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판사들의 무모한 도전?
군사 쿠데타에 익숙해진 파키스탄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구성된 의회의 임기가 끝나고 올해 다시 새로운 의회가 들어섰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전에도 합법적인 정부가 세워진 적은 있었지만, 정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률가들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1999년 군사쿠데타의 주인공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으로 하여금 2007~2008년도 선거를 실시하도록 했다. 그들 중에서 이프티카르 모하메드 차우드리 대법원장은 특별히 언급될 만하다. 그는 과거, 온갖 종류의 인권 침해를 묵인하며 권력의 품 안에서 안주해왔던 사법부에서 충실히 일했던 사람이다.
차우드리 법관이 걸어온 길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다. 2000년에 대법관에 임명된 그는 그로부터 2년 후, 무샤라프 장군이 제정한 임시헌법명령에 서약을 한다. 2005년, 무샤라프 장군이 그가 자기 말을 고분고분 잘 따른다고 확신하며 그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후 차우드리는 그의 독립성을 서서히 증명해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돈과 관련된 한 부정부패 사건을 통해 이름을 알린다. 정부에서 파키스탄 철강공장을 민영화하여 당시 샤우카트 아지즈 총리의 측근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기려던 것에 제동을 걸고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더욱 확고해진 것은 ‘실종자 사건’을 통해서였다. 대법원은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처형된 발루치 족 민족주의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같은 식으로 제거당하거나 ‘매우 비싼 값’(1)에 미중앙정보국(CIA)에 넘겨진 이슬람교도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차우드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치자 무샤라프는 몹시 불쾌해 하면서 2007년 3월 그를 소환하여 사임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차우드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무샤라프는 그의 직무를 정지시킨 다음 그에게 최고사법평의회에 출두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신임 대법원장을 임명하였다. 그러자 파키스탄 변호사들이 해임된 대법원장을 지지하며 들고 일어났다. 경찰로부터 탄압의 위험을 무릅쓴 채 변호사 협회가 주도해서 변호사들이 주저하지 않고 길거리로 나섰다.
환호받은 변호사들의 저항운동
몇 주 후 5월 5일, 차우드리는 라호레라는 도시의 변호사 협회 초청을 받고 이곳으로 갔다. 2천 대의 차량이 따르는 그의 행렬은 이슬라마바드에서 출발하여 라호레까지 가는데 평소의 여섯 배인 스물네 시간이 걸렸다. 그는 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 파키스탄 역사상 유일한 저항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당시 파키스탄 국민당(PPP)과 파키스탄-나와즈 회교동맹(PML-N) 등 주요 야당에는 지도자가 없었다. 베나지르 부토와 나와즈 샤리프, 두 사람 모두 망명 중이었다가 변호사들의 저항운동 덕분에 2007년 말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차우드리와 변호사들은 파키스탄 정치의 빈자리를 이렇게 메움으로써 사법권의 정치참여라는 결정적 한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2008년 2월에 실시된 총선거에 의해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시작되었지만 재판관들은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깨고 다시 저항운동을 시작해야만 했다.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파키스탄 국민당(PPP)이 차우드리를 대법원장 직에 복귀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2007년 12월에 암살당한 베나지르 부토의 남편)은 차우드리의 적극적 행동주의가 자신을 겨냥할까봐 두려워했다. 변호사들과 야당, 그리고 상황에 따라 야당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샤리프 등이 들고 일어나 거리로 나서자 자르다리는 결국 2009년에 굴복해야만 했다.
다시 대법원장이 된 차우드리는 자르다리 대통령이 관련된 부패사건을 파헤치는 데 노력을 집중한다. 대법원은 유수프 라자 질라니 총리에게 거액의 뇌물이 입금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르다리-부토 가문의 스위스 계좌를 조사해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스위스 관계당국에 보낼 것을 요구했다. 질라니 총리는 자르다리가 대통령의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으므로 대법원이 요구한 대로 서한을 보낼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대통령의 면책특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2012년 4월 26일 질라니는 대법원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결국 같은 해 6월 19일 그는 대법원의 확고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사임을 해야만 했다. 파키스탄 국민당뿐만 아니라 일부 법률가들도 그것은 지금 진행 중인 민주화를 뒤흔드는 ‘사법 쿠데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정치인들만 차우드리의 표적이 된 것은 아니다. 특히 차우드리는 군의 최고지도자였던 미르자 아슬람 베그와 국가정보원(ISI) 원장을 지낸 아사드 두라니가 1990년에 샤리프를 포함한 베나지르 부토의 반대자들에게 비밀자금을 제공한 의혹과 관련된 사건의 재조사에 착수했다. 베그와 두라니가 이들에게 수백 만 루피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1990년대 중반에 알려진 사건이지만 그 당시의 대법원장은 샤리프가 1997년에 권력을 잡아 그를 강제로 사임시키는 바람에 더 이상 이 사건을 조사할 수가 없었다. 2012년 3월 재조사에 들어간 대법원은 이 사건의 주모자들을 출두시키기까지 했다. 두라니는 판사들이 자기를 두 차례나 소환했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꼈고, 베그는 법정 형사심문에서 뻣뻣한 태도로 자기가 지금 “몹시 화가 나 있다”고 말했다가 말투를 바꾸라는 단호한 경고를 받기도 했다. 베그가 혐의 사실을 모조리 부인한 것과 달리 두라니는 이 비밀자금 제공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을 토해냈다.
군의 불법행위에 대한 사법부 재판
법원이 군(軍)의 불법적인 관행을 이렇게까지 발가벗긴 적은 일찍이 없었다. 전례 없이 강경한 어조로 군의 관행에 대해 거론하는 대법원 판결이 공개되면서 아사드 장군과 두라니가 ‘헌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으며’ ‘파키스탄과 파키스탄 군, 파키스탄 국가정보원의 명예를 더럽혔다’(2)고 적시한 판결문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됐다.
한편 사임한 후 바로 파키스탄을 떠났던 무샤라프는 2007년 11월의 계엄령 선포 당시 차우드리를 포함한 네 명의 판사를 구금한 혐의와, 베나지르 부토와 악바르 칸 부그티(발르치 족 민족주의자)의 살해에 대한 책임 그리고 2007년 이슬람교도들이 피신해 있던 붉은 이슬람교 사원을 공격했던 혐의 등으로 기소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예비역 장성이자 전직 대통령은 4년간의 망명생활 끝에 여러 가지 범죄 혐의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입후보하기 위해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출마하려고 했던 선거구 네 곳의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그의 입후보를 거부했다. 그는 체포되어 가택연금을 당했다가 앞선 네 가지 사건에 대한 보석금을 내고 자유를 되찾았다. 비록 그에 대한 소추가 어떤 가시적 결과를 낳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런 식의 처우 자체가 이미 군에 대한 전례 없는 모욕으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대법원의 행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항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법률가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들을 분열시킨 첫 번째 요인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파키스탄 국민당이 공격을 받자 이 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변호사들이 가장 먼저 거리를 두었다. 크리켓 챔피언 출신으로 지난 번 선거에서 두 번째로 많은 득표를 했던 임란 칸(3)이 이끄는 파키스탄 테릭에인샤프 당(PTI)의 법률가들은 계속해서 차우드리를 지지했다.
대법원장의 무모한 도박
정치적 제휴와 관련된 이 같은 분열을 넘어서서, 법률가들의 저항운동을 이끌었던 많은 지도자들과 지지자들은 대법원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선거를 통해 출범한 정부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을 비난하고 나섰다. 2012년에 대법원 변호인단협회 회장으로서 가장 권위 있는 비정부기구인 파키스탄 인권위원회의 공동설립자이기도 한 아스마 자안지르는 대법원의 방식이 의회의 권위를 서서히 약화시키고 있다며 불안해했다. 2012년 8월에 질라니의 운명이 결정되었을 때 그녀는 이 날이 파키스탄 사법부에 ‘조종(弔鐘)이 울린 날’이라고 단정 짓고 “우리는 강한 사법부를 원하는 것이지 위압적인 사법부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4)라고 일괄했다. 같은 해 8월 27일, 대법원은 스위스 관계당국에 서한을 보낼 수 있는 기한을 질라니의 후임인 라자 페르바이즈 아슈라프에게 더 주어야만 했다. 결국 서한은 발송되지 않았는데, 대법원은 선거에 개입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압력을 완화시키기로 결정한 듯하다. 그러나 그 뒤로 파키스탄의 언론에서 차우드리의 이미지는 희생자나 구원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포퓰리스트(populiste)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해졌다.
지식층이 그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 이유 중 또 하나는 그가 일부 이슬람교도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관계는 국가정보원에 소속되어 있던 군인 출신들을 동원한 실종자 문제를 중심으로 맺어졌다. 그들 중 한 명인 칼리드 카와자는 인권옹호평의회를 설립했고, 이 단체는 2006년 11월에 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차우드리는 이에 화답하여 수사를 지시했고, 그 결과 국가정보원이 불법으로 감금하고 있던 회교도들이 2007년 8월(이때 그는 정직을 당한 상태였다)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심지어 일부 판사들까지도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지난 해 8월, 5년 전 그를 지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던 도시 라호레의 변호사 협회는 대법원장이 정치인들에게 대해 ‘법정모독’의 개념을 남용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나섰는데, 한마디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본 것이었다. 그밖에도 이 협회는 대법원장이 선거관리위원회의 권위를 무너뜨렸다고 비난했다. 모든 선거를 관리할 책임을 맡은 이 위원회는 대통령 선거일을 8월 초로 정했는데 지난 해 봄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승리한 샤리프 총리는 이 날짜가 자신에게 안 맞는다며 대법원에 소청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선거관리위원회가 정한 일정을 법적으로 승인하거나 유보하는 대신 선거일을 며칠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이런 결정이 내려지자 파키스탄 국민당을 포함한 세 개의 정당이 선거를 보이콧했으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사임했다.
물론 차우드리는 과거에는 흔히 민간인 지도자나 군 지도자들을 위해 일했던 사법기관에 존엄성을 돌려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몇몇 군 지도자 출신들을 통해 군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앞서 많은 행정부 수반들이 그랬듯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는 법조계 내에서 그를 충심으로 지지하던 사람들 중 일부를 잃었다.(5) 그는 얼마 안 있으면 은퇴할 나이가 된다. 그가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현재 계류 중인 사건들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처리하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사법부 요직에 앉힐 것이라는 것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2013년 말에 누가 군 지도자로 임명될 것인지 말고도 누가 신임 대법원장이 될 것인지를 특별한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글·크리스토프 자프를로 Christophe Jaffrelot
국제문제 연구소 (Centre d’études et de recherches internationales : CERI) 시앙스 포 (Science po), 국립과학연구소 (Centre national des recherches scientifiques) 연구원. <파키스탄 신드롬 (Le Syndrome pakistanais)>, Fayard, Paris, 2013의 저자.
번역·이재형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박사과정 수료. 전문번역가.
(1) Laurent Gayer, ‘판사들과 맞선 장군 : 파키스탄 사법관들의 프롱드 반란(Le général face à ses juges : la fronde de la magistrature pakistanaise’, Critique internationale, n° 42, Paris, 2009 1-3월.
(2) ‘Asghar Khan Case Short Order : Full Text’, The Express Tribune, Islamabad, 2012. 10. 19
(3) Lire Ashraf Khan, ‘보수 정당들에게 맞선 크리켓 선수 Un joueur de cricket contre les partis traditionnels’, Le Monde diplomatique, 2013. 4월
(4) Qaiser Zulfikar, 〈PM Contempt : Asma Jahangir Terms August 8 as “Black Day in Judicial History”〉, The Express Tribune, 2012. 08. 08.
(5) Hasnaat Malik, 〈“Cold war” between bar and bench intensifying〉, Daily Times, Islamabad, 2013. 0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