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 형제단에 맞서는 젊은 작가들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목으로 이집트 정부의 탄압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좌파를 중심으로 나세르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지성계의 거성들이
군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금 ‘암흑기’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혁명의 이상을 좇지 않는 작가 및 예술가들이 ‘구세대’에 맞서는 양상이다.
이집트 현대 문학계의 거성들이 하나같이 이집트 군부 및 정계의 실세 압델 팟타흐 시시 장군의 위업을 칭송하는 믿기 힘든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군부의 영향이 나날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데도, 소날라 이브라힘, 가말 기타니, 바하 타헤르, 아흐메드 푸아드 나짐 등을 필두로 소위 ‘60년대 세대’라고 일컫는 문학 세대(1967년 6일 전쟁, 즉 이스라엘과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패배한 전후로 태동한 60년대 이집트 문학 세대로, 정치화 성향이 짙고 반항적 성격이 강함-역주)의 대표 작가들 같이 저명한 지식인들이 한 목소리로 시시 장군을 환호하는 것이다. 이들은 정치권이나 대다수 언론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에 준하는 ‘국가적 영웅’ 시시 장군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알라 엘-아스와니나 할레드 알 하미시 같이 젊은 인기 작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제도권에 편입된 지성인들
군부 독재의 수장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와 안와르 엘 사다트 때문에 그 옛날 감옥에 투옥되어야 했던 작가들이, 그리고 이후 거의 40여 년간 집권 정부에 대해 정치사회적 비판을 가해온 지식인들이 2013년 7월 13일 이후 무슬림 형제단에 가해진 유혈 진압에 대해 찬사를 퍼붓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그만큼 무슬림 형제단이 미움을 샀던 탓일까? 형제단에 대한 가혹한 탄압으로 1,500명 이상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수천 명이 투옥되고 수백 명이 실종됐다. 특히 무바라크 전 대통령 통치 말기를 그려 2002년 출간된 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작품 <야쿠비안 빌딩>(1)으로 유명한 작가 엘 아스와니는 2000년대 말 주간지 사설을 통해 정부의 파행적 행태에 대해 여론의 경각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던 인물이다.
2011년 1월 25일 혁명 운동의 토양을 다져놓은 것도 바로 이 사설들이었다. 그렇다면 무르시 탄핵 직후 <르몽드>에서 문제제기한 바와 같이 “이집트 좌파 인텔리들이 돌연 ‘파시스트’가 된 것일까?”(2) 이는 이집트 지식인들이 군부 편으로 돌아선 이후의 파장에 대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제 전부 군부 편이 된 신문들의 ‘1면’ 기사에 실리지 않았을 뿐,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시시 장군에 대한 찬성 진영과 반대 진영 사이의 정치적 갈등을 넘어서서 7월 3일 있었던 쿠데타는 지식인의 역할과 국가의 성격 문제에 있어 예술가들 사이의 균열과 대립을 분명히 드러내주는 계기였다.
사실 과거 군부에 반대했던 인사들이 지금의 군부에 찬동하는 상황이 역설적으로 보이긴 하나, 이 작가들이 취하는 행동 노선에도 한 가지 논리는 존재한다. 이들 모두 국가를 옹호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의 작품 속에서도 그런 인물의 모습이 우의적으로 그려진다. 이들에 따르면 국가는 두 개의 화근을 안고 있는데, 바로 부패와 이슬람 원리주의자 문제이다. 시시 장군 측에 선 지식인들은 (아랍 작가 총연합회 사무총장 출신으로 현재 이집트 개헌검토위원회 대변인을 맡고 있는 무함마드 살마위를 필두로 시시 장군이 이 같은 관점에 동의할 만한 지식인으로 요령 있게 선임해 둔) 제헌의회 연단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요 담론이 지속되도록 하는 데 일조한다. 이들이 늘 하는 이야기는 시시 장군이 구현하는 국가가 바로 부패와 이슬람 원리주의에서 벗어난 이상적인 국가이자 국민을 보호해주는 국가이며, 국영 신문 <아크바르 알윰>의 지면을 통해 기타니가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는 곧 “승리”의 국가 모델이라는 것이다.(3)
나세르 풍의 이 같은 담론은 이미 198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나기브 마푸즈를 통해 한 번 거론됐던 이야기다. 시시 장군을 찬양하는 지식인들의 영원한 모델인 마푸즈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1954년, 나세르가 초대 대통령이었던 나기브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을 때,(4)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부정적인 쪽에 더 가까웠다. 1954년 알렉산드리아 만샤 광장에서 그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을 때에도 사실 그다지 큰 연민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암살을 기도한)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 것도 아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1952년 혁명 직후 나세르가 무슬림 형제단을 제외하고 정당 활동 금지 결정을 내린 것이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나세르가 암살 기도 후 이들에게 역시 활동 금지 결정을 내린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웠다.”(5) 국가에 대한 이 같은 충성심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은 마푸즈에 대해 ‘계몽적 지성’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준다. 그러나 독립 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던 지성인들은 제도권 문화의 주류로 편입된 지 오래다. 2003년 이브라힘이 그랬던 것과 같이 문화부에서 수여하는 상을 거부하고, 기타니처럼 <아크바르 알윰>의 지면을 통해 문화부 장관을 힐난하긴 했어도 이들은 모두 고등 문화위원회나 이집트 작가연합, 오페라, 텔레비전 무대 등 ‘공식’ 기관들을 통해 칭송 받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다.
신진작가들, 이집트의 신화 풍자
이 제도권 작가들은 언제나 내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면서 국민들을 인도하고 고차원적인 사회적 임무를 수행하는 ‘깨어있는 지성인’의 모델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6) 2011년 1월 혁명에서 알 아스와니가 맡은 역할이 작지 않음에도 그와 그의 문학적 모델이 ‘90년대 세대’라기보다 ‘60년대 세대’에 더 가까운 이유도 바로 이 같은 맥락 때문이다.(90년대 세대의 경우, 60년대 세대와 달리 국가에 대한 거대한 포부나 이상향보다는 현실 속의 일상적인 문제가 작품의 중심 화두이며, 작품 속에서 주로 소외된 세계와 서민들의 삶을 그려낸다. 정체성 문제, 선이나 미와 같은 거창한 가치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소재한 한정된 주변 영역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며, 작법에 있어서도 선배 세대들과 차이를 보인다. 가령 60년대 세대가 ‘위대한’ 문학을 다루거나 ‘문학적’ 글쓰기를 논했던 반면, 90년대 세대는 ‘내면’의 글쓰기, 지나친 장식과 수사학을 거부한 언어의 ‘탈 신성화’에 치중하며, 종종 길거리 언어나 젊은이들의 ‘시쳇말’ 등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역주)
사실 그 후로 소설가를 중심으로 한 신진 작가 세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진 작가들은 60년대 작가들보다 상업적인 수익은 거두지 못하였으나, 제도권과 확연히 거리를 둔다. 서구권 출판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전위적인 작가들은 기존의 정론(定論)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형식적인 새로움을 추구한다.
이러한 이집트 전위 문학 세대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무스타파 지크리, 야세르 압델 라티프, 헤이담 알 와다니, 메이 텔미사니, 유세프 라카, 이하브 압델 하미드, 와엘 아슈리, 바스마 압델 아지즈, 나엘 엘 투키, 아흐메드 나기, 아흐메드 알 아이디, 모하메드 케이르, 모하메드 라비, 만수라 아제딘 등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야세르 압델 라티프가 쓰고 있는 바와 같이, 주류 문학에 속하는 나세르계 좌파 지식인들은 이들의 작품을 오직 “세계화라는 재앙이 남긴 잔해”라든가 “도심 응석받이들이나 쓰는 한담” 정도로 보지 않는다. 장르의 다양성 외에도 신진 작가들에게서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감성이 있다. 마푸즈 모델과도 거리를 둘 뿐 아니라 선배 작가 세대가 편애하던 역사 소설도 기피하는 이들은 반(反)영웅적 인물을 선호하며 소외된 사람들이나 불한당을 즐겨 찾는다. 간혹 그림이 곁들여지기도 하는 짧은 단편의 ‘뒷골목’ 소설들은 민족주의나 나세르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범아랍주의, 이슬람주의 같은 거대 담론이 지나가고 난 폐허 위에서 꽃을 피운다. 알 와다니의 표현에 따르면 “불완전한 문학”(7)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고, 모스타파 지크리에 따르면 “미숙한” 문학(8)이란 평을 받기도 하는 이 전위 문학의 작가들은 사전에 미리 개요를 짜두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글을 쓰는 작법을 추구한다. 이러한 신진 작가들은 공식적인 역사와 이집트가 만들어낸 신화에 대해 서슴없이 풍자한다. 그리고 반(反)이상향과 재앙, 불한당이 다스리는 무법지대가 기승을 부려 기존의 국가가 붕괴되는 상황을 상상한다.(9)
젊은 작가 아흐메드 나기는 “나세르계 원로들이 나세르를 연상시키는 지도자와 군인의 비호를 받는 중앙 정부에 대해 계속해서 망상을 반복하는 건 마치 (경미한 마약성 진통제인) 트라마돌(10)을 맞고 환각에 취해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얼마 후 다르 알 타누이르 출판사에서 출간될 그의 차기작 <인생 사용법>에서 카이로를 막강한 바람에 휩쓸린 지하 세계가 득실거리는 곳으로 묘사한다. “연로한 지식인들은 군대를 신임하는 게 좋은지도 모르겠지만, 군 복무를 했거나 군에 붙잡혀본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든 군인 차림의 민간인이든 어떤 집단이 나와서 정체성에 관한 자신들의 시각을 강요한다면, 젊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집트라는 나라는 너무 커서 국민들이 ‘이것’ 혹은 ‘저것’을 원한다는 식의 단순한 슬로건으로 국민을 묶어둘 수 없다. 얼마 전 우리가 경험한 난국의 근본적인 표상을 과감히 제시해야 하며, 신화와 환상을 기반으로 구축된 이집트란 나라의 정체성에 대한 이 가련한 표상들을 파괴해야 할 필요성이 시급하다. 아울러 사람들에게 이를 강요하는 행위도 서둘러 그만두어야 한다. 군부 중심의 민족주의 국가는 이제 없다. 이슬람 정권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했으며, 민주주의는 그저 나랏일을 처리하고 권력을 분리하는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집트 문학의 ‘새로운 물결’은 아마 국가와 문화 사이의 관계를 뒤집은 광범위한 대안 운동이 함께 행보를 맞추어주지 않았다면 몇몇 특수한 예만 제외하고 여전히 비밀스러운 전위 문화권 안에 유폐되어 있었을 것이다. 즉 이곳에서도 역시 제도권에서 소외된 예술가들의 ‘인디’ 무대가 두각을 나타낸다. ‘인디’ 문화가 발전한 건 1990년대 말이었다. 이 시기에는 만화와 영화, 랩, 전자 음악, 가사 중심의 음악, 연극, 길거리 예술, 그라피티 등 수많은 인디 집단과 인디 장르가 들끓었다. 일군의 젊은이들이 소위 말하는 ‘인디’ 무대로 대거 몰려들었으며, 인권 수호 단체나 다양한 메세나 활동의 후원을 받은 극단이나 공연장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나기브 마푸즈를 최우선 모델로 삼지도 않고, 압델 하림 하페즈나 움 갈숨 같은 가수를 기준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아흐메드 아다위야나 셰이흐 이맘 등 주류 문화나 시장에 알려지지 않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을 모델로 한다. 작품의 배포 경로도 대개는 인터넷이나 유튜브 사이트다. 이집트에서 ‘마흐라간’ 그룹들과 웨자, 오카, 오르테가 같은 뮤지션이 주축이 되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일렉트로 샤비(혹은 마흐라간)’ 음악은 오토바이 택시 운전자들이 주고받던 전자 음악 칩에서 발전한 음악으로 오늘날은 차트 정상에까지 올라가곤 한다. 그런데 그라피티 문화나 축구 응원 문화와 마찬가지로 마흐라간 문화 역시 길거리에서 주로 소비된다는 점, 그리고 기존의 규범을 파괴한다는 점 때문에 사회문화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이 점에 있어서는 시시 장군의 추앙 세력들이 운운하는 부패라든가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발언보다 더 파급력이 클 것이다.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은 7월 3일 쿠데타에 따라 이집트 혁명의 여러 가지 측면이 드러났다. 일각에선 체제 전복을 주장하는가 하며 또 다른 일각에선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꾸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새로운 ‘문화 영역’의 정의가 가능해졌으며 문화의 영향력은 잠재적으로 커져 있다. 작가인 유세프 라카는 “혁명을 통해 예술가들이 각자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던 체제의 상징과 더불어 예술계에서 반정부 세력의 대대적인 분열이 드러났다.”고 설명한다. “혁명은 행위 면에 있어서든 힘의 측면에 있어서든 실제 문화의 영역을 정의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제 문화 영역은 언론 및 국가의 영역을 벗어났으며, 사상과 전통 면에 있어 세계화에 적대적이고 변화 또한 거부하며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하는 좌파 쪽 문화계의 영역에서도 벗어났다.”
글·클레르 탈롱 Claire Talon 파디 아와드 Fadi Awad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등의 역서가 있다.
(1) 알라 엘 아스와니 Alaa El-Aswani, <야쿠비안 빌딩 L’'Immeuble Yacoubian>, Actes Sud, Paris, 2006.
(2) 크리스토프 아야드 Christophe Ayad, ‘군부 쿠데타 정당화하는 이집트 지식인들 Les intellectuels égyptiens justifient le coup de force mené par l’'armée’, <르몽드>, 2013년 8월 13일.
(3) ‘승리의 국가 L’'Etat triomphe’(아랍어 원문), <아크바르 알 윰 Akhbar Al-Youm>, Cairo, 2013년 11월 3일.
(4) 1952년 자유장교단 쿠데타 이후 수립된 공화국 정권 하에서의 이집트 초대 대통령.
(5) 나비그 마푸즈 Naguib Mahfouz, <회고록 Mémoires>(아랍어 원문), Dar Al-Shorouk, Cairo, 2011.
(6) 리샤르 자크몽 Richard Jacquemond, <필사생과 작가의 사이에서-이집트 현대문학계 Entre scribes et écrivains. Le champ littéraire dans l’'Egypte contemporaine>, Sindbad - Actes Sud, Arles, 2002.
(7) 헤이담 알 와다니 Haytham Al-Wardany, <불완전한 문학을 하는 사람들 Gens de la littérature incomplète>(아랍어 원문), Dar Merrit, Cairo, 2003.
(8) 무스타파 지크리 Mustafa Zikri, ‘미숙한 문학 La littérature immature’, <아맹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다른 다섯 개 이야기>(아랍어 원문), Dar Al-Tanouir, Cairo, 2012.
(9) 나엘 엘 투키 Nael El-Toukhy, <격리 La Quarantaine>(아랍어 원문), Dar Merrit, 2013.
(10) 이집트에서 흔히 환각제로 사용되는 진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