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 알제리 젊은이들의 억눌린 노래
2014-01-10 라바 무주안
서쪽으로는 아이두르 산이 우뚝 솟아있고, 한쪽은 아름다운 만, 다른 한쪽은 오래전에 물이 마른 후 건물로 뒤덮인 건곡에 걸치고 있는 도시, 오랑. 알제리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로도 유명하다. 이곳에는 이 도시의 수호성인 시디 엘우아리를 기리기 위해 1793년 세워진 신전과, 18세기에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파샤 모스크가 있다.
시디 엘우아리는 자주 라이의 찬양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도시가 유럽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과거 베르베르어로 ‘이프리’(‘동굴’이라는 뜻)로 불리던 이 도시를 903년 안달루시아 선원들이 ‘와흐란’(베르베르어로 ‘사자들’을 의미)이라는 이름으로 세웠다는 사실을 확인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곳곳에는 기독교 유적들이 눈에 띈다. 17세기 초반 이곳에 진출해 두 세기를 머물렀던 스페인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다. 생루이 교회, 사크레쾨르 성당, 성모 예배당 등이 대표적이다. 오랑은 히스패닉, 안달루시아, 터키, 아랍-베르베르,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도시다. 오랑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축제 속에서 빛을 발한다. 오랜 옛날부터 오랑은 잠들지 않는 도시로 유명했다. 아름다운 항구의 풍경을 감상하며 ALN 대로(구 해변도로)를 산책하는 이들은 때로 베르뒤르 극장을 방문하기도 한다. 지금은 셰브 아스니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라이 러브 운동을 주도하다가 1994년 9월 29일 살해당한 가수의 이름을 딴 것이다. 어떤 이들은 식사를 한 후 곳곳에 눈에 띄는 댄스 클럽 중 한 곳에 들어가 느긋한 시간을 즐기기도 한다. 그 중 ‘르 플로리다’와 ‘르 도팽’이 가장 유명하다. 오랑 역시 폭력의 악순환 속에 휩쓸린 적이 있지만, 최근 몇 년간 댄스클럽의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칼레드, 셰브 마미, 파들라, 사흐라위의 데뷔 무대가 되었던 카바레들은 라이의 고향이자 재능 있는 가수들을 배출하는 요람이 되고 있다.
늘 타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거나 크고 작은 소문에 시달려온 오랑 사람들은 여자를 꾀려고 찾아오는 알제와 콩스탕틴 관광객들을 비웃는다. 이곳에서는 클럽에서 여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신 휴대폰과 돈 다발을 흔들며 으스대는 졸부들을 ‘촌뜨기’라고 부른다. 그 중에는 해변도로를 서성이는 여장 남자들을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게이 라이 가수 셰브 압두가 노래한 풍경이다. 과거 루이 암스트롱과 조세핀 베커의 공연도 있었고 1966년 자니 할리데이가 카지노 극장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던 라이의 고향은 언제라도 싼값에 즐길 수 있는 만남의 장소가 되어왔다. 라이는 국제적인 음악 장르로 인기를 얻기 전에는 무엇보다 삶의 한 방식이었다. 1920년 오라니 평원에서 탄생했다고 추측되는 라이는 1940~50년대 셰이카트들(아랍권 족장을 뜻하는 셰이크의 여성복수)의 출현으로 급속도로 인기가 상승했다. 그 중 지금은 고인이 된 리미티(1923~2006)가 대표적이다. 환락가, 삼류 카바레, 출장 파티를 돌아다니며 예리하고 짓궂은 가사로 청중을 사로잡던 여성들이다. 이 장르는 1960~70년대 블라위 우아리, 아흐메드 와흐비, 메사우드 벨무, 부텔자, 아흐메드 사베르 등의 가수들에 의해 좀 더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모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라이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셰브’(‘젊은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한 무리의 가수들이 알제리 음악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다. 대중적 표현 형식을 폄하하고 억압하는 역할을 해오던 전통적 문화 귀족들의 권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이스 기타, 신시사이저, 드럼머신 등을 도입하여 악기 구성을 혁신하고 전통적인 멜로디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다채로운 가락을 만들어내기 위해 민속음악 형식을 접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부분 와인과 위스키의 달콤한 맛, 여성의 육감적인 몸매를 찬양하거나, 성적인 고뇌에 대해 노래했다. 수십만 개의 카세트테이프로 유통된 그들의 노래는 “살아라, 그리고 살도록 내버려두라”고 외쳤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작된 이 노래들은 수적으로는 다수지만 사회적으로 발언권이 없었던 대부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무력감에 사로잡힌 채, 쇼비니즘이 판치는 스포츠 경기장, 애국적 레토릭만 반복하는 미디어, 술집, 모스크, 거의 부재하는 대중문화 사이를 오가며 살아오던 터였다. 라이의 성공이 어찌나 대단했던지(알제 청년축제에서의 공연, 오랑에서 최초의 라이 페스티발 개최 등) 알제리 정부는 1985년 라이의 ‘정상화’(일종의 ‘방부처리’)를 촉구하며 국가적인 관리에 나설 정도였다. 그 후 1년도 채 안 되어 라이는 보비니와 라빌레트에서 개최된 페스티벌을 통해 프랑스에 상륙했다. 거장과 신예를 막론하고 유명한 가수들이 대거 참여한 공연이었다. 관객은 대부분 향수에 사로잡힌 이민자들이었다. 그러나 라이는 한동안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몇몇 미디어의 조명(혹은 사회학적 관심)을 받은 정도였다. 1990년은 라이가 성숙기에 접어든 원년이다. 카세트테이프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CD로 된 앨범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때다. 셰브 마미는 라이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렛 미 라이>라는 제목의 음반을 냈다. 프로듀서는 로스엔젤리스의 힐튼 로젠탈이었다. 이 앨범은 아랍계 이민자들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셰브 마미의 히트곡, <아울루>는 심지어 이스라엘 최고 인기 가수에 의해 다시 불리기도 했다. 이때 많은 변화가 시작됐다. 라이 본연의 멜로디를 잃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편곡과 전문성을 갖춘 곡들이 속속 등장했다.
1992년 알제리는 폭력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프랑스에서는 칼레드가 발표한 돈 바스 편곡의 <디디>가 히트를 친다. 칼레드는 마그레브(아프리카 서북부) 출신 가수로서는 최초로 톱50에 들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인기몰이에 앞장섰다. 인도와 스리랑카에서는 타밀어 버전이 나왔고, 에티오피아, 일본, 이집트, 걸프만 국가들까지 알려졌다. 프랑스와 그 밖의 지역에서 <디디>가 인기를 누리는 동안에도 알제리인들의 관심은 라이 러브 운동의 창시자이자 지중해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에게도 영감을 준 셰브 아스니에 쏠려 있었다.
어쨌든 라이는 블루스, 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적인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프랑스 베르시 종합경기장에서 펼쳐진 대규모 공연이 그 증거였다. 1998년 9월 26일 칼레드, 라시드 타하, 포델 등이 출연하는 콘서트 ‘1, 2, 3 솔레이’에는 1만 6천 명의 관객이 몰려들었다. 물론 뒤늦은 마케팅의 효과로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알제리 음악이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언론은 앞다투어 감동에 찬 어조로 상징적 가치를 지니는 이 공연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7월 어느 날 지네딘 지단이 승리의 헤딩골을 선사했을 때 쏟아졌던 환호처럼 알제리 음악의 성공은 이민자들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을 끌어냈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국민전선 당원들마저 쿠스쿠스와 메르게즈(강한 향신료가 들어간 가는 소시지)를 즐길 만큼 마그레브 문화가 프랑스 사회 깊숙이 자리 잡았다고 해서 음악 역시 그러하리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식민지 시절 알제리 음악의 멜로디는 기껏해야 변방의 민속음악 정도로 치부됐다. 더 심하게는 무어인 카페나 환락가에서 새어나오는 시끌벅적한 소음쯤으로 폄하됐다. 1917년 알제리 오레스의 유명 가수 아이사 엘제르무니가 당시에는 영화관이었던 올랭피아의 무대에 올라 총알받이로 내몰리는 동포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한 적이 있다. 1930년대에는 영화 <망향>의 음악적 속편 격으로 <누가 내 양탄자를 탐내는가> 등의 노래가 유행했다. 1950년대에는 봅 아잠 같은 이국적인 가수들이 엇비슷한 환상적 클리셰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내게 쿠스쿠스를 만들어줘>, <자기야> 등) 1960년대 들어 알제리 음악은 혁명적으로 변화한다. 망명과 고통을 노래하는 곡들이 굵직한 음반사들에서 LP판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마그레브 최초로 골든 디스크를 달성하고 <영주권> 등의 히트곡을 낸 슬리만 아젬 같은 가수들의 노래조차 마그레브 카페 문턱을 넘기는 힘들었다. 그의 노래는 훗날 그룹 ‘바르베스 국립 오페라’와 아클리 야이아텐에 의해 리메이크 됐고, 스페인 그룹 ‘라디오 타리파’나 다만 엘아리아시 등의 가수에 의해 다시 불리기도 했다. 라시드 타하는 엘아리아시의 노래 <야 라야>를 불러 재기에 성공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한때 알제리 음악의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기도 했다. 1968년 5월 혁명의 여파로 프랑수아 베랑제나 막심 르포레스티에 같은 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은 알제리 가수들과 형제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히트곡 <아 바바 이누바>로 <RTL>과 <유럽1> 차트에 이름을 올린 이디르나 자멜 알람 등과 같은 가수들은 프랑스의 좌파 단체들과 연대하여 공연을 열기도 했다. 1982년 레이 엘우아리의 <트렁크 대여섯 개>가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 이민자 밀집 지역에서 인기를 끄는 동안, 아랍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라시드 타하의 <카르트 드 세주르>(‘체류증’이라는 의미)라는 이름의 록그룹이 이민자 사회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청중의 반응을 염려한 라디오, 텔레비전, 거대 상점들의 편견의 벽을 깨지는 못했다. 이민 문제에 (역겨울 만큼) 강박적 반응을 보이는 프랑스에서, <유럽1>의 알랭 마느발과 <TF1>의 ‘대답할 권리’라는 프로그램 진행자 미셸 폴라크만이 그에게 출연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극단적인 반이민 정서가 확산되자 ‘뵈르’(마그레브 젊은이들을 부르는 속어로, 푸조-시트로엥 세대 자녀들의 이른바 ‘통제되지 않은 원산지 명칭’이다)들은 평등을 위한 행진을 벌였다. 덕분에 그룹 ‘카르트 드 세주르’는 샤를 트레네의 <부드러운 프랑스>를 리메이크한 곡으로 잠시나마 톱50에 들기도 했다.
이번엔 알제리 체제 하에서 이른바 ‘자유주의적’ 소수가 즐기던 역설적 매력을 지닌 라이가 상륙했다. 이미 일부 신문과 잡지가 오랑 스타일에 대한 소문을 잔뜩 부풀려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프랑스인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주제들, 가령 알코올이나 성적 메시지 따위에만 주목했다. 이 노래들은 일부 마니아층의 관심을 끌었을 뿐 마그레브계 청년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라디오 노바>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민자 라디오 채널을 통해 전파를 탔을 뿐이다. 1988년 알제리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미디어들은 알제리의 보수주의에 저항하는 효과적인 무기로서 라이에 주목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공연을 내보내는 것을 꺼려했다. 1992년 메이저 음반사에서 나온 칼레드의 <디디>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라이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도 <NRJ>와 같은 주요 라디오나 텔레비전 황금시간대 프로그램에서는 톱50의 높은 순위까지 오른 이 가수를 문전박대했다. 음반사 바르클레는 이 노래가 전파를 탈 수 있게 몇 초 분량의 광고시간을 구입해야 했다.
결국 싸움에 지친 라이는 맥빠진 ‘기타 장르’ 코너로 물러나버렸다. 알제리뿐 아니라 마그레브 전역에서 명성을 떨친 셰브 빌랄은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했다. “칼레드의 예에서 보듯 라이가 이름만 남을까봐 두렵다. 프랑스에서 라이 음악을 하는 이들은 이 장르를 샹송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프랑스 청중들이 라이를 본래 만들어진 대로, 본래의 느낌대로 감상했으면 좋겠다.”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라이는 다시금 이민자들의 음악이 되었으며, 라이의 역사에 획을 그은 가수들은 메이저 음반사와 한 작업이 실패하면서 음악 평론보다 가십 기사에 더 자주 등장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룩셈부르크에 거주하는 칼레드는 세금 포탈 혐의와 숨겨진 아들 문제로 골치 아픈 시기를 보냈다. 그는 라이의 전통적인 스타일을 되살린 곡 <자유>로 재기를 시도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셰브 마미는 임신 중인 전 애인을 감금하고 낙태를 강요한 혐의로 감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니콜라 사르코지를 지지한다고 비난받았던 포델은 야심찬 신곡, <블레드 메모리>로 재기를 꿈꾸고 있다. 결국, 이디르, 라시드 타하, 그룹 ‘바르베스 국립 오케스트라’, 아마지그 카테브 등, 정통 라이 가수가 아니라 라이를 힙합이나 알엔비 등과 접목시킨 가수들이 알제리 대중음악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래도 오랑의 카바레, 결혼식 피로연, 증기탕, 오랑과 알제, 우자, 튀니스 심지어 파리와 마르세유의 바 같은 곳에서 여전히 라이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라이 가수들은 알제리의 전통적인 멜로디에서부터 텔레비전에서 흔히 접하는 알앤비, 펑크, 힙합까지 다양한 장르를 접목시켜 독특한 리듬을 창조하고 있다.
라이의 이런 변화는 ‘파라볼라 세대’의 작품이다. 어렸을 때부터 <M6>, <MCM>, <MTV> 등을 통해 리미티, 아스니 같은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큰 세대다. 모두 알제리가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있을 때 데뷔한 이들이다. 칼레드와 같은 기성 가수들과 달리 그들이 감미로우면서 절망에 가득 찬 언어로 현실 속 비극을 노래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목소리와 억양을 간직하면서도 알제리 젊은이들의 삶을 갉아먹는 불편한 현실을 날것 그대로 묘사한다.
글·라바 무주안 Rabah Mezouane
<비브랑시옹>, <노바>의 음악 평론가. 파리 아랍세계연구소(IMA) 기획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