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파의 이념적 혼란

알랭 소랄의 재구성

2013-12-11     에블린 피에예


좌파의 야망 결핍이나 무능력은 결국 자신들의 가장 ‘건설적인’ 아이디어들을 극우파에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극우파는 좌파의 아이디어들에 자신들의 열망과 호전성, 그리고 국가적, 종교적 강박관념을 천천히 주입한다. 알랭 소랄은 ‘노동의 좌파, 가치의 우파’라는 기이한 혼합적 표현을 통해 인터넷 스타가 되었다.

사이트를 클릭하면 ‘그들’은 함께 방문자를 맞는다. 화면 왼쪽에는 유고 차베스와 에르네스토 게바라, 무암마르 카다피, 파트리스 루뭄바, 토마스 산카라가 반기고, 마흐무드 아마딘자드와 피델 카스트로, 블라디미르 푸틴이 환영한다. 그리고 화면 오른쪽에는 잔 다르크와 이런 제3유형의 만남을 주선한 알랭 소랄이 있다. 이 인물들은 무정부주의 단체의 깃발이 그려진 검은 색 바탕화면 위에서 ‘평등과 화해(E&R)’라는 인터넷 사이트의 이름과 그것의 금언이라 할 “노동의 좌파, 가치의 우파”의 문구를 빙 둘러싸고 있다. 이 사이트는 트래픽 순으로 방문 순위를 매기는 알렉사 분류사이트에서 269위에 올라있다. 텔레라마보다 불과 9계단 아래다.

게바라와 푸틴? 차베스와 “가치의 우파”? 이 시대의 정치풍토는 도무지 기준을 알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들이 뒤죽박죽 서로 얽혀 있는 탓이다. 누가 무엇인가? 큰 질문이다. 좌파에 몸담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함축하며, 또 우파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프랑스의 우파적 경제인 단체 메데프(MEDEF)는 경영자협회 여름대학에 와서 “우리는 함께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회당 정권의 피에르 모스코비치 경제부 장관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공산주의자와 극우파의 동거

뿐만 아니라, 유럽문명연구집단(GRECE)의 공동 설립자이자 ‘신 우파’ 단체를 이끌었던 알랭 드 브누아는 자신이 (좌파가 주장하는) 은행 국유화와 융자제도의 공유화, 채무 변제 거부운동에 호의적이며, 엠마누엘 토드라든지 페리 앤더슨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경악한 경제학자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1) ‘경악한 경제학자들’은 2010년 가을, <경악한 경제학자들의 선언>을 발표해 2008년에 일어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계속 추진해온 유럽 정부들을 비난한 프랑스 경제학자들을 일컫는다. 또한 극우파 국민전선(FN)은 보호주의를 옹호하고 극좌파 중 일부와 공조전선을 펴며, 좌파전선과 마찬가지로 ‘인민의 지배력’에 대해 말한다. 그런 배경 탓에 2012년 마르세유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파전선의 후보였던 어느 공산주의자가 극우파 국민전선과 공조하는 충격적인 일까지 빚어졌다. 이런 일을 일회성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쩌면 안이한 태도일 수도 있다. 와즈 제2선거구의 보궐선거와 빌뇌브 쉬르 로의 보궐선거에서 사회당 표의 1%가 국민전선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안일하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혼돈의 징후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혼합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크 쥘리아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것은 ‘지도층(좌파든 우파든)에 대한 회의적 태도’(2)를 바탕에 깔고 있는 감정 변화의 미스터리일까, 아니면 분열을 초월하겠다는 선택일까? 왜냐하면 ‘양 극단’은 결국 만나서 유익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알랭 소랄은 매달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에 비디오를 올린다.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파(政派) 초월을 강조하며, ‘제도권’에 대한 저항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가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놓은 비디오는 모두 382개이며, 조회 수는 1억 5천만에 달한다. 사람들은 이 비디오들을 시청하면서, 혼돈의 정치적 혼합행위가 일회성이 아니고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고 한다.     

소랄은 이런 온갖 ‘소란’(이것은 소랄의 용어다)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열성적인 시민들에게 오직 그의 이름을 걸고 말한다. 티셔츠 차림의 그는 소파에 앉아 자연스러우면서도 주의 깊은 표정으로 현재의 상황과 역사의 의미를 설명한다.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 편의 소설을 쓴 그의 이력이 예술가로서의 감수성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의 이력은 그의 지적 용기를 증언해 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의 정치적 역정은 많은 사람들의 불안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공산당을 지지한 것에서 시작해(잠깐 동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민전선에서의 2년(2007~2009년)을 거쳐 2009년도 유럽의회 선거를 위해 풍자 코미디언 디유도네와 함께 반유대민족주의 단체를 설립하기까지 그는 모순과 단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역정을 수행하였다. 

 그는 자크 베르제스 변호사(2013년 8월 20일에 거행된 베르제스의 장례식 때 모습을 나타내어 경의를 표했다)나, 사회당 소속의 롤랑 뒤마 전 장관, 발라뒤르 내각의 미셀 루생 전 장관, 그리고 디유도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악의’를 차분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게다가 영국식 복싱 코치 자격증을 소유할 만큼 격투기를 열렬히 좋아하는 그는 당연히 강력한 문제의식과 사회적, 정치적 참여(그리고 이탈)의 비(非)순응주의로 특징지어지는 청소년기의 모습을, 그리고 동시에 소속도 없고 기댈 데도 없이 모두에게 맞서가며 분명히 이해하려고 애쓰는 자의 영웅적이지만 고독에 맞서는 개인적 모습을 신중하면서도 단호하게 보여준다. 대학교수의 사색하는 모습이나 정당 고위당직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이나 조합의 정치사상 교육을 받지 않은 대부분의 수많은 인터넷 이용자들이 한결 더 수월하게 그에게서 이념이라는 전리품을 얻어 가져갈 수 있게 된다.  

그의 말들은 감정적 변화와 주요 개념들의 혼란 속에서 만들어진다. 유럽의 단일법에 따라야 하는 개별 국가의 자율성 상실과 이들 국가의 국민이 ‘세계화’에 직면했을 때의 무력감, 경제적·사회적 퇴행 앞에서의 불안감, ‘혁신적 현대성’의 가치를 추구할 때의 불편함,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설계하기 힘든 어려움…. 소랄은 원래 만장일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정치 지도자들이 대담하게 결합한 후에 일어난 여러 문제들에 대해 분석하고 대답한다.  

세계평화란 이름의 민족말살 계획

우선, ‘세계주의’에 맞서야 한다. 즉, ‘세계정부를 세우고, 그 결과 전 세계의 평화를 이룬다는 핑계로 ‘인류의 완전한 상품화’(3)를 통해 민족들을 없애버리는 계획’에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계주의는 ‘꼭 그것이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역학관계도 아니고 계급관계도 아닌 것처럼’(비디오, 2013년 1월), 국민주권을 무시하고 시장만능주의의 신화를 유지하는 ‘과두제(寡頭制)적 지배’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억압받는 소수’만 갖고 있는 권리의 부여가 집단의 사회적 기득권을 대신하게 되어 내전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이른바 ‘발칸화(化)’로 이어진다. 즉 이 같은 일탈의 가장 생생한 증언은 ‘사회관계의 인종주의적 해석’이 ‘노동 대 자본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이슬람 교도들’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다시 말해 ‘혈통을 가진 프랑스인들’과 사회의 하층계급에 속하는 ‘아랍인들’의 대결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세계질서는 단지 ‘가장 부유한 자들의 권력’(비디오, 2013년 5월)이며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착취의 문제’(비디오, 2013년 5~6월)를 ‘사교계의 문제’로 바꿔놓는 추상적 평등주의를 옹호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지배하기를 바란다. 즉 인간의 권리를 위협하는 것은 곧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랄은 ‘프랑스에 그 주권을 돌려주는 한편 민주주의에 그것의 의미를 약간 돌려주기 위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벗어나고, 프랑화를 다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또 ‘세계화된 경제에 직면한 국가들의 낙후성’에 맞서 싸우고 보호주의를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소랄은 심지어 사람들에게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좌파’를 찾고 있다고 믿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프랑스적 보편주의에 대한 좌파의 배반’인 식민화와 신식민주의를 비난하고, ‘민족 간, 종파 간 긴장의 도구화’가 계급투쟁을 와해시킨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다극화 세계를 원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그는 사회운동과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으며, 오히려 ‘엘리트 계급’과 미디어가 합법화하는 ‘금융적 우파와 절대자유주의적 좌파의 교차동맹’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더 많은 영감을 얻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진짜 강박감은 사회 정의라기보다는 오히려 프랑스를, 그가 볼 때 프랑스가 상징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나는 프랑스를 구해내고 싶다”, 비디오, 2012년 9월, 제3부). 바꿔 말하자면, 그에게 정치는 도덕보다 덜 중요하고 혁명은 민족보다 덜 중요한 것이다. 도덕은 우리가 그의 직업생활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에서의 도덕이고, 민족은 우리가 집단생활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에서의 민족이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에서 착취보다 훨씬 더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충동에 열중하는 사회’(비디오, 2013년 5월)를 만들어냄으로써 집단적인 것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그래서 이기주의와 경쟁정신, 쾌락 추구를 자극하고 꽃피워서 정치의식도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직 민족만이 ‘조국도 없고 도덕도 없으며 오직 개인적인 만족만을 초월하는 가치들을 타락시키는 전 세계적 이익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는 데 적합하다’는 도약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

유대감 적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그런데 민족은 여기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분명히 민족은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기주의와 ‘범세계적 이익’을 거부하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한편으로는 민족이 특수한 문화에 적합한 유일한 본질이고 재능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도덕심이 없는 세계인을 배제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초국가적인 법에 직면하여 주권을 요구하다 보면, ‘모든 금융망과 세계화된 극단적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애국적이며 대중적인 노동전선’(4)을 형성하게 해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거의 신비주의적인 개념에 의지하게 된다. 이것은 ‘노동과 부가 더 정확하게 분배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전통 속에 존재하는 좋은 것과 절도 있는 것, 인간적인 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며 ‘역사와 문화를 의식하는 우애 있는 국민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헬레니즘-기독교적 전통은 실제적인 평등을 요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소랄에 따르면, 물질주의가 야기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옛날에 물질주의를 견제했으며 종교나 공동체주의, 혹은 프랑스적 보편주의로 상징되는 영적인 힘을 되찾아야 한다. 즉 우애감과 자신 및 타자의 존경심, 전체와 연관된 개인이라는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은 본질상 반자본주의적인 실체로서, 의식적이든 아니든 신자유주의의 모든 주체들(즉 좌파 쪽에는 투쟁이 ‘권리상의 평등’으로 축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우파 쪽에는 ‘그들의 특권을 보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여기서 배제된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욕구와 특징들보다 더 큰 공통적 가치를 분배하는 데 있어 결집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광신적인 종교’가 되어버린 세속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시민의 혈통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동화된 이슬람교도 프랑스인들은 ‘미국식의 자유주의적이며 범죄적인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유형(流刑) 게토 출신의 새로운 빈민 세대’와는 달리 ‘프랑스에는 행운 같은 존재들이다.’ 유대감의 적은 또한 비생산적인 것, 탐욕스러운 것, 향락적인 것, 즉 개인주의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제물을 죽이는’ 평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집단주의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진보주의자들’과 모든 ‘반동주의자들’은 동질적인 두 집단을 구성하지 않는다.

외국인 혐오주의와 포퓰리즘 경계해야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는 민족정신을 가진 진정한 국민을 정의해야 하는 일이 중요하다. 가짜 대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분열이나 진부한 생각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는 이 국민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가까울 수도 있는 소시민 계급과 프랑스 산업연맹과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소규모 상점 주인들을 포함한다. 농민들과 노동자들, 중소기업가들은 모두 함께 ‘소규모 시민 생산자들이 서로를 돕는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데, 각자에게 ‘경제적이고 사회적인(따라서 정치적인) 책임은 그의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소랄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나 피에르 푸자드에 가깝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로부터 무척 멀리 있다.

이 훌륭한 ‘화해’의 사회는 반자유주의적 우파와 급진적 좌파에 공통된 목표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경제적·사회적 좌파의 동맹자인 도덕적 우파가 존재한다. 그리고 반대로 그것의 가장 최근 버전이자 가장 갑작스러운 버전 속에서 경제적 우파의 이데올로기적 조건으로 드러난 비도덕적인 좌파도 존재한다. ‘노동의 좌파, 가치의 우파.’ E&R의 슬로건에서 사회적 좌파는 민족의 가치가 담고 있는 초월의 의미를 통합하며, 계급투쟁은 다양하면서도 통합된 사회에서는 소멸된다. 신자유주의의 비도덕적인 좌파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승리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승리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음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부자연스러운 것, 신자유주의에 우호적인 주장들이 이토록 널리 전파되고 있는 것, 또 반대의 소리가 이토록 약화돼 있는 것은 빌더버그나 삼극위원회(Trilateral) 류의 상류층을 위한 새로운 프리메이슨의 ‘세기의 저녁식사’(5) 같은 비밀스러운 조직망들이 제국의 결정기관에 깊이 침투하여 정치행위를 약화시키거나 부패시켰기 때문이다. 과두제는 작전과 여론을 준비하고, 음모에 음모를 거듭하며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테러나 시리아 내전 같은 위협을 만들어낸다.

이 같은 사실은 오직 테러 위협만으로 이 카스트적 세계지배에 대립할 ‘저항의 이슬람교’와 동맹자들에 대한 소랄의 지지를 정당화한다. 이 음모의 한가운데에는 떠돌아다니지는 않지만 최소한 본질상 민족과 무관하며 게다가 자본 축적으로 버티고 있는 탐욕스러운 미국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유대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은행도 유대인의 것이고, 언론도 유대인의 것이며, 민족적 통일성의 파괴자도 유대인이다. 소랄은 그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매혹된 증오심을 품고 있다. 그는 어디서나 그들을 본다. 분명히 그로서는 반유대인주의나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반대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팔레스타인 국민들에 대한 지지나 자유주의적이라고 가정되는 도발에 찬성하는 것으로 기록되는 취향의 표현이 아니라 그냥 반유대주의일 뿐이다. 그가 그의 출판사인 콘트르 쿨투르에서 반유대주의의 고전들(에두아르 드뤼몽, <유대인의 프랑스> 등)을 다시 펴낸 것은 굳건한 확신 때문이다. 애매한 부분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이 편집광적인 분출만으로는 그의 지지자들이 그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도록 만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프리메이슨단과 유대인, 일루미나티 등의 ‘음모’ 이론은 지금 널리 퍼져 있으며 역시 빈번하게 일어나는 ‘엘리트 계급’과 ‘과두제’에 대한 공격이 전혀 완화시키지 않는 그 엄청난 무력감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또한 그것은 이따금 사실상 비밀이 유지되는 협정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간단하게 말해서, 살바도르 아엔데를 전복시킨 쿠데타를 준비할 때 미국과 칠레의 몇몇 경영자 간의 관계는 어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자본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당들 위에서 무엇보다도 도덕적이고자 하는 이런 유형의 성찰이 너무나 빈번하게 그다지 반자본주의적이지는 않지만 외국인 혐오주의가 배어 있는(파시즘이 배어 있지는 않으나) ‘붉은색-갈색’ 포퓰리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소랄의 사이트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 모두가 장차 파시스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경박한 일이다. 그의 담론에서 애매모호한 부문이 방문자의 이탈을 용이하게 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역시 경박한 일이 될 것이다.


 

알랭 소랄은 누구?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1958년에 프랑스의 엑스레뱅에서 태어난 그는 1990년대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활발히 활동했지만 공산당이 근본적인 혁명의 성향을 달리한다고 판단해 당을 떠났다. 1992년에 유럽연합을 인정하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체결될 때는 조약에 열렬히 반대하는 운동을 펴며 프랑스의 독립주의를 추구했다.
1996년 출간한 <바람둥이의 사회학>으로 에세이스트로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는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소비문화 사이의 관계를 상세하게 분석하며 소수계층이나 소외된 계층이 본래의 지배세력에게 이용당한다는 주장을 펴서 주목받았다. 올해 초 국내에 번역 출간된 <그들이 세상을 지배해왔다>(갈라파고스)에서는 소외된 계층을 이용하는 것을 넘어 ‘금융’을 통해 전 세계를 운영하고 있는 세력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했다.
2005년부터는 자본주의와 극단적인 자유주의의 격랑과 투쟁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라고 판단해 국민전선에서 활동했으나 회의를 느끼고 2009년에 탈퇴했다. 지금은 2007년에 자신이 직접 창립한 단체 ‘평등과 화해’의 의장을 맡고 있다. ‘좌파적 민족주의’의 이념을 지닌 이 단체는 인종주의를 배제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아랍 이주민들과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번역·이재형
한국외국어대 불어학과 박사과정 수료. 역서로 <프로이트 평전> 등이 있다.

(1) Elements, n。146, Paris, 2013년 1~3월.
(2) Marianne, Paris, 2013년 6월 29일.
(3) Alain Soral, 제국 이해하기, 글로벌 지배가 될 것인가, 국가들의 반발이 될 것인가? (Comprendre l'Empire. Demain la gouvernance globale ou la revolte des nations?) Blanche, Paris, 2011.
(4) Charte d'E&R.
(5) 파워 엘리트를 위한 만찬 ‘르 시에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