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로 번지는 시리아의 갈등

2014-01-09     푀라 알라니


이라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폭력을 어떻게 설명한 것인가?
2006~2008년에 발생한 민병대의 전쟁이 종식된 이후, 이 같은 수준의 폭력은 결코 없었다.
시리아의 위기와 함께, 이라크 총리 누리 알말리키가 주도하는 종교 및 지역 정책의 연속성에 폭력이 새겨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자살 폭탄을 막을 수 있을까?” 이것은 사담 후세인 체제가 몰락한 지 10년이 훌쩍 지난 2013년 11월 30일 바그다드가 던진 질문이다. 일상적인 자살 테러에 직면한 이라크 안보국은 카페 주인들을 돕기 위해 세미나를 개최해, 이들에게 사설 경비원을 고용하고 카페 출입문을 줄이라고 조언했다. 바그다드의 상인들은 설득력, 아니 실효성이 없는 경찰관들의 조언을 경청했다. 2013년, 이라크 전 지역에 발생한 테러와 공습으로 인해 6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폭력을 근절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린 이라크 정부는 하는 수 없이 폭력과의 동침을 모색하고 있다. 바그다드에 거주하는 언론인, 모크라스 알주레시가 다음과 같이 전하며 흥분한다. “항상 똑같다. 시장에 폭탄이 터지면, 군경은 그 지역에 통행금지를 선포한다. 하지만 이들은 늘 폭탄이 터진 후에야 당도한다! 그리고 방화범을 검거해야 할 정부는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대원 역할을 한다.”

수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저마다의 비극적인 이야기와 괴로움 그리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바그다드 주민이 1918년의 영국의 이라크 점령을 언급하며 말한다. “미국의 점령이 끝난 이후, 항상 폭탄이 터졌다. 이라크는 또한 실업문제를 비롯한 다른 문제들로도 고통을 받고 있다. 미국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긴 것은 죽음이다. 영국은 적어도 우리에게 다리와 학교를 지어주었다.”

폭력의 이유는 다양하다.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선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 정권의 몰락 직후인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미국의 이라크 행정관 폴 브레머는 이라크 보안국과 “바트당 해산”을 결정한다. 임의적이고 백해무익한 이 정책으로 자격과 경험을 갖춘 100만 명 정도가 이라크 사회에서 추방됐다. 며칠 만에, 이라크는 최첨단 안보국가에서 관리부재 국가로 전락했다. 직간접적으로 체제에 협력한 사람들을 겨냥한 이러한 정치숙청이 이라크를 약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어울림의 도시가 ‘분할’의 공간으로

국가의 약화는 2006년 2월 21일 시아파의 성지인 사마라 사원에 대한 수니파의 테러 이후, 극에 달했던 수니파와 시아파 간 종파 갈등을 한층 부추겼다. 당시, 시아파는 이 사건을 전쟁 선포로 받아들였다. 모든 종단의 진정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아파 세력은 수니파 사원을 공격하는 복수를 했다. 이 복수극 당시, 민병대에 아우를 잃은 한 주민이 당시를 회상하며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9·11 테러였다.”

10년 넘게, 시아파 민병대, 특히 가장 유명한 두 민병대, 사드르 단체(사담 후세인에 의해 살해당한 이라크 종교 지도자 사드르를 추종하는 세력)의 메흐디 군대와 이라크 이슬람 최고 의회의 바드르 여단(1)은 수니파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이들을 납치해 수시로 고문하고 처형했다. 수니파 민병대는 바그다드 시아파 지역에 대한 차량 폭탄테러로 맞섰다. 매일 같이 바그다드 인도와 티그리스 강에서 100여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2008년 3월 24일, 좀 늦긴 했지만, 누리 알말리키 총리는 정치적 경쟁논리에 밀려 무크타다 사드르가 이끄는 메흐디 군대를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메흐디 군대의 거점인 사드르시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이후, 폭력은 점차 현장에서 감소했다. 하지만 폭력은 정계 내의 경쟁을 강화시켰다.

이제 이런 폭력은 알말리키 총리의 주요 담론을 점령했다. 그는 이원론적인 단순한 마니교 어휘를 사용하며 수니파를 지칭하는 데 ‘테러’와 ‘바트당’을 사용하고 있다. 미군 철수 이후, 이라크의 보안 위기를 설명하려면 아랍어로 ‘각성’을 뜻하는 사화의 민병대 역할도 아울러 거론해야 한다. 수니파 소속의 이 민병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알카에다와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군과 동맹을 맺었다. 이라크 주둔 미군 사령관, 데이비드 H.페트라우스의 군사전략에 따라, 미 파병군(2)은 수니파 부족과 항상 공조작전을 펼쳤다. 이 공조는 2007년 11월 13일 알카에다 특공대원에 의해 살해당한 지도자 압둘 사타르 아부 리샤의 상징이다.

대략 10만 명으로 구성된 이 사화의 민병대는 메소포타미아 도시들에서 알카에다 잔당들을 몰아내는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사화의 대원들은 정규군에 편입되기로 되어 있었지만, 알말리키 총리는 이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단지 대원중 20%만 정규군에 편입됐다. 나머지 대원들은 갈수록 수니파를 경계하는 총리에 의해 ‘팽’ 당해 비난받았다.   현재 이라크는 변했다. 바그다드는 더 이상 모든 지역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혼합도시가 아니다. 아주 드문 예를 빼면, 수니파는 수니파 지역에, 시아파는 시아파 지역에 거주한다. 이라크의 다른 지역에서도, 조셉 바이든(3)이 꿈꾸던 대로 북쪽 쿠르드 지역과 중부 수니파 지역 그리고 남부 시아파 지역 간 “소리 없는 지역 분할”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실체가 모호한 시리아 군대의 배후

이 같은 우여곡절과 약속 불이행에도 불구하고, 만약 알말리키 총리가 그의 선거 공약인 “국민화해”만 실천했더라면 이라크의 몰락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집권한 이후, 많은 수니파 의원들은 그에게 충성 맹세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니파와 시아파, 아랍인과 쿠르드인 간 대립을 부추기며, 자신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모든 이들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내쳤다. 그의 정치적 고립은 수니파 출신 부대통령 타렉 알하셰미를 “테러분자”로 몰아 축출하며 시작됐다. 이듬해엔 또 다른 수니파 출신 재무부 장관 겸 부총리 라피 알이사우이가 같은 이유로 축출됐다.

2012년 12월 21일 미군 철수 1년 후, 이른바 ‘존엄의 장소’인 바그다드로 가는 팔루자의 주요 도로에서 대단위 국민 시위가 시작됐다. 이 시위는 수니파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예전엔 알말리키 총리와 부족들 간 동맹이 가능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됐다. 이 시위에서 둘레이미, 주메일리, 마함다와 같은 수니파 주요 부족장들은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들 중 일부는 총리를 이란의 꼭두각시 또는 “사파비드(이란의 수구 보수층을 지칭하는 경멸적인 용어)”로 취급했다. 알말리키 총리가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와 대통령과 한편이었기 때문에, 시위대는 시위 초기부터 시리아 반군과 연대했다. 이라크 깃발과 자유 시리아군의 엠블럼이 시위 군중 복판에 있어 눈에 잘 띄었다. 이라크의 수니파의 전투는 국정을 마비시키고 있다. 이들의 적은 알말리키 총리와 시아파의 거점인 다마스-바그다드-테헤란이다.

알안바르 지방의 수니파와 국경 너머 시리아 지역의 시리아 반군 간 연맹은 이라크에서 폭력이 잦아진 것을 일부 설명해준다. 라페 알주메일리 족장은 정권 싸움이 갈수록 종파 차원에서 이뤄지며, 많은 이라크인들이 “이라크에서 힘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시리아식 시나리오를 상상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 부족장은 만약 다마스가 무너지면, 테헤란은 중요한 동맹군을 잃는 셈이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만약 시리아에서 수니파가 정권을 잡으면, 우리는 바그다드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시아파를 강력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에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자유 시리아 군대와 마찬가지로 이라크에서도 자유 이라크 군대가 수니파 시위가 일어나기 6개월 전에 창설됐다. 자유 이라크 군대는 2012년 7월 19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목표를 공식 발표했다. “이란의 이라크 침공을 막고, 시리아 국민과 자유 시리아 군대를 지지하고, 이라크 수니파 전투대원들을 하나의 깃발 아래로 통합한다.” 이 새로운 군대의 배후는 누구일까? 이 군대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을까? 뭐라 하기엔 시기상조이다. 이 군대는 인터넷상에 자신들이 이라크 정규군을 공격한 비디오 영상을 배포했다. 그리고 2013년 2월, 키르쿠크 근처에서 신원미상인 이 군대의 수장이 체포되며 이들은 점차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이라크의 진정한 불행은 석유?

메소포타미아의 알카에다와 시리아 알참 지방의 알카에다 간 동맹은 시리아 수니파와 이라크 수니파를 통합하는 또 다른 ‘자연적인’ 연계고리이다. 이라크와 레반트 공화국(중동 지중해 연안 국가들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 이라크 4개국 이슬람주의자들이 창설한 공화국)에서 이슬람 국가의 깃발 아래 뭉친 전투대원들은 반군이 지키고 있는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을 쉽게 드나들고 있다. 2006년 다양한 지하드 그룹이 이라크에 플랫폼처럼 창설한 레반트 이슬람 공화국(ISIL)이 현재 끔찍한 전쟁을 주도하며 시리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 그룹은 이동이나 식량 구입에도 문제가 없다. 이 국경 지대에선 옛날부터 부족 간 동맹관계이기 때문이다. 팔루자나 알카임 주민이 국경 너머 시리아 쪽에 위치한 아부 카말에 들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시리아의 갈등은 실제로 2013년 3월 이라크를 강타했다. 당시 40여명의 시리아 군인과 공무원들이 이라크의 알안바르 지방에서 살해됐다. 반군의 공격을 피해 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에 그곳으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이 화를 당한 것이다. 7명의 이라크 군인도 함께 사망했다. 비록 두 국가의 위기가 다양한 원인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위기가 종파싸움으로 번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리아 내전은 알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소수 민족 및 소수 종교 연합과 수니파가 주도하는 반군 간의 싸움이다. 수니파가 야당과 반정부군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이라크의 소수 시아파 정부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라크에서 종파 갈등이 다시 불붙고 있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2013년 10월 하순 알말리키의 워싱턴 방문 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에게 테헤란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 테헤란에 알아사드의 “조용한” 정권 퇴진을 부탁해보라고 권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라크는 쌍방, 즉 아랍 지역의 강력한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반(反)아사드 세력을 이끌고 있는 두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전례 없는 10년간의 폭력 이후, 이라크는 수니파와 시아파가 시리아의 갈등을 발판삼아 벌이고 있는 정권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

알말리키 총리는 이러한 새로운 지역 판도를 무시하려 한다. 의회가 새로운 선거법도 채택하고 2014년 4월 30일로 새로운 총선 일자도 잡았지만, 국민들은 이를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는 데 유리한 법은 아무렇지 않게 도입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사안에 대해선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국회의원들을 비웃는다. 이라크의 인텔리 사회학자 아미르 아메드는 이 같은 총선을 부조리극이라 말한다. 그는 정치무대를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교한다. “선거가 끝날 때마다, 정치계는 우리에게 변화를 약속한 사람의 도착을 알린다. 하지만 그는 절대 오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정치인들은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를 산만하게 한다. 이라크인들은 고도를 기다린다.”

아메드가 덧붙여 말한다. “이라크의 기존의 이란 세력이 아랍 지역의 불신과 공포를 키웠다. 지역 정치의 이 같은 급격한 변화가 모든 긴장을 유발시키고 있다. 아울러 이라크가 석유 강국이며 이것이 국제세력의 탐욕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국제세력은 상황을 진정시키기보다는 폭력에 자양분을 주기 위해 애쓴다. 왜냐하면 불안정하고 쇠약한 국가에서 이윤을 챙기는 것이 안정되고 강력한 국가에서 이윤을 챙기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바로 석유가 이라크의 진정한 불행이 아닐는지. 

 글·푀라 알라니 Feurat Alani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사드르 추종 세력은 시아파 정부에 의해 버림받은 빈민층을 대변한다.
(2) 2007년 1월 10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 미군 3만 명을 추가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데이비드 H. 페트라우스를 이라크 주둔 미군 사령관에 임명한다.
(3) 조셉 바이든은 이라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995년 두 지역으로 분할된 보스니아에서 영감을 얻어 이라크를 3개의 종교 공동체로 분할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북쪽은 쿠르드족 지역으로, 중부는 수니파 지역으로, 남부는 시아파 지역으로 분할해 이라크를 지방분권화시켰다. Cf. Helene Cooper, <Biden plan for ‘soft partition’ of Iraq gains momentum>, <The New York Times>, 2007.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