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금융 체제의 확대 재생산 우려

국회동의 회피하는 편법...이득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 방식

2009-04-04     유철규

지난해 9월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계기로 폭발한 글로벌 금융위기가 진행된 6개월 동안 미국 정부는 천문학적 액수의 구제금융을 조달했고, 기준금리를 거의 제로 수준으로 내렸다. 그럼에도 금융위기의 여파는 전세계에 걸쳐 여전히 확산 과정에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경제위기가 정치·사회적 위기로 전화할 조짐까지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 최대 보험사로 알려진 AIG의 공적자금 남용과 임직원에 대한 보너스 지급 문제가 언론에 터져나오면서 미국 내에서도 심각하다. 이는 국민 대중의 격렬한 분노를 야기했다. 이에 따라 금융위기는 더 이상 경제불황 따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사회·경제 체제 전반의 불안을 수반하는 정치적 문제로 바뀔 가능성마저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 상·하원을 필두로 정치권이 서둘러 소급해서 보너스를 회수할 수 있는 법안들마저 내도록 몰아가고 있다.
AIG 문제가 일부 드러난 직후 미국의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연방준비은행이 향후 6개월간 3천억 달러어치의 미국 장기국채를 매입하고, 모기지 대출기관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이 발행한 모기지 증권과 채권을 매입하는 등 최대 1조1500억  달러를 직접 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 3월 23일에는 재무부, 연방예금보험공사,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참여하는 민관 합동 투자펀드를 만들어 최대 1조 달러의 은행 부실자산을 매입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중앙은행이 은행이나 금융시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돈을 푼다는 의미의 양적 완화정책은 흔히 “헬리콥터로 돈 뿌리기” 정책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번 미국의 양적 완화 정책과 은행의 부실자산 정리 계획은 국회의 동의와 승인을 회피하는 편법이라는 측면에서 즉각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양적 완화 정책은 ‘될 때까지 돈을 푸는’ 사실상 무제한 통화 방출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따라서 분명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금과옥조로 붙들고 있던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통화가치 유지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고, 이에 기반한 ‘시장친화적’ 금융정책의 파탄을 인정하는 일이다.
논쟁의 배경이 되는 것은 달러가치의 포기로 비쳐질 수 있는 이번 정책이 불환지폐 유통의 근원인 신뢰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 중국이 달러 기축통화의 지위를 문제 삼고 나섰으며, 러시아·브라질 등 신흥시장국은 물론 유엔의 일부 기관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달러가치의 폭락이 초래된다면 이번 위기가 단기간에 해소될 가능성은 오히려 훨씬 줄어든다. 달러표시 채권의 투매가 생긴다면 정책 의도와 정반대로 금리가 급등할 수도 있다. 만약 이번 정책을 주도한 벤 버냉키 FRB 의장의 의도대로 경제가 회복된 후 다시 금리를 올려 달러가치를 유지하려 하는 경우에는 또 다른 위험이 존재한다. 이번 금융위기가 2005~2006년의 금리 인상을 시발점으로 했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 버블의 붕괴에 대처하기 위해 국제 공조를 통한 세계 동시 금리 인하와 유동성의 강제적 확장이 있었고, 여기서 초래된 유동성 버블을 추스르기 위해 실행한 금리 인상이 결국 서브프라임 사태를 현실적으로 촉발했다. 어쩌면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이러한 위험에도 달러 발권을 통해 금융 부실을 처리하려는 미국의 이번 정책들이 갖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월가의 금융 세력이 갖고 있는 기득권과 권력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문제를 해결하려는 편법이라는 점이다. 국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공적자금을 조달해 은행을 국유화하는 정면 대처 방법을 택하지 못하는 미국, 그래서 금융 부실 책임을 져야 할 월가의 손에 부실의 처리를 맡기려는 미국의 모습이다. “손실은 국민과 납세자와 후손에게 사회화하고 이득은 월가로 사유화”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위기의 반복을 막을 수 있는 금융체제의 재구축을 기대할 수 없다. 이번 위기를 낳은 금융체제를 확대하고 유지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 납세자 상위 1%의 소득 비중은 1930년대 대공황 직전에 20%를 훨씬 넘어섰고, 1960~70년대 초에는 10% 선까지 하락했다. 그것이 이번 위기를 앞두고 다시 20%대에 이르렀다(그림 참조).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번 경제위기의 경제체제적 근원을 개혁하고 금융위기를 순리에 따라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난 1980년대 이후에 나타난 기이한 소득 불평등을 되돌리는 일, 다시 말해 지난 수십 년간 자본계급의 최상층에 집중되었던 경제적 기득권과 정치적 특권을 축소시키는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위기 대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유철규 = 서울대 경제학 박사로 매사추세츠대(애머스트)와 옥스퍼드대(성앤터니칼리지) 연구원을 지냈으며 주요 저서로는 <혁신과 통합의 한국 경제모델을 찾아서>(2006) 편저,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2004) 편저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