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
파키스탄 대법원은 전 대통령인 페르베즈 무샤라프의 2007년 계엄령을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판단하면서 전 방위로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법치국가의 기틀을 다진 이후의 파키스탄은 점점 부당한 특권 행사가 늘어나고 있어 민주주의자들의 시름이 늘어간다.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파벌 충돌로 국가 화합도 어려운 지경이다.
시아파는 파키스탄 인구 전체의 1/5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아파와 수니파와의 갈등은 그저 갈등이 있다고 치부하기에는 중요한 문제다. 파키스탄 건국자들은 파키스탄을 남아시아 무슬림을 포용하는 성지로 여겼다. 그러나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은 하나 된 이슬람이 무색할 정도다. 파키스탄 내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갈등을 가리키는 파벌주의는 파키스탄 건국이념과는 너무나 다르다. 이는 결국 외부에서 유입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영국 통치 하의 인도에서 잠재적 갈등은 있었지만 이는 단 한 번도 무슬림연맹(Muslim League)(1) 이념과 충돌한 적은 없었다. 무슬림 연맹을 창설한 파키스탄의 아버지 무하마드 알리 지나는 이스마엘파, 즉 시아파 주류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파키스탄에는 정치인 뿐 아니라 군인들 중에서도 1969년부터 1971년까지 파키스탄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무하마드 야햐 칸(1917~1980)과 같은 시아파 지도자들이 있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2)의 고백은 격론의 대상이 될 정도로, 부토라는 ‘순교자’와 그의 딸에 대해 그 무덤 앞에서 묵념하는 사람들의 숭배가 내포하는 시아파의 이야기가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결혼은 흔했다. 알리 부토의 부인은 이란인이었고 공개적 장소에서 이러한 정파 구분을 아무도 입에 담지 않았다.
파키스탄 시아파는 1980년대 정치화 과정을 통해 이란 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1979년부터 파키스탄은 이맘 루홀라 호메이니의 혁명의 수출 전략이 가장 주시하는 대상 중 하나였다. 콤에서 양성된 종교인들은 이맘을 위한 적극적 교육 정책 덕분에 과거 회교 사원 출신의 종교인들을 대신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사우디 아라비아는 아프카니스탄을 침략(1979~1989)한 소련에 항거하는 무자히딘을 돕기 위해 수니파를 지원하였다.
이슬람 정책이 촉발한 종파 갈등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은 무하마드 지아 울하크 장군(3)의 이슬람화 정책이 가시화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무하마드 지아 울하크는 부토에 대한 쿠데타로 인한 정당성 상실을 보완하기 위해 ‘이슬람 용병’으로 자처했다. 이 정책은 ‘수니화’의 논리였다. 이에 대해 TNJF(Tehrik-e Nifaz-e Figh Jaafriya, 시아파 법 적용을 위한 운동)가 1979년 4월에 결성되었다. TNJF는 시아파의 저항 캠페인을 주도하였다. 특히 파키스탄 전역에서 온 시아파 시위자들과 함께 이슬라마바드에서 1980년 7월 5일 계엄령 하에서 금지된 가두 집회를 감행한 중심부였다. 당시 파키스탄 시아파는 이란 혁명에 자극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가장 활발한 수니파의 주요 운동세력인 SSP(Sipah-e-Sahaba Paskistan, 예언자 친구들의 수호자)는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1985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업고 구성되었다. TNFJ(이후 1993년 TJP(Tehrik-e Jafria Pakistan), ‘파키스탄 시아파 운동’으로 개칭)와 SSP 간의 반목은 정치에서 먼저 나타났다. 양 세력은 정당이 되었고 선거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각기 세력화된 민병대를 갖추었다. ‘파벌’ 간 폭력은 1980년대 말부터 특정 인사를 겨냥한 암살 시도가 급증하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이 하나씩 스러져갔다. 1990년에는 SSP를 세운 하크 나와즈 장비의 차례였다. 그를 암살한 사람은 아마 수니파 내 경쟁자 소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아파도 범죄 혐의로 비난 받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추종자들은 이란의 라호레 지도자를 암살하였다.
SSP의 극단 분파는 1994년 LJ(Lashkar-e-Jhangvi, SSP를 세운 장비의 이름을 따서 ‘장비의 군사들’)를 창설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에 항거하는 지하드를 이끌었던 펜자비 중 하나인 리아즈 바스라가 주도하였다. 동시에 TJP의 급진파는 SMP(Sipah-e Muhammad Pakistan, 무하마드의 군사)를 세운다. 1995년부터 이 조직들은 각 진영 지도자들을 겨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집단 테러의 논리로 들어갔다. 이는 반대 진영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금요일 기도식이 끝난 후 회교 사원 입구에서 터지는 폭탄, 예배식이나 가족 전통 축제 중간 뛰어드는 자살 테러로 수십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1989년 67차례의 ‘양 진영 간 마찰’로 희생된 사람은 18명이었는데, 2010년 57차례의 테러로 죽은 희생자는 509명에 달한다. 2013년 1월 1일부터 12월 27일 사이 91차례의 테러로 443명이 목숨을 잃었다.(4) 파벌주의의 위협이 내부 안전 뿐 아니라 국가 통합에 위해가 되면서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은 LJ와 SSP와의 전쟁을 최우선과제로 삼았다. 시아파의 민병대는 이 조직만큼 세력이 크진 않았다. 그러나 무샤라프 장군의 이 같은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는데(2003년 두 차례의 테러로 인해 그도 희생자가 되었다), 특히 탈리반(아프가니스탄에 이어 파키스탄인들)이 가세한 원인이 컸다.
탈리반에 가까운 수니파 조직
수니파 조직들은 탈리반과 분명한 유사점을 갖고 있다. 199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마자리 샤리프 학살(5)에서 보듯, 탈리반도 급진 반시아파 세력이다. LJ의 암살단은 특정 암살을 전문적으로 도맡던 자들로 2001년 체제 붕괴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은신하다가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이들 중 다수는 파키스탄 연합부족자치지역(FATA)에 자리잡았다. 2007년 이후부터는 TTP(Tehrik-i-Taliban Pakistan, 파키스탄 탈리반 운동) 진영과 공조하고 있다. TTP는 지난 달 미국 무인 정찰기에 의해 죽은 하키물라 메슈드의 지휘 하에 2008년 연합부족자치지역(FATA)에서 반시아파 행동으로 이미 각인된 바 있다.
그러나 지정학적이든 정치적이든 이러한 파벌주의가 파키스탄 주변부 현상은 아니다.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진앙지는 파키스탄의 핵심 지역인 펀자브로 사회 갈등이 이를 부추겼다. 분리 독립 후 1947년 시아파의 지주들은 거의 아무 것도 없이 빈손으로 인도를 떠난 수니파 난민들을 고용하였다. 수니파 사람들이 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도시화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옛 주인들로부터 벗어나 당당히 자신들의 지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992년 SSP의 수장이었던 아잠 타릭은 국회에서 장 지역구 의석을 차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수 정치 세력이었던 점에서 전례 없는 성공이었다. 그는 1993년 재선되었다. 4년 뒤 그는 선거에서 패했지만 장 지역은 지배 세력인 시아파에 맞선 수니파의 설움을 이유로 그의 정당 본거지로 건재한다.
펀자브의 파벌주의는 장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그 영향력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조용한 지지 덕분에 지역 기반을 확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SSP는 법적으로는 금지되어도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들을 통해 여전히 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나와즈 샤리프 총리가 이끄는 주요 정당인 PML-N(나와즈 파키스탄무슬림연맹)조차 이들을 무시하지 못한다. 그도 1990년대 말 권력을 잡았을 때 파벌 조직들에 의해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망명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샤리프의 행보는 달라졌고 그의 동생 샤뱌즈도 펀자브 주의 총리가 되었다.
파벌 운동은 2008년 수년 전부터 뮤샤라프의 탄압을 받았을 때 정치적으로 보호받고자 PML-N(파키스탄무슬림연맹)으로 전향했다. PML-N은 수니파 극렬주의의 정치적 영향력과 민병대 테러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드라사 네트워크(6)를 통해 이들과 합세하게 되었다. 당시 SSP 수장이었던 무하마드 아메드 루드히안비는 2008년 선거 때 수니파 대원들이 수십 명의 PML-N 후보들을 위해 ‘무장 지원’(투표함 주변 엄호)을 해주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후보 대부분은 당선되었다. 그들 중 하나인 라나 사나울라 칸은 펀자브 주정부 사법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이 된 후 그는 수니파 조직의 ‘무력’과 이념적 영향 덕분에 선출된 데 대해 빚을 갚아야 했다. 장관이 된 후 사나울라 칸은 기소하고도 남을 테러 이후에도 수니파 조직을 보호했을 뿐 아니라 SSP의 테러 영웅들 앞에 무릎을 꿇기도 했다. 2010년 2월 마울라라 하크 나와즈 장비와 아잠 타릭의 무덤을 찾아 조문한 것이다.
PML-N과 SSP 간에 이루어진 계약 관계는 수니파 극렬주의자들이 경중형 무기류 장비를 갖출 수 있게 만들었다. 펀자브 주 의원들은 이들에게 총포류 소지 허가를 내주었고 그로 인해 이들은 실질적 군비 증강을 위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국가 화합의 걸림돌, 파벌주의
샤리프 형제는 SSP와 가까워지는 것만큼 지난 6년간의 망명 기간(2000~2007년) 중 사우디아라비아에 머무르면서 관계를 강화하였다. 사실 샤리프 형제의 아버지는 19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러 경제 사업을 일구었던 바 있다. 오늘날 샤리프 총리는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돕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반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의 회교 사원에 보다 많은 회교법학자들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그들에게 시아파로 비치는 파키스탄 전 대통령 아시프 알리 카르다리가 이란과 체결한 이란-파키스탄 가스공급관 프로젝트를 중단시키면서 이란을 고립시키고자 파키스탄을 활용하고 있다.
파키스탄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인도와 이란이 더욱 가까워진 이 프로젝트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다. 루피화 폭락에서 봤듯이 금융 위기의 혼란 가운데 있는 인도는 파트너인 이란에 더 많은 이익을 내주면서 8십억 달러의 원유 청구금액을 줄이고 싶어 한다. 다른 한편 인도는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라사드를 고립시킴으로써 활로를 모색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을 볼 때 수니파에 반하여 시아파를 택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현재 파키스탄 내부와 국제 정치 상황은 수니파 극렬주의 조직들의 활동을 더욱 부추길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가 매일 같이 파키스탄의 근간을 갉아 먹고 있다. 파벌은 사회의 일부로 정체성을 만드는 요소, 또는 정체성의 위기를 나타내는 요소가 되었다. 이제 파키스탄인들은 자신이 파키스탄 사람이기보다는 수니파인가, 또는 시아파인가로 자신을 규정한다. 이슬람은 이러한 범주에 따라 규정된다. 아마 공개적으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바로, 파키스탄의 언어인 우르두어로 ‘파키스탄’의 뜻은 ‘순수의 나라’인데, 파키스탄은 본래 모든 무슬림을 포용하는 조국이라는 기치 아래 세워진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니파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시아파 선생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오직 하나의 나마즈(무슬림 기도)만 있어야 하고 오직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이를 정당화한다. 바로 대다수가 수니파이기 때문이다. 파벌주의는 따라서 사회 분열을 낳았고 이제 이는 국가 화합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그 위협이 너무도 커서 발루치스탄(처음에는 하자라 인들을 대상으로 했었다)이나 길깃 발티스탄과 같은 ‘주변’ 지역의 시아파들은 막대한 조세를 부담해야 했다. 수니파 극렬조직의 본거지 역할을 하고 있는 펀자브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소수 시아파에 확실한 의사를 전달할 필요를 느낀 샤리프는 지난 10월과 11월 인도와 미국과의 회담 때 일련의 변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보가 순전히 상징적인 것으로 그칠지는 미래가 말해줄 것이다.
글·크리스토프 자프를로 Christophe Jaffrelot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위원
(1) 1913년 무하마드 알리 지나가 세운 정당으로 인도 내 무슬림을 규합했다.
(2) 1928년 출생한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1971년부터 1977년까지 파키스탄을 이끌었고 1979년 4월 4일 암살당했다.
(3) 무하마드 지아 울하크(1924~1988) 장군은 1977년 부토 대통령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1988년까지 정권을 잡았다.
(4) 2013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4월호에 게재된 Ashraf Khan의 ‘카라치에서 살아남는 법 Rester en vie a Karachi’ 참조.
(5) 1988년 8월 탈리반이 도시를 점령했을 당시 4천에서 6천 여명의 하자라인들이 학살당했다.
(6) 2006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3월호에 게재된 Willam Dalrymple의 ‘파키스탄 마드라사로 여행 Voyage à l’intérieur des madrasa pakistanaises’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