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舊) 유고의 분열과 음악

2014-01-10     로랑 제슬렝, 시몽 리코

1992년 초, 크로아티아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세르비아 민병대 그리고 크로아티아 국가 수비대 간에 치열한 전투가 거의 일 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에카타리나 벨리카(카트린 여제)’, ‘일렉트로닉 오르가슴’, ‘파티브레이커’, 모두 베오그라드 출신의 이 세 그룹은 ‘림투티투키’라는 반전 밴드를 구성한다. 그리고 독립 라디오 <베오그라드 B92>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민족주의 권력에 맞서면서, 이들 그룹의 평화주의 싱글앨범을 방송한다.

전쟁이 임박해 있던 1992년 4월 4일, ‘파티브레이커’와 ‘일렉트로닉 오르가슴’은 사라예보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연다. 그리고 이틀 후, 전쟁은 시작된다. 경제 위기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 원수의 사망과 만성적 부패로 불안정해진 유고슬라비아는 베를린 장벽 붕괴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민족주의에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이렇게 유고슬라비아 록 그룹의 창조적 유대감도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예술가들은 항상, 정권이 정한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한, 표현의 자유를 누려왔다. 특히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민족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록 음악의 도래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받았지만, 금지되지도 규탄 받지도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모스크바의 통제를 받는 동구 진영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중문화가 빠르게 서구화되고 미국화되었다”고 유고슬라비아의 록 음악 역사가이자 전문가인 이브 토믹은 설명했다. 1960년대 초부터 남부의 슬라브 젊은이들은 트위스트 춤을 격렬하게 춘다. 외국 음반들이 쉽게 국내 시장에 파고들었고, 이 음반들은 유고슬라비아의 거대 음반회사들인 유고톤(자그레브 소재)과 RTB(베오그라드 소재)에 의해 상업화되었다.

풍자와 비판의 음악이 가능했던 시대

10년 후, 록 음악은 대중들에게 파고들었다. 고란 브레고비치의 첫 번째 록 그룹인 ‘비옐로 두그메(‘하얀 단추’라는 의미)’는 민속음악을 뒤섞은 자신들의 록 음악으로 10년간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이들은 ‘유고슬라비아의 비틀즈’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고란 브레고비치는 훗날 자신이 사운드 트랙을 담당한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를 통해 국제적으로 유명해진다.

같은 시기 ‘미래가 없다’라는 슬로건을 외치는 젊은 펑크족들이 뉴욕과 런던에서는 급속히 확산된다. 완전고용과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었던 유고슬라비아는 이런 혼란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펑크는 우선 가장 서구화된 2개의 공화국을 통해 사회주의 유고 연방을 점령하더니, 그 후 동쪽으로 더 퍼져나간다. 1978년 조용한 슬로베니아가, “류블랴냐(슬로베니아 수도)가 아프다”고 외치는 펑크록 밴드 ‘판크르티’에 의해 뒤흔들렸고, 크로아티아에서는 정권이 소중하게 여기는 대중가요 ‘나로드나 피에스마(‘민요’란 의미)’를  펑크록 밴드 ‘파라프’가 비꼬아서 불러댔다.

이 선구적인 두 그룹은, 훗날 전 세계의 첨단 창작물이 될 ‘뉴 웨이브’라는 예술 기법을 선보인다. 그때쯤 유고슬라비아에 ‘현대적인 젊은이들’이 무대에 출현한다. 이 멋쟁이 예술가들은 양차대전 사이의 아방가르드 운동인 독일 표현주의, 러시아의 구성주의와 미래주의 운동에서 자신들의 영감을 찾아낸다. 자신은 “보위와 그램 록보다는 마야코프스키의 1920년대 러시아 스타일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우스터’라는 자그레브(크로아티아의 수도)의 전설적 그룹의 싱어인 다르코 룬덱은 단언한다. 그 시절 다르코 룬덱의 외모는 데이비드 보위의 빼놓을 수 없는 창작물 ‘지기 스타더스트’를 상기시킨다. 록 스타이면서 문학과 시(詩)의 애호가이며 연극학교를 졸업한 다르코 룬덱은 술집에서 어슬렁거리는 야행성 젊은이들의 반항적 모습을 다양하게 구현하고 있다.

“‘비스 아이돌리’, ‘사를로 아크로바타’, ‘일렉트로닉 오르가슴’ 세 그룹의 모음집 앨범인 ‘파케트 아란즈만’이 뉴 웨이브를 창시한 작품”이라고 전쟁 전 사라예보 라디오의 음악 평론가이며 작가인 벨리보르 솔리치가 강조한다. “사람들이 외국 가수보다 국내 가수의 노래를 더 많이 들었던 최초의 시기”였다고 ‘비스 아이돌리’의 싱어인 블라디미르 디블랸은 기억한다. 도시 젊은이들은, 마치 자그레브 필름의 동영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음악과 춤에 맞추어 살아가는 다른 삶을 상상한다.”

아즈라 같은 록밴드는 그리 걱정도 없이 아주 강력한 ‘공산주의 연맹(SKJ)’에 반항을 하기도 한다. 권력은 오히려 관용을 베풀고, 검열을 자주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검열을 받았던 유일한 경우는 ‘노동 계급이 천국에 갈 것이다’는 노래에 대해서였다. 이 제목은 풍자적인 비유였다. 우리들은 소비사회가 유고슬라비아를 정복해버린 사실을 비웃었다. 그 당시 코소보의 상황은 긴박했고,(1) 우리에게 그 노래의 출간을 포기하라는 압력이 있었다”고 룬덱은 이야기한다. 1977년 문화·교육 연방 위원회가 시행한 방법은, ‘나쁜 음반들’이 팔리지 않도록 단지 세금을 과도하게 매기는 것이었다.

‘록’에 녹여낸 정치적 목소리

그런데 ‘뉴 웨이브’에 대한 요구는 사실상 정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정권의 압력이 느슨해짐에 따라 제공된 기회와 현실을 누리자는 것이었다.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이 더 자유롭다고 느꼈으며, 학생들은 자신이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파트롤라 그룹의 싱어였던 레나토 메테시는 회고한다. “정치, 티토, 당 같은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2) 그런데 1982년부터 유고슬라비아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중앙 권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뉴 웨이브’는 점점 더 소멸해 갔다. 록 음악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장르인 ‘터보포크(포크의 하위 장르)’와 경쟁하게 된다. 터보포크는 대중의 농촌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한다.

특히 1987년 밀로셰비치가 권좌에 오르면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 민족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 사람들은 뮤직 박스와 음향합성장치를 이용하여 전통적이면서도 현대화되고 ‘디스코로 변형된’ 멜로디들을 다시 만들어 낸다. 람보 아마데우스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안토니오 푸시치는 1987년에 “터보포크는 사람들을 들뜨게 한다.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모든 자극은 터보포크다. 터보포크는 음악이 아니다. 흥분제도 터보포크고 민족주의도 터보포크다. 내가 터보포크를 발명한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뿐이다”(3)라고 말했다. 람보 아마데우스는 몬테네그로를 대표하여 2012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SC)'에 유럽연합의 위기를 조롱하는 노래 ‘유로 뉴로(Euro Neuro)’(4)를 가지고 출전하면서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런 흐름에 맞춰 록 무대는 정치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1986년 ‘비옐로 두그메’는 ‘플류니 이 자피에바이 모야 유고슬라비요’(‘우리의 유고슬라비아를 말하고 노래하라’는 의미)를 녹음한다. 이 곡의 일부는 유고슬라비아의 통일에 찬성한다고 노래하고, “이 노래를 듣지 않는 사람은 폭풍을 만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사라예보의 포크록 그룹인 ‘플라비 오르케스타르’(‘푸른 오케스트라’라는 의미)는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유격대원들의 슬로건인 “파시즘에게 죽음을, 대중에게 자유를”을 타이틀로 정하여 앨범을 출간한다. 그런데 19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더 이상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일원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1992년 1월에 연방 탈퇴를 인정받는다. 4월에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밀로셰비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건설한 세르비아와 몬테니그로 연합에 가입하기를 거부한다. 민족주의가 활활 불타오른다.

융합으로 발칸반도 정복한 ‘터보포크’

1990년대 초반 세르비아에서는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하려는 마피아식 정치계와 돈, 근육, 여자, 고급세단을 옹호하는 터보포크 스타들이 서로 밀접하게 유착한다. 부코바르(크로아티아 동부 도시) 함락을 축하하기 위해 터보포크 무대에서 춤을 추는 세르비아 민병대의 화면이 전 세계에 유포된다. 3년 후 여가수 레파 브레나는 자신의 고향인 보스니아에서 ‘그것은 사랑이다’라는 뮤직 비디오로 스캔들을 일으키는데, 그녀는 이 비디오에서 1995년 7월에 스레브레니차(유엔이 안전지역으로 선포한 피난민 주거지)에서의 대량학살 사건으로 기소되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공화국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의 부하들이 입는 유니폼을 걸치고 있다. 발칸 전 지역에서 수백만 장의 앨범을 판매한 글래머 터보포크 싱어인 체차는 아르칸이라 불리는 미래의 남편 젤리코 라즈나토비치가 주관하는 모임의 주요 초대 손님이다.

라즈나토비치는 극우파 세르비아 통합당의 당수이고,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공포를 확산시키려고 베오그라드가 이용한 민병대 ‘티그르’의 대장이다. 그 모임에서 체차는 “당신도 나처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세르비아 통합당에 입당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외친다. 결국 다르코 룬덱과 고란 브레고비치 같은 몇몇 록 가수들은 망명을 선택한다. ‘프릴랴보 카잘리스테(‘더러운 극장’이라는 의미)’ 같은 다른 록 그룹들은 애국주의 록 음악에 몰두하고, 심지어 ‘리블랴 코르바’ 그룹의 보라 도르데비치 같은 이들은 극단적 민족주의에 심취한다. 그러나 보라 도르데비치는 여전히 콘서트를 열고 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톰슨(제 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미국의 소형기관총을 지칭)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마르코 페르코비치가 공격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 1990년대와 2000년대에 해당 지역의 스타가 된다. ‘야세노바치와 그란디스카 스타라’(악명 높은 수용소들의 이름)라는 타이틀이 붙은 노래에서 마르코는 나치 정권의 동맹국인 우스타치 정권을 옹호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몇몇은 저항을 선택한다. 람보 아마데우스는 “빌어먹을 바보 시민들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당신들은 그들이 두브로니크(크로아티아 최남단 도시), 부코바르(크로아티아 동부 다뉴브 강 연안도시), 투즐라(사라예보 동쪽 도시)에 폭격을 하는 동안 즐기고 있나!”라고 말하면서 1992년 말 베오그라드에서 콘서트를 공연하는 도중에 분노한다.

그러나 대중은 예전의 우상들을 잊지 않았다. 룬덱은 “2000년 나는 전쟁 이후 처음으로 베오그라드에 돌아왔다. 향수병이 엄청나게 심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영웅으로 대접했다. 공항에서 택시 운전사는 나에게 ‘환영합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당신을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이야기한다. 룬덱만이 유고슬라비아 이후의 모든 지역에서 콘서트 장을 꽉 채우는 ‘예전의’ 스타는 아니다. ‘파티브레이크’, ‘플라비 오르케스타르’, ‘비옐로 두그메’ 등의 수많은 그룹들이 다시 만들어져, 콘서트 투어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영광스럽게 복귀한 것은 상당 부분 인터넷 덕택이다. 연방이 해체된 지 20년도 더 지나 가상의 유고슬라비아가 재건되었다. 수많은 포럼, 블로그, 전문 웹사이트가 사라진 황금시대를 찬양하고 있다. ‘뉴 웨이브’가 이 ‘유고슬라비아 향수병’(5)을 결성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식의 신화화는 너무 심한 것이다. 과거에 대한 회상을 멈춰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새로운 재능의 출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오늘날 가장 강렬한 연결선을 만들어주는 것은 여전히 터보포크다”라고 말하며 룬덱은 이런 현상을 괴로워한다. 사실상 터보포크는 완벽한 금발인 옐레나 카를루사 같은 여러 스타를 여전히 배출하고 있다. 옐레나는,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면서도, 섹스·알코올·돈을 노래한다. 터보포크는 오늘날, 각 국가의 고유한 특성을 받아들여 융합하면서, 발칸 반도 전역을 정복했다.(6)


글·로랑 제슬렝 Laurent Geslin
 시몽 리코 Simon Rico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1) 1981년 3~4월, 코소보 자치주에서 저항 운동이 벌어진다. 경찰은 이 운동을 과격하게 진압한다.
(2) 이고르 미르코비치(Igor Mirkovic)의 기록 영화 <스레트노 디예테(Sretno Dijete, ‘행복한 아이’라는 의미)>에서 인용, 크로아티아, 2003.
(3) 유타르니 리스트(Jutarnji List)와 아흐메드 부릭(Ahmed Buric), “터보포크의 영화(榮華)와 쇠락”, <쿠리에 엥테르나시오날(Courrier International)>, 파리, 2009년 10월 8일 참조.
(4) “람보 아마데우스-유로 뉴로(몬테네그로), 2012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공식 시사회 비디오”, YouTube.com
(5) 장 아르노 데랑(Jean-Arnault Dérens), “‘유고슬라비아 향수병’ 탐색”,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8월.
(6) 음 테이프, “유고슬라비아: 폭풍이 불기 전의 펑크(1980~92)”, “록 혁명”, 프랑스 큘튀르(France Culture), 2012년 7월 28일, www.franceculture.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