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는 세계

2014-01-09     편집자

“‘점령 시위(Occupy)’운동은 정의로운 경제·사회·환경이라는 기본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체제를 수정하려 하고, 또 누군가는 근본적 변화를 주장한다. 이번주에 우리는 질문을 제기한다. 개혁인가, 혁명인가?”
점령 운동 시위자들의 신문《런던 오큐파이드 타임스(The Occupied Times of London)》는 극소수의 부당이익 취득자와 거액 자산가들에 맞서 ‘99%’를 대변하려는 운동이 봉착한 딜레마를 제기했다.
전 대륙을 통틀어 역사상 최초로,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1929년 이래 가장 심각한 경제·정치·도덕적 위기에 도달한 광기의 시스템을 거부하고 나섰다. 칠레에서 그리스, 이집트에서 아이슬란드, 세네갈에서 중국,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모로코까지, 도처에서 더 정당하고 더 공평한 세계, 환경을 더 생각하는 세계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계획을 명확하게 정의하려는 이러한 열망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사회주의와 식민지 해방이라는 두 가지 거대한 진보운동이 20세기 내내 지구를, 지리와 역사를, 국민과 문화를 만들어왔다. 사회주의는 선진 세계 노동자들의 갈망, 즉 산업화라는 잔인한 자본주의를 끝장내고 착취와 불의, 가난, 장시간 노동, 아동 노동 등과 투쟁하리라는 결의를 표출해왔다. 남녀평등과 같은 몇몇 요구에 대해서는 아직 큰 변화가 없지만 그래도 성공과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경영’을 수용하고, ‘현실사회주의’가 맹목적 권위주의에 빠져들면서 계급 없는 평등한 세상이라는 유토피아는 매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흐름들은 국가 차원에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라는 이름으로 보편적 공화국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던 소련은 붕괴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수천 년 역사를 이어온 중화제국의 뒤를 이었다. 어쨌거나 이들은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끈질긴 거부와 국제연대에 대한 갈망의 한 표현이었다.

식민지 해방 역시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 주목할 사건으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서구 지배자에 의해‘역사의 대기실’에 처박혀 있던 대다수 국민에게는 출구 역할을 했다. 서구는 문화적 우월성을 뽐내며 식민지 주민들의 자원을 탐내고 자기들의 지배가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1920년 9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 아랍인과 쿠르드인, 터키인과 인디언, 페르시아인과 중국인 등 2,000여 명의 대표단이 참석한 ‘동방 피압박민족대회’에서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자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우리가 참여해온 역사적 사건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이해할 시간이 없었다. 이곳에서 지난 일들을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자본주의 세상에서 소나 말 같은 가축 취급을 받았던 이른바 ‘열등한’ 인민들이, 무기력한 부르주아지는 관심도 갖지 않았던 인민들이, 이제 봉기한다.” 이러한 생각을 실현하고, 식민지체제를 타도하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수많은 평화적 또는 무장 투쟁이 필요했다. 독립의 길은 혁명의 이상이 보여준 것보다 훨씬 가파른 길이었고, 내일은 생각보다 더 암울했으며, 흔히 탐욕스럽고 약탈적인 과두정치가 예전 지배자의 뒤를 잇곤 했다. 그러나 교육, 의료, 정치적 독립, 부분적이긴 하지만 개발 통제 등, 몇십 년에 걸쳐 쟁취한 독립은 하찮은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격변의 지정학적 유산은 국제연합에도 반영되어, 1944년 국제연합 창설 당시 50개국이던 회원국이 현재 193개국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만으로는 혁명적이었던 조직들의 위기를 막을 수 없었다. 1990년대부터 심지어 국가가 주도적 역할을 하며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모델에 신흥국이 가세했다. 이런 점진적 변화는 ‘역사의 종말’과 절망, 그리고 부당함과 사회적 분열을 동반하는 자유주의 모델의 승리를 비준하는 행위가 아닌가? 미국이 이라크에서 평화를 회복하려 애쓰는 동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호전적으로 작전 지역을 확대하는 등, 서구의 독점적 지위는 국제연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계 외교와 정치에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모순적인 요인들이 서로 얽혀 있어 그 윤곽을 파악하기 어럽지만, 새로운 세계가 부상했다는 점이다. 빈곤 감소와 영양실조에 걸린 수천만의 사람들, 지구온난화와 재생 가능 에너지 발견, 새로운 전염병과 에이즈의 증대, 조세도피처와 정보기술의 발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제도화된 권위주의, 그리고 점점 증대하는 자유에 대한 갈망……. 알카에다나 이슬람근본주의보다 더 심각한 위협과도 같은 이러한 진보가, 수백만 명의 실업자와 시간제 근무 노동자, 그리고 여성을 첫 번째 희생자로 삼는 고용 불안정성의 확대와 같은 자유주의 정책의 사회적 결과에 추가된다.

이미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1929년 이래 자본주의 시스템이 겪은 최고의 위기, 즉 문화·금융·정치를 망라하는 글로벌 위기가 2007년에 시작되었다. 글로벌 위기로 인해 20세기와는 확연히 다른, 변화시켜야 할 세계의 특성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전 위기들과 마찬가지로 글로벌 위기는 경기 후퇴에 대한 반발과, 외국인 혐오, 야만인들에 대한 ‘문명전쟁’의 충동, 그리고 ‘분노한 자들’이란 다소 모호한 기치 아래 집결해 최상위 1%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반대하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쇄신이라는 꿈을 배제시키는 세상을 거부하는 국가적 혹은 초국가적 저항운동과, 국경 없는 평등에 대한 갈망을 동시에 부추긴다.

모로코에서 이라크까지, ‘아랍의 봄’은 수세기 동안 이어진 많은 구제도를 전복했다.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에서는 예전 사회구조를 지속하려 애쓰고, 어떤 곳에서는 탄압이 계속되고 있지만 전제적 국가원수는 축출되었다. 이러한 저항은 밑에서부터 일어난, 중심이 없는 네트워크로 조직된운동의 역동성을 확인해주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2000년대 탈세계화 흐름으로 시작되었던 초국가적 차원의 대규모 집결에 일조했다. 변화를 수용하고 이끌어낼 정치력의 부재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문제의 특성, 그리고 엄청난 위협을 고려할 때, 저항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지정학적 상황은 속도는 느리지만 반드시 변하게 마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항은 계속된다. 경제적 성공과 국가적 역동성을 겸비한 중국,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같은 신흥국은 19세기 이래 처음으로 세계의 다극화를 예고하며 국제무대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2011년 말에 이루어진 미군의 이라크 철수는 미국이 가진 힘의 한계를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북대서양조약기구 연합군이 2014년까지 서둘러 철수할 것이라는 발표와 탈레반의 전진, 그리고 2009년 8월 부정선거로 선출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의 고립은 식민지 지배자들의 좋은 시절도 끝났음을,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운명을 영원히 결정할 수 없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란에 맞서 전쟁의 북소리가 다시 울리고 있는 와중에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 교훈을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힘이 좀 더 잘 분배된 지금의 세계가 사라져버린 이전 세계보다 더 평화롭고 더 안정적일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국제연합은 여전히 알맞은 조정 메커니즘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어떤‘신흥국’도 시장의 독재에서 완전히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나라의 국민들이 세계무대에 부상하는 일은 평등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진보다. 더 나은, 그리고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꿈은 수세기 동안 계속돼왔다. 현재의 유토피아는 분명 어제의 희망과는 다른 것이지만, 미래를 밝히려는 의지는 동일하다. 이러한 의지는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 글은 이 달 출간한 <르몽드 세계사 3>의 일부 내용이다. 1권부터 새로운 국제적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다양한 변화상을 주제, 국가, 지역별로 소개해 왔다. 3권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후퇴와 약진하는 신흥 세계’라는 주제를 통해 미국의 후퇴를 넘어선 쇠락을 살펴본다.

- 편집자





'지성의 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monde Diplomatiq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