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 물길 따라 '양날의 칼'

신용위험 감소 땐 실물회복 도움되지만 또다른 거품 조장

2009-04-04     박현수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는 금융위기와 경기불황의 공포가 전세계를 암울하게 뒤덮고 있다. 마침내 미국 FRB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2008년 12월 16일 연방기금 금리의 목표 수준을 0~0.25%로 설정해 사실상 정책금리를 제로로 인하하면서 양적 완화 정책도 공식화했다.
양적 완화 정책은 금리를 정책 수단으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중앙은행에는 이례적인 정책 수단이다. 하지만 이전부터 정책금리가 제로 수준에 근접함에 따라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돼왔고, 벤 버냉키 FRB 의장도 양적 완화 정책(Quantitative Easing)을 포함해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을 지지해왔다. 버냉키 의장은 FRB 이사로 재직 중이던 2004년에 단기금리가 매우 낮은 수준일 때에는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단기금리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증권의 구성을 바꿈으로써 금리 기간 구조를 변화시키며, 단기 정책금리를 제로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 이상으로 통화량 공급을 확대한다는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세 번째 대안이 양적 완화 정책이다. 이처럼 경제가 심각한 침체에 빠질 위험이 있을 경우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려서라도 유동성을 공급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버냉키 의장은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2009년 3월 3천억 달러 국채 매입 계획 발표는 양적 완화 정책이 더 본격적으로 실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FRB가 국채를 매입하기로 한 것은 시장의 예상보다 다소 이른 감은 있지만, 미국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 수행을 위해 발행될 막대한 물량의 국채에 대한 부담감으로 장기금리가 상승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국채 소화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장기 국채 금리가 상승하면 30년 만기 모기지 금리도 오르게 되어 가뜩이나 침체에 빠진 주택시장을 빈사 상태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양적 완화 정책은 기본적으로 유동성이 기업·가계 등 민간 부문으로 흘러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즉, 신용경색을 해소해 실물경제를 살리는 것이 양적 완화 정책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적 완화 정책만으로 신용 공급 정상화와 경기 부양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금의 신용경색이 금융권의 유동성 부족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말 이후 미국 대형 상업은행의 자산 변화를 보면 현금성 자산은 크게 증가했지만 대출 등 신용 공급은 감소하고 있다. 이는 상업은행이 FRB의 유동성 공급에 힘입어 풍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지만 기업과 가계에 대한 신용 공급은 꺼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적 완화 정책의 선례를 제공한 일본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부터 장기 불황에 빠진 경제가 1995년 이후 디플레이션에 진입하자 1999년 제로금리 진입을 거쳐 2001년 3월부터 2006년 3월까지 5년 동안 시행한 바 있다. 하지만 일본의 양적 완화 정책은 금융시장 안정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경기 부양 효과는 미약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따라서 신용 경색이 해소되려면 기업과 가계의 신용 위험이 감소해야 하며, 이는 경기 부양책과 주택 소유자에 대한 지원 정책 등 실물경제 대책이 효과를 나타내야 한다.
  미국은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금융 부문에서는 양적 완화 정책과 함께 대형 금융기관에 대한 자본 확충 계획을, 실물 부문에서는 경기 부양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만일 이런 정책들이 효과를 발휘해 예상대로 2009년 하반기 이후 미국 경제가 하락을 멈추고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선다면 세계와 한국 경제의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금융기관의 디레버리징이 완화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고, 미국 실물경제 회복은 대미 수출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회복은 완만할 것이다. 한편 미국의 대규모 양적 완화 정책은 달러화 공급 증가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에 달러화가 장기적으로 약세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다. 경기침체와 양적 완화 정책이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 일본 등 주요 경제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달러화가 급락할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달러화 약세 요인이 강할 것으로 보여 원-달러 환율도 안정세를 찾아갈 가능성이 높다.
 한편 단기적인 위기 극복을 위해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거나 또 다른 버블을 초래하는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우려도 있다. 따라서 양적 완화 정책은 양날의 칼이다. 당장은 금융위기 극복이 최대 과제지만, 이후의 부작용을 억제하려면 효과적인 유동성 환수 등의 정책과제에 대한 고민도 긴요하다. 

박현수 = 서울대 경영학 박사로 국제재무와 자본시장 전문가. 주요 저서와 보고서로 <주요국의 금융기관 국유화 동향과 전망>(2009년 3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미국 경제 전망>(2008년 8월)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