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인디 힙합, 슬럼을 향해 외치다

2014-01-10     토마 블롱도

프랑스 인디 힙합계는 슬럼가에 대한 정치적 낙인과 음반 시장의 불황을 겪은 후, 대중을 향한 길을 버리고 그들이 나고 자란 거리로 되돌아왔다. 음반을 낼 때도 소량만을 직접 제작해 배포하는 방식을 택했다. 여러 인디 힙합 가수가 골든디스크를 거머쥐기도 했지만, 슬럼가 밖에서는 여전히 무명일 뿐이다.

“우리 구역 놈들에 이 노랠 바치네 / 우리는 하얀 가루에 입을 맞추지….”
파리 외곽의 불로뉴 시 플라스오뜨 지역, 허름한 아파트 벽을 타고 거친 랩이 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놀랄 만한 음반 성적을 거둔 힙합 가수 ‘림(LIM)’. 아직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디 힙합신에서는 이미 톱스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유명 인사다. 최근 그와 같은 몇몇 인디 힙합 가수들의 앨범이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매체를 통한 소개 없이도 수만 장씩 팔려나가고 있다. LIM은 녹음 스튜디오에 앉아 앞에 놓인 믹싱 콘솔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콘솔, 프랑스에는 네 대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가장 최신형이죠.”

아파트 지하 창고에 이 첨단 믹싱 콘솔을 들이기 위해 수만 유로를 투자했다는 그의 설명은 어떻게 보면 의아하기도 하다. 스타 랩퍼가 되었지만 여전히 거대 아파트 단지의 한복판에서 슬럼가의 주민으로 살아가고 있고, 해변에 놓인 으리으리한 별장도,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자란 곳은 불로뉴 시, 다시 말해 90년대의 힙합 스타 ‘모베즈랭’과 ‘부바’의 지척에서 성장한 셈이다. 하지만 음악적 성공과 부를 모두 거둔 지금도 변함없이 불로뉴에서 살고 있으며, 사실 이곳을 떠나는 것을 단 한 번도 고려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떠난다고 해도 제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파리 중심지에 가서 잠깐 어슬렁거리다 보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라 바로 이 동네라는 사실이 분명해져요. 그래서 떠나지 않는 것이죠”라고 설명했다. LIM의 노래엔 어떠한 과장이나 미화도 없이 일상 그대로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영화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닌 욕구불만, 경찰 뒷담화, 여자 이야기, 감옥에 간 형제들, 지중해를 건너와 불법 체류자가 된 친척들 이야기 등을 거칠면서도 날카롭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음반 판매가 되기나 할까 싶을 수도 있지만, 그가 걸터앉은 소파 뒤 벽에는 두 개의 골든디스크가 걸려 있었다.

음반 판매량 1위,
하지만 여전히 무명 가수

2007년 10월,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5구, 유니버설 뮤직에서 발표한 주간 음반 판매량 집계 결과에 모든 레코드 회사들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크리스토프 마에, 바네사 파라디, 마누 차오 등 쟁쟁한 대형 스타 가수들의 이름 위로 LIM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LIM이 이름도 파격적인 레이블 ‘투스 일리시트’(‘죄다-불법’)를 통해 발매한 2집 앨범 ‘델랑컹’이 전체 음반 판매량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사실 이 결과를 발표한 유니버설 뮤직 사무실에서도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이런 충격적인 소식 덕분에, 프랑스 힙합이 힙합의 출발점이었던 슬럼가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기 시작했다.
힙합 음반 판매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 이 때 메이저 업계는 힙합 가수들과의 모든 계약 관계를 정리하고 랩퍼들을 인디로 밀어 넣었다. 덕분에 인디에서는 아무런 음반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고, 결국은 비공식적인 루트로만 노래를 제작해야 했다. 대표적인 예가 DJ가 자신만의 비트를 만들고 다른 랩퍼들을 불러와 곡을 녹음해 믹스테이프(1)나 스트리트CD(2)의 형태로 제작하는 방식이다. 최소 비용으로 소량만을 제작하는 스트리트CD는 힙합에서 자발적으로 창조해낸 새로운 주 매체가 되었지만, 사실상 공식 음반 판매량에는 집계되지 않고 있다.

믹스테이프의 경우는 정확한 발매일조차 따로 없다. 대마초 따위를 팔아 돈이 생기면 그제야 녹음실을 빌리고, 그렇게 작업을 시작해 녹음을 마치면 그 날이 바로 발매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타임 봄브’, ‘비트 드 불’과 같이 비교적 틀이 잡힌 프로덕션과 이름 없는 소형 레이블이 공존하면서 생기는 무질서함, 점점 한계까지 치닫는 랩퍼들 간의 폭력적인 랩 공격, 음반 제작과 관련된 자본 문제 등이 인디 힙합이 마주한 난관으로 떠올랐고, 가요계와 미디어는 완전히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2000년 들어 ‘루나틱’과 ‘부바’가 함께 만든 ‘45 시엉티피크’가 골든디스크를 수상했고, 이로 인해 인디 힙합계의 발전에 대한 전망이 다시 밝아졌다.(3) 골든디스크라는 예상치도 못한 결과가 나타나자, 마침내 몇몇 음반 배급업자들이 인디 힙합에 손을 내민 것이다. 인디 가수들도 이들을 통해 보다 넓은 리스너층을 확보하고 새로운 산업적 전망을 얻을 수 있었다. 인디 힙합 레이블의 배급을 담당하고 있는 와그람 뮤직 소속 필립 가이야르는 “인디 힙합은 이미 수년 전부터 메이저 시장 밖에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역량들을 갖춰왔다”면서, “우리도 인디 레이블 중 하나인 ‘므나스 레코드’와 유통 계약을 맺었는데 곧바로 2만 5천장이 판매되더라. 덕분에 인디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랩으로 먹고살고,
랩 안에서 살아간다”

현재 배급업체를 통해 유통되는 인디 힙합 음반은 수십만 장에 달한다. 새로운 유통망은 랩퍼 본인과 음반 제작자, 레이블의 상황에게도 큰 이익이다. 그들이 지속해온 인디 활동이 하나의 새로운 경제 동력으로 바뀌어가면서, 음악 관련 사업 자체도 높은 수익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배급처를 통해 손쉽게 음반을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디계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성장시켜온 인터넷, 소형 음반사, 벼룩시장 따위의 비공식적 시장에서도 결코 손을 떼지 않았다. 공식 앨범을 내는 틈틈이 팬들 곁을 떠나지 않으며 여전히 소문과 인기를 얻고 있다.

파리 북쪽 외곽, 클리낭쿠르 지역의 벼룩시장 한복판에는 인디 힙합 레이블 ‘게토 파뷸루스 갱’의 노점이 위치해있다. 이곳에서는 ‘이 도시에 들어서면 난 잃을 것 없지 / 이 나라 따윈 터지라고 매일 기도하지 / 국가는 부르지 않아 우린 부랑자니 / Do or Die, 사회따윈 모르지’와 같은 랩이 흘러나오고 있다. 레이블의 수장인 ‘알파5.20’은 울타리 앞에 기대선 채 “음반 불황? 그게 대체 뭡니까?”라며 조소를 던졌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명 랩퍼였지만, 지금은 수 천 장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하며 무시무시한 인기를 얻고 있다. “첫 믹스테이프를 내놓았던 것이 벌써 8년 전 일인데, 당시 한 방에 7천 장이 팔려나갔습니다. 그게 신호탄이었죠.” 파리 외곽지역 인디 힙합계의 ‘대형 레코드사’ 역할을 하는 이 노점 좌판에는 기존 음반사에서도 판매하고 있는 공식 음반뿐만 아니라 팬들이 목을 빼며 찾아다니는 믹스테이프나 스트리트CD도 찾아볼 수 있다. 한 단골손님은 이 노점에 대해 “여기는 업데이트 일정이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매주 주말마다 벼룩시장에 찾아와보면, 공식 신보는 물론이고 비공식·미발매 음반, 다른 랩퍼들과 콜라보한 컴필레이션 앨범 등도 늘 새롭게 나와 있거든요. 정말 끝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음반판매량 뒤엔 음악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경제적 논리가 과잉 생산으로 이어지면서 음반의 퀄리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위험도 없지 않지만, 지금 인디에 더욱 힘을 불어넣고 있는 것도 사실 이 경제적 논리다. 알파5.20은 “우리는 랩으로 먹고살고 랩 안에서 살아간다”며 “이곳에 더 이상 더러운 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직접 돈을 벌어 다시 투자하고, 그렇게 키워갈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게토 파뷸루스 갱의 노점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는 랩퍼 ‘라르센’의 노점이 위치해 있다. 26세의 나이에 전과범이기도 한 그 역시 지금은 랩을 쓰며 소소하게 돈을 벌고 있다. 또 벼룩시장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큰 길 위쪽에서는 힙합 듀오 ‘트뤼엉 드 라 걀레르’가 신보를 뿌리고 있었다. 알파5.20의 동업자 중 한 명은 “이 바닥에서 인디 레이블이 롱런하려면 정말 저렇게 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무료 음원이나 영상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바닥’에서는 각종 블로그와 전문 사이트들이 온라인으로 잘 연결되어 있는 덕분에 가수들이 따로 홍보를 할 필요가 없다. 대중 매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슬럼가에서는 왕자 대접을 받으면서 편안하게 돌아다닐 수가 있고,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다. LIM은 이러한 관계가 친구 사이 수준을 넘어선 ‘가족’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린 스타가 아닙니다. 우리에겐 팬이 아니라 ‘형제들’이 있죠. 또 그들 덕분에 우리가 하는 음악 활동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것이고요. 우릴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 이 거리로 오면 됩니다. 우린 늘 여기 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프랑스 인디 힙합의 놀라운 성공에 숨겨져 있는 요소다. 자본주의적, 상업주의적 접근만으로는 이러한 성과를 결코 설명할 수 없다. 막대한 음반 판매량의 뒤에는, 음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 불로뉴 시 플라스오트로 돌아가보자. LIM의 스튜디오에서는 그의 신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넘버원이 나의 삶을 바꾸진 않았지 / 난 여전히 더러운 밤을 보내곤 해 / 내 권총을 닦아둬 너무 지루하니까 / 곧은 길은 비켜서 스타는 너무 지겨워’와 같은 가사를 보건대, 3년 전 그가 첫 번째 골든디스크를 수상한 후에도 그의 삶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알제리를 상징하는 녹색 트레이닝복을 걸쳐 입은 채 “제 삶도, 제 생각도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음악도 그대로죠. 그러니까 사람들도 제 음악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겠죠”라고 설명했다.

골든디스크를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으로 그는 그의 레이블 ‘투스 일리시트’의 상황을 정비하고, 지하 창고 하나를 구해 녹음 스튜디오를 꾸몄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이 스튜디오에 대해서도 “이곳은 거리의 모든 이들을 위한 곳입니다. 골든디스크는 우리 모두의 것이죠. 저 혼자 앞장선다고 해도 그게 특별히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스스로의 삶과 주변인의 일상을 담아낸다. 그의 랩은 마권발매기 털이, 마약 거래, 그리고 이어지는 감옥살이 등 고되고 험한 슬럼가 삶에 대한 시대극을 보여주고 이 거리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힙합이 쉽게 빠지는 함정인 과대망상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그의 랩을 통해 막 감옥에서 출소한 친구, 약간의 대마초에 몸을 파는 매춘부, 무능한 정치인, 경찰에 대한 불만, 반감과 증오, 그리고 아주 약간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결국 힙합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슬럼’이 ‘슬럼’을 향해 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너무나도 ‘이곳만의’ 삶이어서 밖에서는 이해받을 수 없는 그런 일상에 대한 랩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일간지 <르몽드>는 한 기사를 통해 LIM의 동료 랩퍼 ‘라르센’을 ‘동네 랩퍼’라고 칭하며 집중 조명했다. (2009년 7월 10일호 참고) LIM은 이 호칭이 너무 편협한 명칭이라며 거부했지만, “우리는 유권자 카드도 없습니다. 이곳엔 우리만의 정치가 있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런 우리만의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팬'이 아닌 ‘형제들'이… “우린 늘 이곳에 있다”

1990년대 당시, 프랑스 힙합의 선구자들이 힙합계의 문을 열며 추구했던 것은 대화의 장이었다. 힙합 전문 잡지 <Rap Mag>의 전 편집장 뱅상 베르트는 “‘아사생’, ‘NTM’과 같은 그 시대 랩퍼들은 자신들이 하위 계층이 아니며, 말을 능수능란하게 잘 할 수 있고, 사회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90년대 말에 이르러 슬럼가 이주민들에 대해 그들이 거주하는 곳이나 종교적 신념 등이 모두 정책적으로 낙인찍히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음반 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힙합 시장에 대한 그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힙합은 다시 거리로 돌아왔고, 랩은 슬럼가를 떠나지 못한 채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불량 청년들의 일상의 모습을 묘사하는 거친 표현들로 서서히 채워져 갔다.

이주민 통합 정책에 도전장 내듯

프랑스 힙합 1세대 그룹인 NTM의 멤버 ‘쿨 셴’도 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들을 쓰려고 애쓰더라도, 힙합이 가진 ‘거친 음악’의 이미지에 점차 굴복하게 된다”면서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망할 놈’이라고 부르면서 슬럼에 그냥 그대로 남게 된다”고 설명했다. 즉, 인디 힙합은 더 이상 1세대 랩퍼들이 주장했던 ‘변방의 목소리’가 아닌, 슬럼가의 사람들에게, 좀 더 넓게 봐도 다른 슬럼가에 거주하는 ‘형제들’에게까지만 전해지는 고독한 노랫소리가 된 셈이다. 늘 멸시받았던 슬럼가가 시선을 사회 중심에서 외곽을 향해 돌리면서 반대로 사회를 깔보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 수준이 일종의 지역적 자폐화에 가까워지고 있다. 90년대에는 ‘그들 vs 우리’라는 논리가 있었지만, 오늘날엔 이것이 ‘우리 vs 우리’라는 논리로 바뀌며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표출되고 있다. 국기, 학교, 직장, 나아가 음반회사마저도 그들에게는 전부 ‘망할 놈’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우리 쪽 음반들이 히트를 친 후 메이저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뭐, 아무 필요 없어요. 계약 따위 알 게 뭐랍니까. 여기 이곳에선, 우리끼리 우리의 일을 합니다. 그게 다예요”라고 말하는 LIM의 눈빛에서는 일종의 긍지가 느껴졌다.

이 ‘우리’라는 말이 꼭 과거 실패한 이주민 통합정책에 던지는 도전장처럼 들린다. 80년대 당시 흑인 및 아랍계 이주민에게도 나이트클럽 입장을 허가하자며 대단한 선의로 뭉쳐졌던 여론에 던지는 도전장 말이다. 사실 그들이 들어가고 싶었던 곳은 나이트클럽 따위가 아닌, 국립행정학교 같은 곳이었다. 결국 그들은 소외된 자의 신분으로 돌아가 다시 그들만의 깃발을 들고, 슬럼가의 경제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거의 자급자족에 가까운 가치체계를 형성했다. 슬럼가의 음악은 점점 더 폐쇄적으로 변하였고, 노래 가사도 은어가 난무해 외부인은 아슬아슬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변해갔다. 그러면서 사회적·심리적 상황을 오롯이 대변하는 음악은, 거칠고 폭력적인 그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하나의 사회적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여러 랩퍼의 음악을 통해 강력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폐쇄적인 태도는 사실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근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외곽 지역의 기권율이 70% 수준에 육박했던 것만 보더라도 이미 이곳에는 폐쇄성과 ‘바깥 세계'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해 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다.(4) 이제는 우리가 이대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고만 있을 것인지 자문해볼 때가 아닐까.

글·토마 블롱도 Thomas Blondeau
<랩 전쟁 1, 2>(Le Castor astral, 2007-2008)의 공동 저자.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믹스테이프에 들어가는 컴필레이션 곡들은 종종 저작권 위반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Des maisons de disques bousculées par la ru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월호)
(2)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음반을 일컫는다.
(3) 당시의 골든디스크 수상 기준은 10만장 이상 판매였지만, 이후 음반시장 전체의 불황으로 인해 판매량 기준이 2009년에는 7만 5천장, 최근에는 5만장으로 하향조정됐다.
(4) 파리 교외 지역인 클리쉬-수-부아에서는 2차 선거 투표율이 31.3% 수준에 그쳤다. (<르몽드> 2010년 3월 25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