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는 베네수엘라 경제에 약이 될까?
지난달 베네수엘라는 국채로 수입 식료품 대금을 지불했다. 외환 보유고 부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정책적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세계 수위의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석유 수출로 돈을 벌어들이는 만큼 어려움도 겪고 있다. 오일 머니가 국내 경제 활성화를 위해 쓰이는 대신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 우유, 밀가루, 오일, 화장지 등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지하경제는 성업 중이다. 거리 상인들은 똑같은 제품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판다. 베네수엘라인들은 예전에도 이따금 생필품 부족 사태를 겪긴 했지만, 올해 초부터 악화된 상황으로 일상화된 궁핍을 견디고 있다. 거기에 인프라 미비로 단수, 정전 사태까지 겹치면서 고통은 배가된다. 욕조가 있는 가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물을 가득 채워놓는다. 모두들 냉장고에 비축해둔 식료품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지난 몇 주 동안 거의 매일 인플레이션과 생필품 부족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볼리바리안 정부는 반정부 세력, 재계, 미국 정부가 합심하여 경제적 사보타주를 펼치고 있다고 비난하는 반면, 우파는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의 실책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논쟁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간다. 사실상 관건은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 중 하나인 베네수엘라가 그 자연자원에서 얻는 이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있다. 1999년 우고 차베스가 집권하기 전까지는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엄청난 이윤을 대부분 석유회사가 차지했다. 차베스는 대통령직에 오르자마자 행동에 착수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유가 인상을 위해 맹렬히 활동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석유회사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강제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의 석유회사들이 국가에 지불하는 세금 비율이 몇 년 사이 30%에서 70%로 급증했다.
물자부족이라는 난관에 봉착
오일달러들이 국고에 쌓여가고, 2003년 석유생산 중단으로 차베스 정권을 뒤엎으려던 반정부 세력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볼리바리안 혁명의 성공은 이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화폐 정책을 도입하느냐에 달려있었다. 노르웨이처럼 오일달러를 위기 대비용으로 비축하거나, 카타르처럼 호화로운 거대 인프라 건설에 투입할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면, 복지와 빈곤 퇴치 프로그램에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신생 볼리바리안 정부는 세 번째 해결책을 선택했다. 2002년 쿠데타 시도 불발 이후 중요한 문제가 된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한 환율 통제 정책이 병행됐다.
이 정책 덕분에 베네수엘라 인구가 증가하고 칼로리 소비량이 1998년에 비해 50% 증가했다. 빈부 격차도 다른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비해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석유 이윤을 빈곤층에 재분배하는 정책은 인플레이션이라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내수가 석유 생산보다 빠르게 증가할 경우 물가 상승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1983년 2월 18일(‘검은 금요일’), 외채 위기로 갑작스럽게 통화가치를 절하해야 했던 베네수엘라는 그 후 20여 년 동안 물가상승 문제에 시달려온 터였다. 차베스 이전 두 번의 대통령 임기 동안 평균 인플레율은 연간 52%에 달했다. 이 문제는 볼리바리안 정부에게 중요한 도전과제 중 하나였다. 1999~2012년 연간 인플레율은 22% 수준에 머물러 목표가 일부분 달성됐다. 그러나 지난 3월 차베스 서거 이후 다시금 인플레율이 급증하여 올해 9월에는 49%까지 치솟았다.
베네수엘라가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경제적 문제는 물자 부족 사태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BCV)은 1년 사이 그 규모가 2배 가까이 늘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지역 유지들이 정부 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물자 공급을 막고 암시장 투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두로 대통령은 10월 8일 국회 연설에서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베네수엘라 경제는 지금 국가 생산 체제가 투기, 독점, 밀수, 불법 외환 거래 등의 공격을 받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다.”(1)
마두로 대통령은 현 상황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 직전의 칠레와 비교한다. 당시 미국 CIA의 지원을 받던 칠레의 민간 기업들은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위해 고의로 물자 부족 사태를 야기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반정부 세력은 현 사태를 정부의 실책 탓으로 돌린다. 양자의 주장 모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재계의 음모를 비난하고 있지만 그럴 여지를 준 책임이 있다. 기업들이 생산과 유통에 대한 합법적인 투자보다 암거래, 밀수, 자본 유출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공공정책 어딘가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를 위한 외환통제인가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호령하는 이때 일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볼리바리안 정부의 시도가 성공할 확률은 높지 않다. 1970년대 초 칠레, 1980년대 니카라과 역시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다. 양국에서 그러했듯이, 현재 베네수엘라에서도 자본주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정치적 의지는 대규모의 자본 유출과 통제 불능의 사회 불안을 야기하게 마련이다. 물가와 환율 통제를 통해 제한적이나마 안정을 되찾은 다음에는, 물자 부족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대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베네수엘라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석유 생산 덕분에 무역과 환율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유만으로는 환율 안정을 담보할 수 없다. 더욱이 석유 생산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베네수엘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민간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언제라도 더 수익률이 높은 곳으로 거대 자본을 옮길 준비가 되어 있다. 차베스에 이어 마두로 정부 역시 외환관리위원회(CADIVI)를 자국 통화 보호를 위한 중심 메커니즘으로 삼고 있다. CADIVI는 베네수엘라인이 공식 환율에 따라 볼리바르와 달러를 교환할 때 조건을 규정한다. 환전은 국내 시장에 공급되지 않는 제품을 수입하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해외 거주 가족에 송금하거나, 인터넷에서 일부 상품을 구매할 때로 제한된다.
정부가 외국 통화에 대한 접근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허용할 경우, 암시장 환율과 인플레율은 적정 수준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소비재의 70%를 수입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물가 급등을 막기 위해 유리한 환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 때문에 국내 시장에서 주기적으로 가치가 하락하는 볼리바르화의 실제 가치와 외환시장에서 높게 유지된 명목가치 사이의 격차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베네수엘라 산업계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국내 제품 생산비가 수입품 생산비보다 빠르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국내 생산자들이 경쟁에서 밀려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정부가 외국에서 생산되는 제품만 수입을 허가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조처가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령, 기초 식료품의 대부분은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되지만 국내 수요를 모두 감당하기에 부족한 양이다.
외환 통제가 야기하는 문제는 또 있다. 볼리바르화가 국내시장에서는 가치가 하락하고 외환시장에서는 높은 가치를 유지할 경우, 공식 환율과 암거래 환율 사이의 격차는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다. 덕분에 정부 환전소와 연줄이 닿는 것이 큰 특권이 된다. 가령, 베네수엘라의 사립대학 1년 등록금은 2010년 초 4만6000볼리바르(약 1만 달러) 정도였는데, 오늘날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볼리바르화의 국내 가치가 그 사이 50% 하락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3년 새 대학 등록금이 반쪽이 되어버린 셈이다. 전반적으로 환율 통제 정책으로 이익을 보는 쪽은 부유층이다. 해외여행이나 유학을 떠나거나, 해외 거주 가족에게 송금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달러 구매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2012년 이 세 가지 목적으로 CADIVI를 통해 구매한 외화는 총 58억 달러로 전체의 20%에 달했다. 결론적으로, 베네수엘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북미에서의 외화 유입보다 송금이 더 많은 나라다.
정부는 암거래 척결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정부 허가 없이 해외 송금이 불가능하지만, 편법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가령, 국내와 해외에 동시에 계좌가 있는 중개인에게 부탁하면 된다. 중개인은 국내 계좌에 돈이 입금되면 해당 금액을 미국 계좌에서 출금할 수 있도록 해주면 그만이다. 의뢰인은 수수료를 내더라도 암거래보다 유리한 환율 덕분에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쉽게 빠져나가는 돈의 흐름을 통제한다는 것은 정부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화려한 ‘석유 잔치' 뒤로
커져가는 사회불안
2013년 초부터 외환 통제 정책의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다. 첫째 이유는 차베스의 암 투병과 서거로 인한 권력 공백기를 틈타 반정부 세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경제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려는 재계의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올해에만 식용유와 기초 식료품이 가득 쌓인 창고들을 여러 차례 적발했다. 물자 부족 상황을 악화시키려는 의도로 사재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서투른 대응도 문제다. 2013년 2월 베네수엘라 정부는 볼리바르화 공식 환율을 32% 절하하면서 채권 기반 외환거래 시스템(SITME)을 폐지했다. 차베스 서거 한 달 전에 발표된 이 두 조처로 한 달 만에 인플레율이 2.8% 뛰는 등, 베네수엘라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베네수엘라 국민은 이런 혼란 속에서 저마다 살 길을 궁리하고 있다. 여유 자금이 있는 이들은 계속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안전한 투자처를 물색하고 있다. 최상위층부터 순서대로 부동산, 자동차 시장, 주식의 순서로 투자한다. 주식의 경우 2013년 1~10월 사이 세계 최고 수준인 165% 상승폭을 기록했다. 2003년 외환 통제 조처가 도입된 후부터 이 세 시장은 인플레 상승률을 추월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달러는 여전히 안전자산으로 인기가 높다. 올해 초 인플레율이 급등했을 때(5월 6.1%),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달러 암시장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암거래 환율은 더욱 치솟았다. 이 비공식 환율이 대부분의 상거래에서 상품 가격 책정의 기준이 되다 보니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각해지고 달러 구매 수요가 추가로 증가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공식 환율과 현지에서 거래되는 실제 환율 사이의 격차 증가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초래한다. 국가 지원으로 생산된 제품(대부분 식료품)이 이웃나라로 불법 수출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국경 지대에서는 우유, 오일, 쌀 등을 싣고 콜롬비아, 브라질, 가이아나 등지로 향하는 트럭의 행렬을 자주 볼 수 있다. 세관원들에게는 이 제품의 국내외 가격차로 얻는 이익 중 일부를 떼어주면 그만이다. 덕분에 국내 물자 부족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주권 수호를 위한 반자본주의적 정책으로 도입된 외환 통제 시스템은 결국 부유층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는 셈이다. 공식적 통로로 환전이 가능한 특권층은 유리한 가격으로 상품을 구매해 암시장에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내다팔아 큰 이익을 남긴다. 현재 그 수익률이 통상 100~500%에 달한다고 한다.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10월 8일 마두로 대통령은 부패 척결과 경제 재건을 위해 국회에 대통령령에 의한 통치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뒤이어, 라파엘 라미레즈 국영석유회사(PDVSA) 사장 겸 경제 부통령은 주당 1억 달러의 거래를 허용하는 ‘경매’ 방식의 새로운 시스템(SICAD) 도입을 발표했다. 그러나 상당수 경제학자들은 과거의 SITME를 대체하기 위해 도입된 이 방식이 현재의 수요를 감당하고 암거래를 억제하기에 역부족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정부의 경제 통제를 강화하는 것만이 자본 증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가령, 금융 부문의 완전한 국유화나 수입에 대한 통제 강화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과거 차베스 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이런 해법에 우호적이지만, 마두로 정부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의 심각한 상황은 베네수엘라가 산유국이라는 사실과 비자본주의 체제를 건설하려는 시도에서 기인한다. 자유주의의 대양 속에 사회주의의 섬을 세우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집단적인 자본 유출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오일 머니가 있다고 해도 바꿀 수 없다. 오일 머니는 벌어들인 속도만큼 빠르게 빠져나가고, 그 뒤에 남은 국민은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 사회 불안에 지쳐갈 뿐이다.
글·그레고리 월퍼트 Gregory Wilpert
<Changing Venezuela by Taking Power> (Verso, 런던, 2007)의 저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리듬분석> 등이 있다.
(1) <El Universal>, 카라카스, 2013년 10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