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

2013-12-19     서용순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이 조직한 코뮤니즘 컨퍼런스의 제4차 세션이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바디우와 지젝이라는 이름의 무게로 인해 코뮤니즘 컨퍼런스라는 행사가 조금은 덜 부각된 것이 사실이지만, 바디우의 첫 한국 방문을 통해 그동안 꾸준히 소개되었던 바디우의 철학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높아졌고, 그가 말하는 정치의 윤곽 역시 더 확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방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놓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던지고 떠난 이방인이고, 남겨진 우리의 현실에 집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과제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 향해야 하는 지점은 우리 자신이지, 바디우라는 대륙의 반대편 끝에서 온 철학자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바디우의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시도들에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한 영감을 얻을 뿐이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보편성은 항상 특수한 맥락에서만, 특정한 실천 속에서만 드러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맥락이고, 이에 대한 사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몫이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우리가 바디우를 왜 읽어야 하는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막연하게 바라는 것처럼, 우리가 바디우에게 왜 열광해야 하는지 설명할 생각도 없다. 그저 약간의 호기심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얼마나 우습고 촌스러운 일인가? 다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가능성, 불가능하다고 치부되던 또 다른 가능성을 말하는 어떤 철학자가 있다고. 깊이 생각하기 싫어하고, 몇 년에 한 번씩 투표장에 가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게으름뱅이들을 흔들어 깨우기를 원하는 실천적인 철학자가 있다고 말이다.

사건이 끊이지 않는 나라, 한국

필자가 보기에 바디우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한국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나름대로 한국 사회의 특성을 잘 파악했다. 그에게 한국이란 어떤 나라였을까? 바디우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 “한국은 나라 전체가 ‘사건의 자리(evental site)’인 듯하다.” 엄청난 말이다. 쉽게 말하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돌발적인 일이 일어날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이야기다. 수많은 금지의 조항들, 지나치게 유동적인 사회적 불안정성, 법과 현실의 이율배반 등으로 점철된 나라가 한국이라면 이 말은 정확하게 맞다. 사실 우리 한국인들에게 그런 상황은 익숙하다. 날이면 날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나라, 수많은 사건, 사고와 스캔들, 여러 엽기적인 논쟁과 억지스러운 비방이 신문의 정치·사회면을 장식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신문만이 아니다. 뉴 미디어라 불리는 인터넷과 SNS에서의 많은 이슈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대립과 불화의 양상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복잡하고 어지러운 한국 사회의 난맥상이 말하는 것은 이 나라가 근원적인 불안정성과 비일관성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칙)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사태들은 언제나 곳곳에서 목도된다. 국가 권력과 금권이 법을 무시하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현실과 법의 괴리가 모든 일탈을 합리화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법의 바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법의 횡포로 압사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쌍용자동차와 용산 참사 그리고 지금의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 등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는 사태들이다.

사건을 긍정하는 주체성이 필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은 강자에게 지나치게 너그럽고, 약자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다. 강자의 일탈은 너무 쉽게 용서되고, 일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약자들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 여러 정당한 파업과 저항들은 불가능한 것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탄압당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무엇을 하든 보호받는 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다른 선택이 없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현실은 이 사회를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거대한 폭탄으로 만든다. ‘나라 전체가 사건의 자리’라는 말은 한국 사회 전체가 새로운 투쟁이 언제든 출현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드러낸다. 모든 불가능의 규정을 거스르는 투쟁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한국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구조와 법칙의 틈이 드러나고, 그 틈을 더욱 벌어지게 하는 사건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능성이 반드시 사건으로 연결되고, 그 사건을 통해 의미 있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바디우 자신이 말하듯이 사건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아무리 강력한 사건이라 해도 자동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사건들을 통해 미래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주체성이다. 사건을 긍정하는 주체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사건은 그 어떤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것을 가능의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주체성이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사건을 긍정하는 것은 이미 확립된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빚어내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긍정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로 나아가는데, 이는 기존 상황을 지배하는 법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배적 법칙에 대항하여 지속적이고 끈질긴 투쟁을 불사해야만 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성이란 단순한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에 대한 긍정의 힘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의 원동력이다. 어떠한 타협도 없이 그 긍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주체성, 포기를 모르는 실천적 주체성만이 사건이 만들어낸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 그 주체성이 없다면, 사건은 그저 의미 없는 에피소드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은 바로 그러한 주체성의 출현과 실천을 통해 드러날 것이고, 그때 비로소 바로 바디우가 진리라고 부르는 새로운 부분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 주체성이 일시적인 의견의 흐름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를 향하는 주체성은 확신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확신에 기대는 강력한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실천적 주체성이야말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동시에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주체성이다. 이 사회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추구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 변화에 대한 열망은 있으나, 그 열망을 지탱하는 확신과 그 확신에 입각한 실천적 주체성은 사실상 없다. 사람들이 믿고 기대는 것은 그저 의견의 지배로서의 의회민주주의일 뿐, 사건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나는 주체성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를 둘러싼 오늘의 정치적 딜레마가 있다.

‘불가능’으로 치부되는 새로운 가능성

이 시대의 유일한 정치적 형식으로 간주되는 의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타협의 체제이다. 다양한 의견의 대립을 외관상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소시키는 이 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유한의 테두리에 갇힌 수의 논리이다. 소수는 다수에게 복종하고, 다수의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 의견이 어떤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견이 갖는 가치는 사실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다수가 악을 원한다면, 그 악은 옳은 것이 된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이러한 수의 법칙이다. 중요한 것은 의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체제는 화폐라는 추상성이 지배하는 경제적 체제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추상적인 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다른 어떤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만이 가능하다. 그것에 대립하는 모든 것을 불가능한 것, 범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완전히 같은 논리로 움직인다. 그렇게, 의회민주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정치적 대안도 있을 수 없다. 공산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상은 그 자체로 끔찍한 범죄로 치부된다. 경제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합리적이고 자연적인 체제로 간주된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것은 전체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길이고, 공적인 부분의 역할은 사적 이익의 추구와 공정한 경쟁을 보증하는 수준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체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가해지는 제약과 통제는 불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오늘날의 자본-의회주의를 움직이는 지배적 담론이라는 점은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다.

주체성을 잃은 아우성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의 주체성이란 이러한 자본-의회주의적 담론에서 벗어나 불가능한 것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으로 접근하는 실천적 주체성이다. 말하자면, 이 주체성은 기존의 모든 지배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하게 하는 실천적 동력인 것이다.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하루하루 살기 바쁜 이 마당에 무슨 다른 생각을 하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여전히 지배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바디우의 철학이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은 정확하게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의회주의적 논리와 일치한다.

이 실천적 주체성은 열성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저 몇 년에 한 번 투표장에 나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고, 곧 실망하고 마는 자본-의회주의의 정치 행위와는 전혀 다른 실천의 지속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대의제 정치는 순전히 게으름뱅이의 정치다. 이것저것 귀찮고, 살기 바쁘다. 정치는 그냥 정치인이 해라. 그렇게 사람들은 직업 정치인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우성을 친다. 그리고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또 투표하고, 또 실망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대의제 정치를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구조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변화는 오늘날의 대의제 정치라는 유일한 가능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다른 가능성을 찾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다른 가능성은 오늘날 불가능한 것으로 낙인찍힌 것에서 나온다.

‘당 없는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다
당과 국가의 결합을 파괴하라

사람들은 그저 참신한 정치인을 기다리기만 한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은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 놓인 작은 계기일 뿐이다. 어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 기성 정치인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가진 어떤 인물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건다. 나 대신 뭔가 잘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기대를 얻은 그는 정치판에 들어간다. 곧이어 그는 기성 정치의 논리에 완전히 휘말린다.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났다. 대통령이 되는 데 실패한 문국현과 안철수, 대통령이 되어 실패한 노무현,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이명박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가능성,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바디우의 실천적 규정은 그 가능성을 ‘당 없는 정치’에서 찾는다. 이는 분명 오늘의 자본-의회주의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가능성, 자본-의회주의에 의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가능성이다.

20세기 이래로 모든 정치는 당-국가의 패러다임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사회주의 정치와 파시즘/나치즘은 모두 단일 정당에 의한 정치였고, 자본-의회주의는 다수 정당의 권력 교체를 통한 정치였다. 양상은 달라보일지 몰라도, 모든 정치가 당과 국가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틀림없다. 이 모든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는 철저하게 당과 국가의 결합을 파괴하는 정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이 언급은 오늘날 정치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자 가장 약한 고리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모든 새로운 정치인들, 과거의 정치와 단절하고자 하는 모든 정치 세력이 좌초한 지점은 바로 당이었다. 당의 정치적 독점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민주주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바디우가 우리에게 던져준 여러 가지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리라.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그는 지극히 원칙적인 수준, 보편적인 수준에서 그런 문제를 던졌을 뿐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일은 그가 아닌 우리의 몫이다. 그를 섣부르게 흉내 내거나, 그의 주장을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지적 사대주의로 전락하는 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벗어나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실천들이고, 그 실천을 창안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바디우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불가능한 것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성, 객관적인 법칙을 벗어나는 실천적 주체성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기력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의 일이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글·서용순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2005년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바디우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고려대, 성균관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하였고, 현재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을 위한 선언>(알랭 바디우 저, 2010), <베케트에 대하여>(임수현과 공역, 알랭 바디우 저, 2013)를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