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앞에 기진맥진한 불가리아

2013-12-10     로랑 게슬랭


불가리아에선 거의 1년째 시위대의 시위가 지속되고 있다. 지난 5월, 부패정치에 분노한 국민들의 시위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당 정부가 들어섰다. 유럽연합(EU)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의 시위대는 일자리와 더 나은 임금 그리고 법치국가의 존중을 요구하고 있다.

불가리아 남부 로도피 산맥의 숲의 우거진 측면들이 잘려나가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스몰랸 주거 단지와 이어지는 소련 외곽도시들이 들어섰다. 장정들이 스몰랸 고지대에 위치한 우스토보 구역에서 녹슨 자동차 뼈대의 부품을 뜯어내고 있고, 몇몇 집시 아이들은 먼지구덩이 속에서 놀고 있다. 한 노인이 담배 한 대를 깊숙이 빤 다음 고개를 끄덕이더니, 건물 문에 붙은 부고장을 응시하며 입을 뗀다. “문제…. 암, 그 사람 문제가 있었지.” 벤트시슬라브 코자레프는 47세였다. 2013년 5월, 그는 플로브디프 도청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해 몸의 85%가 불에 탄 채 사망했다.

연기가 자욱한 작은 방에, 가족들이 장례식 전야를 보내기 위해 모였다. 작은 탁자 위엔 양초가 타고 있고, 회벽엔 성상(聖像)이 하나 걸려 있다. 모인 가족들이 조용히 묵상한다. 신문기자 미하이리나 디미트로바가 전한다. “벤트시슬라브 코자레프는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실업자였죠. 이들 부부가 더 이상 아이를 건사할 수 없게 되자, 사회복지기관에서 아이를 데려갔어요. 그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자살했어요.”

2013년 초 이후, 불가리아에서 코자레프와 같은 방법으로 사망한 이는 최소한 9명이나 되고, 화기(火器)를 이용한 자살이나 창문 투신자살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8월 중순, 마케도니아 국경에서 채 몇 킬로도 떨어지지 않은 플로스키 마을의 한 여성(77세)이 자신의 집에서 불에 탄 채 이웃들에게 발견되기도 했다. 전례 없는 이 같은 현상에 불가리아 그리스정교는 침묵을 깼다. 지난 3월 14일, 네오피트 대주교는 “간곡컨대, 젊은이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죽음의 외침,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1980년대, 불가리아는 동유럽권에 IT 시스템과 소형 컴퓨터를 40% 이상 공급하며 ‘코메콘(Comecon)(1)의 실리콘 밸리’로 불렸다. 이런 제품 생산은 로도피 지역에 특히 집중됐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스몰랸의 부를 창출하던 전자 공장들은 하나씩 문을 닫았다. 현재, 이 지역에서 가동되고 있는 산업체는 전무하다. 3만 2천명의 도시 주민 중 1만 2천명이 실업 상태이다. 겨울 동안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호텔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그것만으론 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 스몰랸시 시장 겸 불가리아 사회당(BSP)의 국회의원인 도라 얀코바는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이곳은 불가리아에서 방치된 변방입니다. 대도시인 플로브디프에 가려면 험한 산길을 수 시간 가야 하죠. 복지 상황은 최악이고요. 스몰랸 주민들은 들고 일어나던 습관마저 상실했어요. 빈번한 자살은 절망의 제스처인 셈이죠.” 

2007년에 유럽연합(EU) 회원국이 된 불가리아는 거시경제의 긍정적인 지표를 들먹이며 우쭐댔다. 2012년, 유럽통계청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 불가리아의 국가 재정은 건전하다. 그리고 공공 부채비율도 국내총생산(GDP)의 18.5%대를 유지하고 있어, 37.8%와 157%의 공공 부채비율을 기록 중인 루마니아와 그리스에 비해 건전하다. 연구원 나데주 라가루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한다. “1997년, 국제 통화기금(IMF)이 통화수급에 개입한 이후, 공공계정이 철저히 관리됐습니다. 건전성 조치가 취해지고, 은행들은 민영화됐죠. 2008~2009년, 경제위기가 닥칠 때까지 정부는 흑자 예산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EU의 긴축조치로 인해, 주요 금융기관들이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공식 집계된 실업률이 경제활동 인구의 12%(젊은층의 30%)에 달하고, 2009년 이후, 임금과 연금은 동결되고, 60만 가구가 한 달에 100유로 미만으로 살고 있다.


일관성 잃은 ‘잡탕' 정부

불가리아 노동총연맹(Podkrepa)의 올레그 추로프가 덧붙여 말한다. “대략 20%의 인구가 빈곤 수준 임계선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들어선 불가리아 정부는 공직인력을 감축했죠. 이들 정부는 인력 경쟁력에 기반을 둔 투자자들에게 유리한 재정정책을 실시했어요. 따라서 최저임금은 매우 낮아 대략 월 140유로고, 평균 월급은 370유로를 넘지 않습니다. 현재 상위 20%의 부자들이 하위 20%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6~7배나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1990년엔, 이들 두 그룹 간 빈부 격차는 2.4배에 불과했다.
지난 12월 조기총선을 치러 정권을 잡은 BSP는 과거 세르게이 스타니셰프 정부, 즉 올해 유럽 사회당(PSE) 의장으로 당선된 불가리아의 전직 사회당 당수(2005~2009)가 이끌던 연립정부가 자유주의 경제노선을 도입해 누진세도 적용하지 않고 모든 임금에 대략 10%의 세금을 인두세(일률과세)처럼 부과했다는 것을 너무 빨리 망각한 채, 이 같은 자유주의 경제노선을 걷겠다고 약속했다.경제에 해가 되는 이러한 조처로 인해 2013년 초반, 국민들은 전기 요금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시메온 드삭세 고타 전 총리(2001~2005) 정권하에서 민영화된 국가 네트워크는 불가리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민간업체 3곳, 즉 체코의 두 전력회사(CEZ와  Energo-Pro)와 오스트리아 전력회사(EVN)로 넘어갔다. 지난 1월의 가구당 평균 전기 요금은 100유로를 상회했다. 이 금액은 주민 대부분이 해결하기 힘든 큰 액수이다. 이 여파로, 가난에 내몰린 수천 명의 주민들이 대도시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가두시위는 곧 정치시위로 변했고, 시위대는 경제적 이득과 결탁한 EU와 현지 의원들의 부패와 범죄를 싸잡아 규탄했다.

2013년 3월, 대중 봉기의 폭발력을 감지한 인기영합주의 총리인, 과거 공산주의 독재자 토도르 지브코프의 경호원과 소피아 시장(2005~2009)을 역임한 바 있는 보이코 보리소프는 7월 총선을 몇 개월 앞두고 사임을 발표했다. 이 같은 기회주의적인 전략이 성과를 거두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가 이끄는 정당, 불가리아 유럽 발전 시민당(GERB)은 조기총선에서 30%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여당이 되기엔 충분하지 못했다. 몇 개월간의 협상 끝에, 불가리아 사회당(BSP)과 터키 소수민족 정당인 권리자유운동(DPS)이 서로 연합해 의석 240석 중 120석을 확보해 위태로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이들은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극우당인 아타카당(Ataka)과 2006년 ‘집시들을 소탕하자’ 고 호소한 바 있는 이 당의 당수 볼렌 시데로프의 측면 지원도 받았다.

유권자들은 이러한 잡탕 연립정부에 최소한의 일관성을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여론기관들은 불가리아 국회가 이번에 출범한 42대 국회만큼 초기에 강한 불신을 받은 적이 결코 없었다고 했다. 국가 여론조사센터에 따르면, 새로 출범한 국회는 65%의 부정적인 여론과 함께 5년의 새로운 임기를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삶의 여건에 만족한다고 답변한 주민은 단지 3%에 불과했다. 이 수치는 경제적 고충을 반영하는 데다, 특히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불가리아 좌파 연맹 비정부기구(NGO)의 일원인 이보 흐리스토프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한다. “불가리아 의회체제는 붕괴 직전이다. 공산체제의 몰락 이후, 마피아 조직과 연루된 정치지도자들이 모든 경제 동력을 장악했다. 대안정책은 이데올로기적인 변혁을 가져오기보다는 단순히 이러한 과두제의 재편성만 가져왔다.” 

2000년대 내내, 우파 정치판엔 새로운 정당들이 등장해 반부패 담론으로 유권자들을 결집시켰다. 1996년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옛 왕, 시메온 드삭세 고타는 국민운동당을 창당해 2001년 총선을 승리로 이끈 뒤, 2005년 사회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 다수당은 2009년 총선에서 보이코 보리소프가 이끄는 GERB에 참패했다. 지난 10년 동안, 정치적 균형을 위한 정치판의 상시적 재편성은 다양한 성향을 지닌 정당들의 극단적인 결집으로 이어졌고, 이렇게 결집된 정당들은 선거판에 맞게 진화했다. 라가루가 다시 한 번 지적한다. “정치지도자들의 신뢰도는 특혜성 거래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크게 좌지우지 되고 있다. 이들이 공산주의 시대 때 공공자원에 편성되었던 재산을 차지해 재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차 정치 지망생과 정치적 성향을 지닌 기업 간 독특한 관계(정경유착)가 정착됐다. 흔들리는 표심에 정치인들이 덩달아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예컨대 정치인들이 유권자와 정당지도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며, 자신들의 정치성향과 이데올로기 노선을 순화시키고 있다.”

무력한 정부를 대체하는 마피아 그룹

사실, 많은 옵서버들은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인접국 러시아와의 관계가 불가리아 정치계에서 계속 대두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보리소프를 지지하는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최근에 치러진 원전 건설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수포로 돌아간 것에 불만이다. 이들은 또한 2013년 2월, 불가리아에서 대규모 시위가 터지며 정치적 위기를 맞았는데, 그 배후에 러시아가 있을 것이라 여긴다. 실제로 지난 1월 27일, 대다수의 투표자들은 “불가리아는 새로운 원전 건설을 통해 자국의 에너지를 개발해야 할까?”라는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투표율이 저조해 국민투표는 무효처리 됐다. 원전프로젝트, 즉 세르게이 스타니셰프 정부 (2005~2009) 때 지원했다가 2012년 3월 보리소프 내각이 포기한 이 프로젝트는 불가리아 북부, 벨렌에 러시아가 주도하는 새로운 원전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지역 및 국제 연구소(IRIS)의 소장, 정치학자 오그니언 민체프가 강조한다. “사회당은 항상 모스코바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벨렌 프로젝트는 불가리아 정치 무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불가리아를 유럽의 대서양 동맹으로부터 떼어 놓으려는 러시아의 도구이다.”

불가리아 사회당이 재집권한 이후, 모스코바는 또한 경쟁 원전 프로젝트인 유럽의 나부코(Nabucco) 프로젝트를 불가리아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불가리아 영토에 러시아 사우스스트림(South Stream) 가스관을 건설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7월 8일, 플라멘 오레샤르스키 불가리아 총리는 러시아의 국영 천연가스 추출 기업인 가스프롬(Gazprom)사의 사장, 알렉세이 밀러를 성대히 맞았다. 밀러는 가스관 건설이 고도의 자격을 갖춘 2500명의 엔지니어 고용과 35억 유로의 직접투자를 유발시킬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불가리아 정치계가 원전을 지지하는 친(親)러 성향의 사회당과 원전반대세력인 반(反)러 성향의 우파로 양분될 걸까? 이에 대해 흐리스토프는 짤막하게 답변한다. “에너지는 모든 정치계의 젖소(계속적인 이익추구가 가능한 대상-역주)예요. 이 부문의 부패는 구조적인 문제인 거죠. 그리고 모든 정당이 침묵의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주요 항구인 바르나에, 동이 트자마자 구경꾼들이 슬리브니차 대로변에 있는 카페테라스로 모여든다. 공산체제 때, 조선소와 섬유산업 덕분에 강력한 산업 중심부였던 바르나는 여전히 불가리아에서 가장 번성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바르나는 국민총생산(GNP)의 15%를 달성하며, 실업률도 4%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지난  겨울, 분노한 시민들이 자발적인 시위를 벌인 곳이다. 2013년 2월 20일, 36세의 남성, ‘불꽃’이란 이름을 지닌 플라멘 고라노프가 시청 앞에서 분신자살하며 반정부 시위의 상징적인 순교자가 됐다. 자신의 가방에 고라노프의 이미지 스티커를 부착한 젊은 여성 예술가, 마리아가 말한다. “우리는 전기요금과 20년째 마을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마피아에 항의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장은 사임했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어쨌든 올 겨울에 지핀 시위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4번이나 당선되며, 14년 동안 절대 권력을 누리던 키릴 요르다노프는 지지 세력인 GERB로부터 버림받고, 2013년 3월 6일, 강제 사임당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역 신문의 기자는 “요르다노프는 집권당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협상하던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이 도시의 진짜 주인들은 불가리아의 많은 지역들이 그렇듯 마피아 그룹, TIM죠.”라고 말한다. 마피아 그룹, TIM은 세 명의 창업자(Tihomir, Ivo, Marin)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전직 해군 특공대 출신인 이들은 암울한 정치적 전환기인 1990년대에 바르나에 등장했다. 이 당시, 국영기업들은 새로 들어선 친정부 세력에 헐값에 팔려 민영화됐다. 그가 덧붙여 말한다. “당시만 해도 불가리아는 다양한 범죄 집단들이 서로 다투며 좌지우지했죠. 하지만 TIM 창설자들은 무장한 채 젊은 여성들과 클럽을 드나드는 여타 범죄 집단과 다르게 항상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래서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불가리아의 가장 강력한 경제세력 중 하나로 거듭난 거죠.” 현재는 TIM의 재산 목록을 작성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처럼 보인다. “이들은 체르노 모레와 같은 텔레비전 채널을 비롯한 미디어와 중앙협동조합은행 그리고 국영 항공사인 불가리아항공도 소유하고 있고, 부동산에도 투자하고 있습니다. 또 바르나, 부르가스, 소피아 공항의 지분도 가지고 있고요. 아무도 이들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어요.”

아랍혁명에 견줄 만한 혁명은 가능할까

이곳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나라마다 마피아가 있다. 하지만 불가리아의 마피아는 하나의 국가다.” 국제 투명성 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지난 12월에 발표한 국가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불가리아는 세계 176국 중 75위에 링크돼 그리스를 제치고 유럽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로 평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헬싱키 위원회(Comité d’Helsinki)는 불가리아 정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경제동력을 장악한 채 법에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서비스를 위해 프로파간다를 일삼는 강력한 민간업체들이 국회의 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2) 지난 6월 14일 총선이 끝난 직후, 위험한 인물로 정평이 나 있는 사업가 델얀 피브스키가 국가의 부패 방지를 책임지는 국가안보국(DANS)의 수장으로 임명되자,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났다. DPS의 국회의원이자 미디어 재벌인 피브스키는 2006~2007년 사이에 터진 불가리아 난방 프로젝트(Toplofikacija) 사건(3)처럼 정치마피아가 연루된 수많은 사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리의 분노에 직면한 국회는 서둘러 수습에 나서, 피브스키의 임명을 철회했다. 6월 19일, 심지어 오레샤르스키 불가리아 총리는 “이 같은 정치적 실수”(4)에 대해 대국민 공개사과문까지 발표했다. 총리가 이러한 자책과 함께 지난 7월 30일 전기요금을 내리겠다고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난 불가리아 민심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6개월간의 시위와 대안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를 강타하고 있는 사회적 위기는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름 내내, 거리 시위대는 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국민투표를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7월 23일 밤에 국회 주변에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2천여명의 시위대는 건물 안에 있던 3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볼모로 잡은 채 “마피아는 물러나라”고 외쳤다. 추위가 다시 닥치고 비싼 겨울철 전기요금이 부과되면 시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불가리아 사회는 2011년 아랍 국가들을 뒤흔들었던 것과 견줄 만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있는 것일까? 20년 동안 전환기를 거치는 동안 불가리아는 기진맥진해 있고, 인구 통계학적으로 매년 생기를 잃고 있다. 지난해 인구는 5.5%가 감소했다. 1990년 870만 명이던 인구는 2012년 730만 명으로 줄었다. 공산주의 시대 때, 소비에트 연방의 16번째 공화국처럼 간주되던 불가리아는 이제 EU가 지시하는 자유주의 정책을 또박 또박 수행하며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의 운명을 자기 뜻대로 좌우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시위대가 뜯어 고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글•로랑 게슬랭 Laurent Geslin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경제 상호 원조 회의, 공산 진영에서 마셜 계획에 대응하여 소련ㆍ동유럽 국가 간 경제 협력과 부흥을 목적으로 결성한 조직.
(2)  Cf. Alexandre Levy, ‘정치계의 반부패 투쟁에 나선 불가리아인들’, <르피가로>, 파리,  2013.06.19.
(3) Ragaru Nadège, <불가리아 반부패 투쟁의 용도와 힘을 느끼게 한 사건, 불가리아 난방 프로젝트(Toplofikacija)>, Droit et Société, vol. 72, n° 2, 파리, 2009.
(4) Cf. ‘미디어 재벌 델얀 피브스키를 낙마시킨 성난 거리 시위대’, <발칸통신>, 2013.06.20. http://balkans.courriers.info.



라이벌 형제,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남서부 블라고에브그라드에서 약 50km 떨어진 작은 관광도시 반스코의 총선 전날 풍경이다. 몇몇 구경꾼들이 시청 앞에 모여 있다. 배가 불룩 나온 경찰관들이 투표함을 투표소로 옮기고 있다. 인근 카페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이반 스토야노프가 웃으며 말한다. “우리 당의 정치 노선은 1893년 창당 이래 바뀌지 않았습니다. 국내외 모든 불가리아인들을 보호하는 것이며, 불가리아인들을 희생시키는 동화정책을 규탄하는 것입니다.” 사내는 대머리에 노동자의 강인한 손을 가졌다. 그는 마케도니아 내의 혁명조직, 이른바 불가리아 민족운동단체(VMRO-BND)의 일원이다.
보수 성향과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이 작은 단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오스만 제국의 군대와 맞서 싸운 발칸반도의 게릴라, 코미타지(komitadji)의 후손을 자처한다. 이들은 “모든 불가리아 영토의 통합”을 위해 투쟁한다. 2008년, 이들의 수장인 역사학자 크라시미르 카라카차노프는 자신들의 노선을 명확히 밝혔다. “알바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그리스, 루마니아, 세르비아, 진짜 발칸반도 국가들이 발칸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합니다. 마케도니아는 비현실적인 국가예요. 마케도니아인은 국민의 대략 25%에 불과하고, 25%는 불가리아인 그리고 나머지 50%는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은 티토(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정부가 개발한 프로파간다를 현 스코페(마케도니아의 수도) 당국이 추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일 뿐이죠.” 
발칸전쟁(1912~1913년) 이후, 서양 지리학자들이 19세기 “역사 속에서 마케도니아라 지칭”했던 영토,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었던 영토는 세르비아, 그리스, 불가리아로 분할됐다. 이전의 동맹국인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패한 소피아는 자신이 주장한 영토의 극히 일부분만 수복했다. 예를 들면, 피린 마케도니아(Macédoine du Pirin)는 현재 불가리아의 블라고에브그라드 행정구역에 속하는 지역이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서의 패전과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그리고 1991년 마케도니아가 독립하자, 불가리아 정치지도자들은 이웃 나라인 마케도니아를 대상을 민족통일운동을 더 이상 펼칠 수 없게 됐다. 양국 간 외교관계는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소피아는 마케도니아 국민과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고대 마케도니아 간 직접적인 역사적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니콜라 그루예브스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역사적인 회귀’ 정책을 고깝게 생각하고 있다.
불가리아는 또한 1945년 공산주의 체제 때 성문화된 마케도니아어의 공식 인정을 거부한 채 불가리아 지역의 방언처럼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양국 국민들은 이러한 정체성 논란에 관심이 없다. 10여명의 사람들이 소피아에 위치한 불가리아 외무부 여권과에 들어가기 위해 건물 앞에서 줄서서 기다리고 있다. 마케도니아 비톨라 출신인 브론코가 입을 연다. “독일에서 유학하고 싶어 하는 조카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유학엔 불가리아 여권이 훨씬 유리하죠.” 2007년, 불가리아가 EU에 편입되고 특히 2011년, 일부 EU 국가들이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노동시장을 개방하며, 불가리아로 귀화하는 마케도니아 국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불가리아 법무부가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불가리아로 귀화한 마케도니아인 수는 2009년 4300명에서 2011년  1만 1200명으로 증가했으며, 전체 귀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귀화 절차는 아주 간단하다. 해외 불가리아 국가기관에서 ‘불가리아계’ 인증서를 발급받아 제출만 하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귀화 절차에 마케도니아는 동화정책이라며 발끈하고 있다. 심지어 마케도니아의 전 총리(1998~2002), 류브초 게오르기에브스키마저도 불가리아 국적을 취득하며 모든 정치계의 공분을 샀다. 스코페가 향후 EU에 가입하기 위해선 먼저 인접국들과의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마케도니아를 국명으로 사용하며 이 문제로 그리스와 이미 마찰을 빚고 있는 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와의 정체성 문제도 극복해야 한다.


불가리아 지표

- 국토 면적 : 111000㎢
- 인구 : 1990년 870만 명에서
 2011년 730만 명으로 감소
- 기대수명 : 74.16년(2011년)
- 주요 정당
* 아타카당 : 2005년 출범한 극우정당으로 소수민족(터키와 집시)들이 지나치게 많은 권리를 누린다고 여긴다. 또, 불가리아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가입에도 반대했으며, 그리스정교회의 역할 강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당수는 창당자인 전직 기자 출신 볼렌 시데로프이다.
* 불가리아 유럽 발전 시민당(GERB) : 2006년 소피아 시장, 보이코 보리소프가 창당한 보수당이다. 유럽의 대서양 동맹을 지지하며 친유럽 정책을 펼치는 이 정당은 유럽인민당의 회원 정당이다.
* 터키 소수민족의 권리자유운동(DPS) : 자유주의 정당으로서 터키 소수민족(대략 인구의 8%를 차지함)을 대변하고 있다.
* 국가의 안전과 발전을 위한 국민운동당(NDS) : 1943년부터 1946년까지 불가리아 국왕을 역임한 시메온 2세가 2001년 창당한 정당이며, 2007년까지만 해도 시메온 2세 국민운동당으로 불렸다. 자유주의 노선을 선택한 이 정당은 유럽자유민주개혁당(ELDR)의 회원정당이다.
* 불가리아 사회당(BSP) : 1990년까지 불가리아를 이끌던 불가리아 전 사회당을 계승하는 정당이며, 사회민주주의를 노선을 채택한 BSP는 유럽사회당의 회원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