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계 속의 악마

2013-12-11     르노 랑베르


음악을 일상적으로 연주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피아노 건반을 치거나 기타 줄을 튕겨본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위가 자신의 영혼을 위태롭게 만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표들 뒤에 숨어 이리저리 배회하는 악마가 있었다. 아니, 적어도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 이후 중세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완벽함은 수와 조화의 완벽함을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중세 대학에서 가르치던 4개 기본 과목이 산술, 기하, 천문학, 그리고 음악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 이 학문들은 불가분의 관계로 여겨졌다.

교회는 ‘신성한’ 음정과 그렇지 않은 음정을 엄격히 구분했다. 차마 듣지 못할 영역으로 밀려난 대표적 음정이 있었으니 바로 감5도(또는 증4도)(1)이다. 당시에는 이 음정을 ‘음악 속 악마’라고 불렀다. 영국 그룹 블랙사바스의 동명 곡인 ‘블랙 사바스’의 도입부를 콧노래로 흥얼거릴 때 들리는 음정이다. 이를테면 도와 파#으로 이루어진 3온음(triton)은 천상의 화음을 찢어버리는 소리, 악마를 유인하는 현상으로 취급됐다.

종교인들의 이러한 반응은 그저 지옥 유황불 냄새가 연상되는 소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1863년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화음이란 우주 공간이 아닌 인간의 몸속에서 탄생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2) 그는 ‘음악 이론의 생리학적 기초’에 대한 논문에서 모든 소리는 명확한 주파수를 지닌 정현파(正弦波)에 해당하며, 서로 다른 두 개의 음이 형성하는 진동이 듣기에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음을 밝혀냈다. 수도자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8도, 5도 또는 장3도의 가득 찬 울림 속에 자신의 두개골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고, 이를 통해 어떤 완벽한 형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3온음을 비롯한 안어울림 음정들은 귓속을 ‘두드리는’ 느낌을 준다고 보았다. 헬름홀츠는 수도자들이 두려워한 이 느낌을 피부를 할퀼 때의 느낌에 비유하기도 했다.

악마를 유혹하는 3온음

뒷전으로 밀려났던 감5도의 음정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시금 각광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 동안에도 지구상 어디에선가는 끊임없이 사용됐겠지만 말이다. 재즈에서 ‘블루노트’의 반열에 오른 이 음정은 1940년대 미국에서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 등의 연주자를 중심으로 등장한 음악 조류인 비밥(bebop)에 매우 독특한 색깔을 입혔다. 작가 겸 음악가인 제임스 링컨 콜리어는 음악의 ‘악마’가 음악의 ‘상징’(3)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저 우연일까?

음악이론가인 자크 샤이에(4)에 따르면 서양음악의 특징은 새로운 음들을 점진적으로 ‘흡수’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속이 비어있는 플라스틱 관을 하나 들어보라. 기왕이면 안쪽 표면에 홈이 나있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관을 빙글빙글 돌려보라. 그럼 어떤 음이 들릴 것이다.(5) 그 음을 도라고 치자. 관을 좀 더 빨리 돌리면 한 옥타브 간격의 1차 조화음이 들린다. 이 음 역시 도에 해당하지만 소리가 더 날카롭다. 돌리는 속도를 조금씩 높일수록 5도(솔), 3도(미), 7도(시b), 9도(레)의 음정이 들리고, 팔을 더욱 재빨리 휘두를 수 있다면 그 유명한 3온음을 이루는 두 번째 음인 11도(파#)가 들릴 것이다. 샤이에에 따르면, 이른바 정통음악은 화음을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흡수하면서 들어줄 만한 소리의 영역을 점차 확대해왔다. 즉 중세시대에는 3도, 르네상스 전후에는 7도, 18세기부터 9도, 그리고 리차드 바그너와 클로드 드뷔시에 이르러 3온음을 흡수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사실 음악 속의 ‘악마’는 드뷔시가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나른한 도입부를 선보이기 훨씬 전부터 그 뿔을 들이밀고 있었다. 음악은 하늘의 별 대신 지상의 영혼과 가까워지고, 신적 완벽성 대신 인간에 관심을 가지면서 조금씩 3온음을 길들여왔다. “단 (3온음이 유발하는) 일시적 긴장을 즉시 어울림음으로 해소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고 작곡가 도미니크 베르트랑은 말한다.(6) 17세기에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주도로 딸림7화음(미-시b의 3온음이 포함된 도-미-솔-시b)을 베르트랑의 표현대로 ‘작곡가의 팔레트’에 도입하기에 이른다.

불협화음은 악마의 음정?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음악은 선법(旋法 Modality) 단계에서 조성(調性 Tonality) 단계로의 이행을 마무리 짓는다. 선법 단계에서는 모든 음이 동일한 음계에서 비롯되는 반면, 조성 단계에서는 서로 다른 음계에서 비롯된 서로 다른 화음들이 곡이 진행됨에 따라 어우러지며 선율이 발현되는 환경을 만든다. 딸림7화음과 그 속에 포함된 3온음은 이 성조에서 저 성조로 변화를 가능케 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 조화의 시금석처럼 여겨지던 신적 완벽성을 암묵적으로 포기했다.

베르트랑에 따르면 바로 이 시기에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하늘로 향해 돌렸고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 물려받은 우주의 최후 경계선인 항성천구를 깨부수었다. 이로써 우주의 중심은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겨졌고, 동시에 철학적 의문의 대상도 신에서 자아로 이동했다.” 여기에는 철학자 데카르트의 공이 크다. 1618년 발표한 <음악개론>에서 그는 조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이를 굳이 우주와 연관짓지 않았는데 당시로서 이런 시각을 가진 이는 매우 드물었다.

정통음악은 인간 영혼의 움직임을 점점 깊숙이 탐구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새로운 긴장감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해소하는 과정이 점차 늦춰지더니 언젠가부터 아예 해소조차 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이러한 프로세스를 ‘불협화음의 느린 해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불협화음의 해방’과 ‘불협화음에 의한 해방’은 한 걸음 차이다. 제임스 링컨 콜리에는 대중음악이 그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비밥이 등장하게 됐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미국에서는 시민권 운동이 체계를 갖추게 된다. 콜리에는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담론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선언’이었다고 말한다. 비밥 연주자들은 1930년대 재즈 뮤지션들이 그저 백인 청중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 사회의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할 뿐이었다고 생각했다. 비밥 음악인들은 옷차림, 행동, 노는 방식 등에서 이전 세대의 순종적 태도를 거부했다. 아울러 대중의 기대를 무너뜨린다는 결연한 각오로 그때까지 사용되는 화음체계의 폭을 넓혔다. 앞서 19세기 클래식 작곡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비밥 연주자들은 감5도를 비롯하여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용되던 음정들을 대대적으로 사용하는 등 혁신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정통음악이 20세기 초 12음 기법을 선보이며 조성체계를 벗어 던졌고, 재즈는 1950년대 이후 프리재즈를 앞세워 화음의 틀을 깨뜨렸듯이, 음악 변천의 다음 단계는 이러한 ‘해방’의 최종적 단계가 될까?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무조주의 음악의 선구자인 쇤베르크의 작품은 이러한 방향을 지향했다. 하지만 그에게 특별히 진보적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조성이란 것이 민주주의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둘 다 “위대한 인간들의 생각이 인정받지 못하도록 방해”(7)하기 때문이란다. <정화된 밤> 등 대표작을 남긴 그는 “불협화음과 협화음은 얼마나 아름다우냐가 아니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에 따라 구별된다”(8)고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음악이 조성적 구조에 갇혀 있었던 것은 대중의 ‘이해력’ 부족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쇤베르크가 불협화음을 완전히 해방시킨 덕분에 불협화음이란 것이 결국에는 아예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협화음이란 게 없다면 ‘거슬리는' 음정도 없으니 말이다. 이리하여 ‘음악 속의 악마'는 또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

1941년 어느 기자가 재즈 음악가 듀크 엘링턴에게 자신의 작품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질문했다. 엘링턴은 대답에 앞서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피아노 건반을 두들겨 ‘긴장된' 화음을 연주해 보이며 기자에게 물었다. “이 음정 들리시죠? 이게 바로 흑인들의 삶입니다. 불협화음이란 이 나라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죠. 우리는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곳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거든요.”(9) 과연 그가 연주한 화음이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작은 악마가 거기 어딘가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글·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르몽드세계사2>(공역)(2010) 등이 있다.

(1) 벌써 전문가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론적으로 증4도와 감5도는 코머(미세한 음정 차이)로 구별되는 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아노로 연주할 때 두 음은 분간이 되지 않으며 평균율을 사용할 경우 그 차이는 (거의) 지각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같은 음으로 상정하겠다.
(2) Alex Ross, <The Rest is Noise. Listening to the Twentieth Century>, Picador, New York, 2007에서 재인용.
(3) James Lincoln Collier, <재즈의 모험. 스윙에서 오늘날까지(L’Aventure du jazz. Du swing à nos jours)>, Albin Michel, Paris, 1981.
(4) Jacques Chailley, <화성 분석의 역사적 개론(Traité historique d’analyse harmonique)>, Alphonse Leduc, Paris, 1977.
(5) 유튜브 동영상 ‘관의 화성(Les harmoniques d’un tuyau)’에서 시연 장면을 볼 수 있다.
(6) Dominique Bertrand, ‘음악을 생각한다 : 악마의 몫(Penser la musique : la part du diable)’, <Insistance, n° 1>, Erès, Toulouse, 2005.
(7) Alexander Ringer, <Arnold Schoenberg : The Composer as Jew>,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3에서 재인용.
(8) Carl Dahlhaus, <Schoenberg and the New Mus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New York, 1989에서 재인용.
(9) <The Duke Ellington Reader>, Oxford Paperbacks,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