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중남미를 망친 신자유주의를 답습”

에콰도르 대통령의 작심발언

2013-12-10     라파엘 코레아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은 지난 11월 6일 소르본 대학에서 강연회를 열고
유럽의 금융위기 대응 방식에 대해 유럽 정상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유럽이 오로지 금융권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조치만 취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코레아 대통령은 그의 생각을 요약해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했다.

중남미 사람들은 위기 전문가들이다. 더 영리해서가 아니라 위기란 위기는 모두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에 대처하는 데는 실패했다. 지역이 장기적인 위기에 빠지든 말든 우선순위를 자본의 이익을 수호하는 데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가 걸었던 길을 유럽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우려가 앞선다. 중남미의 과도한 대외부채 문제는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 정권의 ‘무책임한’ 정책과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 있듯이 2차 세계대전 후 중남미 국가들이 채택한 경제발전 모델인 ‘수입대체산업화(ISI)’(1)가 대외부채 문제를 초래했다. 

실제로 중남미의 ‘외채' 문제는 국제금융기구가 조장하고 강요한 것이었다. 당시 그들의 논리는 제3세계에 넘쳐나는 고수익 개발 프로젝트에 투자하면 채무국은 경제발전을 할 수 있고 해외투자로 생긴 수익으로 채무를 상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는 1982년 8월 13일 멕시코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때까지 유효했다. 그날 이후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해외차관이 중지되었고 채무이자는 급격하게 치솟았다. 4~6% 변동금리로 차관공여 계약을 맺었던 것이 20%로 뛴 것이다. “은행은 날이 맑을 때 우산을 빌려줬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우산을 거둬간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중남미 비극의 씨앗은
‘극단적 정책'

이렇게 시작된 중남미의 ‘외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심각해졌다. 중남미 국가들은 80년대 10년 동안 1950억 달러(현 가치로 약 5540억 달러)의 빚을 채권국에 상환했지만 외채규모는 오히려 1980년 2230억 달러에서 1991년 4430억 달러로 상승했다! 새로운 차관 때문이 아니라 재융자(refinancing)와 이자 때문이었다. 그 결과 중남미 국가들의 1980년대 말 1인당 국민소득이 1970년대 중반과 동일한 수준에 머무르는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해야 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잃어버린 시간은 10년이 아니라 한 세대인 30년이었다.

이에 대한 책임 소재가 여러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국가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미주개발은행(IDB)과 같은 관료적인 국제기구들은 물론이거니와 민간은행들은 중남미 국가의 위기를 외채 문제(과다차입)로 규정했다. 하지만 무책임한 차관공여(과다대출)와 관련한 자신들의 역할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중남미 국가들은 채무 상환으로 심각한 재정적자와 외채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통화기금이 강요한 ‘의향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강제적인 협정에 서명을 해야만 IMF로부터 차관을 제공받을 수 있었고 파리클럽의 채권국들과 채무조정 협상을 할 때 IMF의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

IMF가 제시한 구조조정 계획은 긴축재정, 공공서비스 가격 인상, 민영화라는 언제나 동일한 처방이었다. 그런데 이들 조치의 최종 목적은 신속한 위기 탈출이나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민간금융권에 채무상환을 보증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관련국들은 빚을 갚아야 할 대상이 민간은행에서 국제금융기구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부채에 허덕였다. 

1980년대 초반부터는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경제개발 모델이 중남미 국가를 포함한 전 세계에 강요되기 시작했다. 미 재무부처럼 신자유주의를 기획하고 주창한 주요 기구들의 본부가 워싱턴에 있기 때문에 ‘워싱턴 컨센서스’라고도 불리는 이 경제개발 모델은 중남미의 경제위기를 당시 유행했던 논리인 경제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 적절한 자유가격 정책의 부재, 국제시장과의 격리에서 비롯됐다고 규정했다. 다시 말해 ‘수입대체산업화’라는 중남미 국가의 경제발전 모델이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로 포장한 신자유주의의 전례 없는 대대적인 마케팅 캠페인과,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직접적인 압력 때문에 중남미 지역은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가는 정책을 실시해야 했다. 시장에 대한 불신과 정부에 대한 과도한 신뢰에서 이제는 자유무역, 규제완화, 민영화로 옮겨가야 했다. 

실패를 ‘재생산'하는
유럽국가들

위기는 경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정치지도자들의 무능력과 아이디어 부재의 위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수동적으로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강요한 결정을 받아들인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에콰도르가 경험했던 위기(‘에콰도르의 선례’ 박스기사 참조)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현재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얻은 과도한 외채로 고통 받고 있다. 각 지역의 독립성과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선진국인 유럽이 중남미 국가들이 저지른 실수를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에 차관을 제공한 유럽은행들은 그리스의 재정적자가 그리스 정부가 발표한 규모의 거의 세 배에 이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못 본 척했다. 유럽의 경우에도 과도한 부채 문제가 원인으로 제기되었지만 동전의 뒷면인 과도한 차관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마치 금융권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2010년과 2012년 사이 유럽의 실업률은 우려할 수준이었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아일랜드, 스페인은 2009~2010년 재정지출을 평균 6.4% 감축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분야는 의료와 교육 분야였다. 세입이 없기 때문에 예산을 감축하는 것이라고 정당화했지만 금융부문을 지원하는 데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투여했다. 포르투갈, 그리스, 아일랜드에 공여한 ‘구제금융’의 규모가 연봉총액을 넘어설 정도였다. 그런데 여러 국가에서 실패한 처방책이 또 다시 금융위기로 고통 받고 있는 유럽 국민들에게 강요되고 있다. 키프러스의 예를 들어보자. 키프러스의 위기도 금융부문의 규제완화로 시작되었다. 2012년 키프러스 금융 분야는 더 이상 유지가 힘들 정도로 부실이 심각했고 키프러스 은행과 라이키 은행을 포함한 키프러스의 은행들은 그리스에 키프러스의 국내총생산(GDP)보다 큰 규모의 민간차관을 제공했다. 그리고 2013년 4월 금융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 유럽중앙은행, 유럽위원회)는 키프러스에 100억 유로의 구제금융 투여를 결정했다. 조건으로 공공분야 감축, 신임 공무원에 대해서는 분담금을 기반으로 한 연금제도 폐지, 전략적 공기업의 민영화, 2018년까지 긴축재정 유지, 사회복지 예산 감축, 10만 유로 이상의 예금을 동결하는 것을 비롯해 금융부문을 지원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금융구제기금’ 창설을 요구했다. 

의도된 최악의 ‘시나리오',
왜 반복되는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 임금이 반영되지 않는 매우 상이한 생산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원천적인 실수를 포함한 중대한 실수들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도 모두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 정책은 여전히 최소한의 비용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민간금융권에 진 빚을 상환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외채위기를 겪은 나라들에 대해 얘기했다. 그렇다면 빚을 갚을 능력이 안 되는 개인들은 어떤가? 스페인의 예를 들어보자. 금융규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스페인에서는 너무 쉬운 은행 대출로 주택 담보대출과 부동산 투기가 양산되었다. 은행 스스로 고객을 찾아 나섰다. 주택의 가치를 계산해주고는 차, 동산, 전자제품을 더 사라고 대출해주었다.(2) 하지만 부동산 거품이 터지자 선의의 대출자들도 부채를 상환할 수 없게 되었다. 은행은 주택을 압류했고 주택가치가 구매가에 미치지 못해 사람들은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그리고 평생 빚을 안고 살아야 했다. 2012년에는 매일 200명의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스페인의 높은 자살율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왜 확실한 처방약을 쓰지 않고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만 반복하는가? 문제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역학관계가 작용하는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누구인가? 인간인가, 자본인가? 저들이 경제에 가한 최대의 해악은 경제정책에서 경제를 제거하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이 기술적이라고 믿게 한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과학으로 포장하고 역학관계를 빼고 생각하라고 우리를 부추기고 내가 ‘자본의 제국’이라고 부르는 지배세력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이용했다. 중남미에 위기를 초래한 과도한 외채는 중남미의 발전이 목적이 아니었다. ‘제1세계’의 금융시장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투자할 곳을 긴급하게 찾는 것이었다. 아랍 석유산유국들이 선진국 금융권에 오일머니를 대량 투하했기 때문이다. 이 돈은 1973년 10월 전쟁(제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인한 석유가격 인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석유수출기구(OPEC)는 의도적으로 석유가격을 지속적으로 높게 유지했다. 1975~1980년 국제 금융권에 예치된 금액은 820억 달러에서 4440억 달러(현재시가로 1조 2600억 달러)에 달했다.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투자할 곳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제3세계 국가’였다. 국제 은행들의 돈이 1975년부터 차관 형태로 제3세계 국가로 흘러들어가서 경상지출에서 군사정권이 무기를 구입하는 데까지 투자되었다. 열성적인 은행가들은 관광으로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중남미에 뇌물이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 와서 더 많은 돈을 빌리라고 공무원들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동시에 국제금융기구와 개발기구는 차관이 해결책이라고 열심히 선전해댔다.   

변질된 유럽 중앙은행의 역할

중앙은행이 정권의 변화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시스템을 보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기술적’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이 필요성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거시경제에 더 좋은 결과를 낸다는 소위 경험에 근거한 연구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 ‘연구’에 따르면 중앙은행이 독립성을 유지해야 정치적 압력과 관계없이 ‘기술적’ 방식으로 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같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따라야 한다면 재정정책 역시 전적으로 ‘기술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재무부도 독립시켜야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날드 코우즈가 설명한 것처럼 이 연구의 결과는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할 때까지 계속해서 자료들을 짜내서 얻어낸 것이다.

외채위기가 있기 전까지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임무는 통화 안정이었다. 물론 중앙은행이 일본이나 한국 같은 나라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지만 주된 임무는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미연방준비위원회의 기본목표는 일자리  창출과 경제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70년대 초 인플레이션의 압력이 높아지면서 물가 안정이 목표에 추가된 것이다.

물가 안정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은 실제에서는 경제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정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지속적인 긴축재정은 경제침체와 실업상승 위기를 완화하는 대신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소위 ‘독립적’이라는 중앙은행이 오로지 통화 안정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그리고 유럽이 신속하게 위기를 탈출하는 것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다행히 유럽의 역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유럽은 인적자원과 생산성, 기술 모두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서 강력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사회적 조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요에 기반을 둔 경제정책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책은 국내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역학관계가 자본 특히 금융에 우호적이기 때문에 실행할 수 없거나 실행되더라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소위 경제학이라는 것과 관료적인 국제기구에 세뇌되어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글·라파엘 코레아  Rafael Correa
에콰도르 대통령. 경제학 박사. <바나나 공화국에서 비(比)공화국으로. 2013, Paris, Utopia> 저자

번역·임명주

(1) 수입대체산업화는 원료를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입하는 전통적인 식민시대의 경제개발모델에서 벗어나 수입공산품을 국산품으로 대체해서 국내 산업을 육성하고자 제3세계 국가에서 실시한 경제전략이었다. 하지만 국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해외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제3세계 국가에 대규모 외채와 재정적자 문제를 발생시켰다.
(2) José García Montalvo, ‘La fièvre de la brique espagnole’(스페인의 건설 열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2월호.
 


에콰도르의 선례

신자유주의 혁명 당시 에콰도르가 실시했던 가장 주요한 구조개혁 조치 중의 하나가 금융자유화였다. 당시 경쟁을 통해 시장이 자율적으로 규제될 것이라고 약속받았다. 신자유주의가 극에 달했던 1998년 에콰도르는 새로 제정된 헌법을 통해 중앙은행의 독립을 보장했다. 중앙은행의 유일한 목표는 통화안정이었다.

중앙은행이 민간 금융기관에 보증을 서고 대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적 권한을 헌법 규정으로까지 격상시킨 것이다.(1998년 헌법 265조) 하지만 심각한 금융위기가 닥치자 정치권과 금융당국은 ‘정부가 금융위기 타개를 위한 적절한 법적 수단을 갖출 때까지 헌법 시행일로부터 최대 2년까지 에콰도르 중앙은행은 안정과 지불능력 보장을 위해 금융기관에 융자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임시규정을 만들었다.(임시조항 42조) 이 규정은 4달 후 시작될 금융권 구제 작전의 기초가 되었다. 

1998년 말에는 액수에 상관없이 국가가 예금의 100%를 보장하는 예금보장법을 제정했다. 여기에는 해외계좌에 있는 예금 보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법이 공포된 다음 날 파산상태인 필란방코 은행은 국가관리에 들어갔다. 금융부문을 구제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1999년 3월 정부는 예금인출 금지라는 에콰도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사유재산 압류를 시도했다. 예금동결은 환율이 달러 당 1만 수크레(2000년 자국통화를 미국달러로 지정하기 전까지 사용했던 에콰도르의 옛 통화)였을 때 실시되었는데 1년 후 달러로 예금을 인출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환율이 달러 당 2만 5000 수크레로 떨어졌다. 예금자들은 은행예금의 60%, 약 25억 달러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자국통화가 아니라 단일통화를 가졌다는 것이 유럽의 문제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자국통화마저 없는 에콰도르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몇 년 동안 약 2백만 명의 에콰도르인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에콰도르를 떠났다.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이민자들이 바다에서 난파를 당해 목숨을 잃은 것과 같은 일이 에콰도르인들에게도 일어났다. 그리고 이민자들이 많은 몇몇 지역에서는 이민자 부모를 가진 아이들의 자살이 증가하기도 했다. 에콰도르에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