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와 랩에 담긴 흑인의 삶

2014-01-10     코넬 웨스트

 

아프로-아메리칸 지식인 코넬 웨스트는 비밥의 출현에서 시작하여 흑인 대중음악의 역사를 되짚는다. 소울 뮤직의 출현, 모타운 레코드사 설립, 랩의 부상 등 일련의 사건들을 차례로 살피면서 그 속에 담긴 정치적, 종교적 함의를 탐색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음악은 찰리 파커, 셀로니어스 몽크, 디지 길레스피 등 비밥 뮤지션들의 등장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 아프로-아메리칸 재즈를 아프리카화하는 그들의 특별한 방식은 멜로디에 집착하는 백인 위주의 스윙 재즈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 흑인 사회의 변화된 분위기와 감성에 대한 음악적, 창조적 응답이기도 했다. 비밥 재즈 뮤지션들은 노련한 기교와 재능으로 호전적이면서 동시에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억압된 감정들, 긴장과 좌절감을 표현해냈다.

지금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지만, 당시의 비밥 재즈는 민중의 음악이었다. 행인들이 콧노래로 부르거나, 구두닦이 소년이 휘파람으로 멜로디를 따라 부르거나, 도시 흑인들 모임에서 춤곡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소설가 토머스 핀천처럼 그들도 나서는 것을 싫어했다. 마치 19세기 말 예술가들처럼 인습에 저항하던 그들의 태도는 자주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들의 태도는 다음의 말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당신들이 내 음악을 듣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다!” 흑인들은 태생적으로 그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굳이 듣고자 한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비밥의 수명은 짧았다. 조금씩 변모되어 1950년대 초반의 쿨한 스타일에 흡수되어 버렸다. 그러나 비밥은 미국의 아프로-아메리칸 대중음악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마일즈 데이비스(초창기)와 존 루이스 같은 흑인 뮤지션들과 쳇 베이커, 데이브 브루벡 등의 백인 뮤지션들이 이끌던 쿨 재즈의 시대는 금세 저물었지만, (그룹 카운트 베이지의 음악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던) 아프로-아메리칸의 영적 블루스의 소리는 곧바로 찰스 밍거스, 레이 찰스, 아트 블레이키의 재즈 메신저스 등의 하드밥(Hard bop) 속에서 다시금 생명력을 되찾았으며, 소울과 펑크의 시대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1950년대 대부분의 미국 흑인들은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영성음악과 가스펠을 들었다. 그러나 흑인들이 도심으로 몰려들고 세속성과 돈을 쫓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종교음악과 재즈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편,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 오넷 콜맨 등의 영향으로 재즈는 선구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속물들을 위한 일종의 클래식 아방가르드 음악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다른 한편, 흑인 교회들이 ‘악마의 음악’(전통적으로, 블루스)을 비난하면서 흑인 종교음악은 점점 주변화되었다. 그리하여 재즈도 가스펠도 아닌 새로운 대중음악, 소울이 부상할 토양이 만들어졌다.

소울은 세속화된 가스펠, 펑크화한 재즈 이상이었다. 그보다는 아프리카화의 특별한 형태로서, 자주 모여 음악과 춤을 즐기는 흑인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장르였다. 소울 음악은 비밥의 포퓰리스트 버전으로, 풍부한 음악적 유산을 통해 흑인들에게 인종적 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대표적인 소울 뮤지션, 제임스 브라운과 아레사 프랭클린의 음악은 시골과 도시, 하층 프롤레타리아와 일반 노동자들, 신을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다만 흑인 중산층과 대부분의 백인은 예외였다.

출산 붐과 함께 흑인 사업가들이 늘어나면서 흑인음악은 하나의 시장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1958년, 디트로이트의 포드 자동차 공장 노동자 출신의 베리 고디가 레이블 모타운을 세우면서 흑인 대중음악은 큰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모타운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며 아프로-아메리칸 대중음악을 이끌었다.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등과 같은 천재 가수들과 스모키 로빈슨, 니콜라스 애쉬포드 등의 싱어송라이터들을 보유한 모타운은 아프로-아메리칸 대중음악을 생산하는 회사들 사이에서 가히 제왕의 자리에 올라섰다.

모타운의 성공은 꾸준히, 끈기 있게 사회적 계층 상승을 위해 노력하는 흑인 노동자 계급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모타운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 펑키한 폴리리듬(제임스 브라운, 더 왓츠 103번가 리듬 밴드 등)보다는 부드러운 리듬과 당김음을, 모순적인 리듬과 앤티포널한 스타일(아레사 프랭클린, 도니 해서웨이)보다는 부르고 답하기(call and response)의 억제된 스타일을,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적 저항 음악(질 스콧 헤런, 아치 솁)보다는 로맨틱한 감성의 서정성을 선호했다. 하지만 모타운은 끝까지 신중함과 세련미를 잃지 않으면서 아프로-아메리칸의 영적 블루스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모타운은 팬층이 확대되고 백인들 사이에서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서 흑인들 사이에서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롭게 대두된 두 가지 음악 경향, 즉 빠른 펑크와 멜로우 소울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특히 펑카델릭, 팔러먼트, 조지 클린턴 등의 출현으로 이른바 테크노펑크라는 새로운 펑크의 물결이 몰려오던 시기였다. 흑인들은 전자악기 음향 속에서 실현된 극심하게 왜곡된 음성과 그에 조응하는 리듬적 효과에 놀랐다. <I Wanna Know If It's Good to You>, <Loose Booty>, <Standing on the Verge of Getting It on>과 같은 펑카델릭의 노래들은 가히 혁명적 음악이라는 평을 들었다.
1970년대 초, 흑인 대중음악은 좀 더 정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상당히 놀랍게도, 1960년대 말의 정치적 열정은 아프로-아메리칸 대중 가수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제임스 브라운의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 등은 예외에 속했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어가는 와중에(전체 미군 전사자 중 28%가 흑인) 흑인 사회에서는 마약 사용이 확산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계에 진출하는 흑인이 늘어났다. 템프테이션의 <Ball of Confusion>, 치라이츠의 <More Power to the People>, 제임스 브라운의 <Funky President(Poeople It's Bad)>, 이즐리 형제의 <Fight the Power> 등은 공적 삶과 정치적 성공에 대한 아프로-아메리칸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노래들이다.

이런 관심이 가장 훌륭하게 형상화된 것은 모타운 역사상 최고의 명반인 마틴 게이의 <What's Going on>이었다. 자신들의 종교적 뿌리를 잊지 않은 흑인 대중 가수와 작가들은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된 구체적 정치 현실에서 괴리된 채 자신들의 고민을 상당히 모럴리스트적인 방식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1975년 큰 변화가 찾아왔다. 드디어 빠른 펑크가 멜로우 소울을 제치고 차트 선두에 오르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 디스코텍에서 ‘논스톱’ 댄스뮤직이 붐을 일으키고, 동시에 슬로우 댄스뮤직이 멜로우 소울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흑인 댄스뮤직은 아프로-아메리칸 대중음악 속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배리 화이트의 관능적인 업비트(약박) 멜로디, 브라스 컨스트럭션의 반복되는 당김음, 쿨앤 더 갱의 저지 시티 펑크, 나일 로저스와 버나드 에드워즈의 ‘시크한’ 그룹 ‘시크’ 등이 당시의 디스코 붐을 이끌었다. 그 후, 1975년 조지 클린턴과 윌리엄 ‘부치’ 콜린스가 낸 팔러먼트의 두 개의 앨범, <Chocolate City>와 <Mothership Connection>은 대중음악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조지 클린턴의 펑카델릭에 직접적으로 의존하면서 동일한 뮤지션들이 이끌었던 팔러먼트는 영적 블루스와 첨단 악기를 창조적으로 결합하며 흑인 테크노펑크의 시대를 열었다. 조지 클린턴이라는 천재의 손에서 탄생한 테크노펑크는 흑인음악이 미국 음악의 전반적 조류와 단절하는 두 번째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찰리 파커의 비밥이 아프로-아메리칸의 대중음악에 한 일과 비견할 만하다. 중복적 폴리리듬, 멜로디의 부재, 악보에서 일탈하는 창법, 극심하게 왜곡된 전자 음향 등이 특징이었다. 비밥의 가까운 친척뻘이라고 할 만한 테크노펑크는 당당하게 흑인 음악의 흑인적 성격을 강조했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독보적인 정체성이었다.

테크노펑크는 펑카델릭과 팔러먼트를 통해 포스트모던 흑인 대중음악의 대표적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덕분에 영적 블루스 운동은 컴퓨터가 보편화된 시대, 쾌락주의적 단계에 접어든 미국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특정 계층만 테크노펑크에 매료된 것은 아니다.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던 정치화된 흑인 ‘신중산층’, 블루스가 지배하는 게토에서 막 빠져나온 안정적인 노동자 계급, 초월적 도피를 꿈꾸는 하층 노동자 계급, 마약 속에서 살아가는 밑바닥 계층 모두 테크노펑크에 열광했다.

1978년 조지 클린턴이 낸 펑카델릭의 앨범 재킷을 보면, 각계각층의 흑인들이 마르쿠스 가비의 아프로-아메리칸 해방의 깃발(빨강, 검정, 초록)을 세우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깃발 위에는 ‘R&B'라는 문구가 찍혀있는데, 리듬 앤 블루스가 아니라 리듬 앤 비즈니스를 의미하는 약자였다. 가부장적 흑인 내셔널리즘의 전통에 따라, 생명의 원천이자 흑인 국가의 중추를 상징하는 나체의 아름다운 흑인 여성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것이 보인다. 테크노펑크의 성공 역시 비밥과 마찬가지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아프리카적 스타일과 테크놀로지의 변형이라는 테크노펑크의 소명은 금세 비흑인 음악 조류와의 만남으로 희석되고 말았다. 1975년부터 네 개의 현상이 두드러졌다. 구 아방가르드 재즈 뮤지션들의 재등장, 솔로 뮤지션인 마이클 잭슨의 급부상, 가스펠의 복귀, 흑인 랩의 활약이 그것이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Bitches Brew>(1970)에서 이미 소울이 재즈에 미친 영향이 나타나지만, 1970년대 말 조지 벤슨, 퀸시 존스, 허비 행콕, 도날드 버드 등 진정한 재즈 뮤지션들의 등장은 미국적, 자본주의적 문화와 사회 속에서 다양한 출신들의 생명력과 활기가 환상적으로 발현된 결과였다. 그들의 성공은 흑인 대중음악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들은 위대한 재즈 혁명가 루이스 암스트롱의 최초의 비전을 재확인해주었다. 마이클 잭슨은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제임스 브라운의 스타 스타일, 스모키 로빈슨의 강렬한 서정과 감성, 디온 워윅의 인종을 초월한 매력,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이즐리 형제의 거친 테크노펑크 등을 뒤섞는 데 성공한 그는 시대적으로 상당히 앞서있는 가수였다. 그는 동시대 음악을 이끄는 동력과 같은 존재였다. 한편, 가스펠의 폭발적 인기는 흑인 종교 공동체 내부에서 확산되던 펜티코스트파 운동의 영향으로 일부분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1972년 제임스 클리블랜드와 아레사 프랭클린이 함께 낸 더블앨범, <Amazing Grace>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안드레 크라우치의 <Take Me Back>, 월터 호킨스(에드윈 호킨스와 형제)의 <Love Alive> 등의 명반 역시 빼놓을 수 없다.

1979년 이후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흑인 랩의 부상이다. 그 전에 랩은 게토의 거리나 흑인 음악 콘서트 막간에 불리곤 했었다. 1979년 멜로우 소울 그룹 더 모멘트(나중에 레이, 굿맨 앤 브라운으로 개칭)의 작곡가 실비아 로빈슨은 할렘의 슈가힐 갱의 앨범 <Rapper's Delight>를 낸다. 몇 달도 채 안 되어 랩은 미국 전역을 평정하게 된다. 커티스 블로우,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퓨리어스 파이브 등 좀 더 세련된 뮤지션들의 등장으로 독창성을 획득하게 된 랩은 흑인 게토의 삶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커티스 블로우의 <The Breaks>, <125th Street>,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퓨리어스 파이브의 <The Message>, <뉴욕 뉴욕> 등을 꼽을 수 있다.

비밥과 테크노펑크가 그랬듯이 흑인 랩은 미국 흑인들의 감각과 감성의 변화를 보여준다. 랩은 직설적인 표현의 섬세한 형태 속에서 당김음과 폴리리듬, 언어적 표현, 관능적 에너지를 강조함으로써 대중음악을 ‘아프리카화’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랩의 천재성은 기술적 솜씨보다는 거리 말투의 속도와 풍부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비밥과 테크노펑크와 마찬가지로 랩은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비흑인들이 흉내 내기 힘든 장르로 남았다. 비밥, 테크노펑크와 달리 랩은 소외된 자들의 절망에 찬 외침이자, 게토 내에서 확산되던 잔인한 범죄와 실존적 절망을 직시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랩은 특정 계층의 표현 형식으로서, 침묵을 강요받던 블루스의 유토피아적 차원을 대신했다.

흑인 랩의 아프리카적 느린 리듬 속에 유토피아적 열망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열망이 없다면 투쟁도, 희망도, 의미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유토피아의 차원은 억압받는 자들의 절망에 대한 서정적 표현과 공존했다. 펑크 리듬 속에는 확실히 제의적인 요소가 숨어있다. 이 음악은 우리에게 파티나 춤판에서 카타르시스적인 이완의 순간을 선사한다. 이 리듬들 속에는 1980년대 초 미국 흑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의 흔적이 각인되어 있다.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정은 서서히 최하층 흑인 사회에 파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가난한 흑인들은 생존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 수단뿐 아니라 영적 수단마저 박탈당했다. 젊은이들의 비참은 더욱 두드러진다. 18~30세 흑인 청년의 자살률은 지난 20년 동안 4배나 증가했으며, 살인이 중요한 사망 원인으로 꼽힌다. 학대받거나 버림받은 젊은 여성 혼자 가정을 먹여 살리는 경우가 전체 가구의 50%에 달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 젊은이들에게 더 이상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글·코넬 웨스트 Cornel West
프린스턴 대학 교수. 종교사, 재즈사, 아프로-아메리칸 역사 전공. 저서, <Race Matters(인종문제)>(Beacon Press, 보스턴, 2001(1993))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