다. 반면 직업고등학교(LP)의 학생 수는 1985년 이후 줄곧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1997년에 이르러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학교중시파’가 위세를 떨치면서 직업자격증의 공인 능력도 치명상을 입었다. 먼저 단체협약에서 표준 기준이 된 ‘직무자격 분류기준표’로 인해 이제는 입사자가 취업 시점에서 직업자격증에 해당하는 직무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또한 노동자 개개인이 직업자격증을 취득하면 그에 걸맞은 차별화된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도 퇴색됐다.(3) ‘학교중시주의’가 득세하면서, 청소년 직업교육을 순전히 취업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새로운 직업교육관이 등장했다. 이미 2000년대 초에도 금속산업연합(UIMM)이 직업계 바칼로레아(bac pro)를 ‘취업의 문을 여는 바칼로레아’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 역시 훗날 ‘취업지상주의’라고 부를 새로운 직업교육관이 반영된 현상이었다. 사실상 금속산업연합(UIMM)은 홍보캠페인에서 바칼로레아 자격증의 기능을 오로지 취업의 수단으로만 한정했다. 그 결과 직업계 바칼로레아가 아닌 기존의 (문학, 과학, 경제 및 사회, 조형미술, 과학 및 기술 등과 같은) 다른 계열의 바칼로레아, 더 나아가 좀 더 종합적인 학문들에는 모두 불필요한 잉여 세계, 한 마디로 실업과 동일한 세계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이런 ‘취업지상주의’적 사고는 더 넓게는 초기 직업교육의 위상이 오로지 취업이나 혹은 어떤 특별한 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추락한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 이런 새로운 사조는 상당히 다양한 차원에서 형성되고 있다. 먼저, 취업현장에서는 해당 직무에 적합한 지원자를 선별하는 기준으로 취득 자격증보다 정신자세, 더 정확히는 행동자세가 더 우선시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역량, 의욕, 경험 등 정확하게 규정짓기 힘든 어떤 모호한 개인적 개념들을 중요시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하지만 실상 이런 개념들은 결국 그 이면에 경영자의 명령에 순응해야 한다는 요구만을 감추고 있을 뿐이다.
둘째, ‘평생에 걸친 교육’이라는 개념이 확산되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모습으로 리모델링한 계속교육의 또 다른 이름인 평생교육이 마치 만병통치약인 양 소개되고 있다. 물론 평생교육은 어쩌면 우리에게 눈부신 유토피아가 되어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와 동시에 학교와 국가가 청소년 초기직업교육을 책임져야 할 의무로부터 벗어나도록 부추길 위험도 있다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교육을 받을 수 있는데 굳이 힘들게 청소년기에 교육을 하려 안달할 이유가 무엇일까?
결국 이러한 현상은 생산과 취업을 교육 그 자체보다 더 우선시하는 경향을 만들어내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교육을 고용에 선행하는 조건으로 이해하던 유서 깊은 경향도 완전히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시민과 노동자 중에 유일하게 남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뿐일 것이다. 그러면 최상의 경우 우리는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정도, 혹은 최악의 경우 그저 자신의 직무에 일시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잠시 잠깐 기를 쓰는 정도에 그치고 말 것이다.
글·질 모로 Gilles Moreau
사회학자. 낭트 대학 조교수로 <견습생의 세계(Le Monde apprenti)>(라디스퓌트출판사·파리)를 저술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Ferdinand Buisson, 1887년.
(2) CGT 간사 르네 지라르가 1946년 노총대회에서 한 선언.
(3) Pascal Caillaud, ‘직업자격증 : 노동시장에서 어떤 법률적 가치를 지닐까?(Le diplome professionnel : quelle valeur juridique sur le marché?)’, <경영자, 국가 그리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교육(Les Patrons, l'Etat et la formation des jeunes)>, 질 모로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