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중국인이 될 수 없는 이유

2014-01-10     브누아 브레빌

   
 
지난 10월 말, 일간지 <레키프(L'Equipe)>에 실린 유럽 탁구선수권대회 준준결승전 관련 기사를 보자. “여자 경기에서는, 2007년과 2011년 유럽선수권 두 차례 우승에 빛나는 네덜란드의 리 자오가 포르투갈의 푸 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리 자오는 유럽 최강 선 옌페이를 꺾고 올라온 스웨덴의 리 펀과 준결승에서 맞붙는다. 다른 한 쪽에서는 산 샤오나와 한 잉, 두 독일 선수끼리 결승행 티켓을 놓고 다툰다.”(1)

국적 취득 과정에서 모든 외국인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높은 기량의 스포츠 선수, 부유한 경영자, 좋은 스펙을 갖춘 이민자가 새 여권을 발부 받을 확률은 무일푼의 망명자에 비해 거의 무한정 높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자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국적 부여 방식은 여권이라는 행정서류를 발명한 19세기 유럽의 지배적인 정신과 대조를 이룬다. 여권은 주권의 표시로서, 역사학자 존 토르페이의 표현을 빌면, “이동의 합법적 수단에 대한 독점권”(2)이 사적 주체들로부터 공권력으로 이양했음을 상징한다. 구체제에서는 호적을 사실상 교회가 관리했다. 다른 고장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농노는 영주에게, 노예는 주인에게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해운회사는 특별한 절차 없이도 특정 승객의 승선을 거부할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이민이 증가하는 현상과 맞물려 민족국가들이 탄생하면서, “누가 국민이고 누가 국민이 아닌지, 누가 출입국의 권리를 누리고 누가 누리지 못하는지”를 규정하려는 의지가 대두됐다. 즉, 국가 공동체의 일원과 외국인에 대한 법적 분리가 이루어졌다. 국민은 선거에 참여하고, 국내를 자유롭게 이동하고, 해외에서 외교공관의 보호를 받고, 사회보장 혜택을 누리고, 공무원으로 일할 권리를 보장받는 대신, 군 복무나 조세 등과 같은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각국의 ‘국적법’이 변화해온 과정을 추적해보면 몇 가지 주요 변수들이 지금도 유효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신 국적의 경우 출생과 동시에 정해지는 출생지와 가계가 변수라면, 개인이 삶의 중간에 ‘귀화’하여 획득하는 취득 국적의 경우에는 결혼 관계와 거주지가 변수로 작용한다. 이 기준들이 조합·적용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한 국가의 국민의 정의, 정치적 공동체의 경계가 드러난다. 국적법과 관련하여 국제적 틀을 제시해주는 드문 문서인 1930년 헤이그 협정에 따르면, “법적으로 국민을 정의하는 방식은 각국의 결정에 따른다.” 이는 주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두 개의 개념이 충돌했다. 우선 프랑스식 개념으로, 권리에 바탕을 둔 포괄적 국적 개념이 있었다.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된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고 명시되었다. 역시 같은 책에서 영감을 받은 에르네스트 르낭은 “인종 정치”에 반대하며 국가의 정치적 개념을 시민의 “일상적인 국민투표”(3)로 정의했다. 다른 한편에는, 요한 피히테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제시한 독일식의 배타적 국적 개념이 있었다. 이 개념에 따르면 독일 국민은 “진정한 독일 정신”을 담지한 유기적 총체이자 민족 공동체로 정의된다. 각국의 국적법은 오랫동안 두 대립하는 개념에 입각하여 해석되었다. 시민국가는 속지주의를, 민족국가는 속인주의를 채택했다. 2012년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속지주의는 곧 프랑스다”(4)라고 선언했지만 이는 상당히 잘못된 표현이다. 국적법을 한 국가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국적법은 한 국가의 이민사, 정치와 인구 상황, 사법 전통, 외교 관계에 따라 변천하기 때문이다.

사민국가는 속지주의, 민족국가는 속인주의를 채택

프랑스의 국적 개념은 19세기 동안 두 번의 변화를 겪었다. 구체제에서는 법에 대한 복종이 ‘충성 원칙’에 입각해 있었다. 각 개인을 영주의 영토에 묶어두는 봉건적 예속과 속지주의를 교묘하게 섞어놓은 것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거주하면서 군주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든 개인은 프랑스인으로 간주되었다. 이 원칙은 수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하다가 프랑스와 미국의 혁명 과정에서 군주제의 유물로 비판받았다. 구체제와 단절을 선언한 나폴레옹 시민법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출신 국적을 정의했다. 당시 프랑스식 속인주의 모델은 오스트리아(1811), 벨기에(1831), 스페인(1836), 프러시아(1842), 이탈리아(1865) 등에서도 채택되어, 대영제국의 인도, 파키스탄, 뉴질랜드 등 구식민지 여러 곳에서 여전히 유효했던 속지주의와 대조를 이루었다. 프랑스는 1889년 다시금 영국식의 속지주의로 되돌아온다. 국민 개념이 갑자기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두 가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첫째로, 1871년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된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둘째로, 외국인들을 국가 공동체에 통합시킬, 다시 말해 군대에 편입시킬 필요가 있었다. 19세기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낳은 자녀들은 프랑스 출신임에도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국적법을 개정하지 않을 경우 그 수는 계속 늘어날 터였다. 1851년 그 수가 38만 명이었던 것이 1881년에는 이미 전체 4천만 인구 중 1백만 명을 헤아렸다. 국적법은 결국 개정되었다.

속인주의 전통으로 유명한 독일도 20세기 말 큰 변화를 겪었다. 뒤늦게 이민 국가에 합류한 독일은 그때까지 혈통을 국적 부여 기준으로 유지해왔다. 한편, 외국인 거주자 수는 끊임 없이 증가하고 있었다. 국적법 개정 2년 전인 1998년 그 수는 730만 명을 헤아렸다.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이민자 유입 양상은 비슷했지만 외국인 수는 2배나 많았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이민자가 밀려드는 국가들은 차례로 기존의 속지주의 원칙에 속인주의적 요소들을 첨가한 법을 도입하였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민자들이 세운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에서는 대체적으로 속지주의를 표방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에게는 미국 국적이 부여된다. 유럽은 훨씬 엄격하다. ‘유보적 속지주의’를 채택한 프랑스, 덴마크, 이탈리아에서는 성인 연령이 될 때까지 기다린 후 해당 국가가 ‘주 거주지’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두 번째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 다만, 부모 중 한쪽이 프랑스 출신이기만 하면 아이는 출생과 동시에 프랑스 국적을 부여받는다. 이른바 ‘이중 속지주의’로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스페인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다. 역사학자 파트리크 바일과 란달 한센은, “유럽의 경험에서 보듯이, 대규모로 유입된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아 인구의 중요한 일부가 되면 국적 취득 요건 완화 압력이 거세진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 압력에 언제까지고 저항할 수는 없다”(5)고 말한다.

아프리카 신생국들, 속인주의 채택

권위주의 체제는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한다. 가령, 이민자가 많이 몰려드는 일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속인주의를 고수한다. 이런 선택은 식민지배의 유산일 수도 있다. 영국과 프랑스 제국에서 지배적이었던 속지주의는 결국 인구의 위계화로 귀결됐다. ‘원주민’은 식민 통치자와 같은 국적이었음에도 시민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들은 본국의 주민들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그 후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은 속지주의를 버리고 속인주의를 채택했다. 지역 현실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그어진 국경선 안에서 통합된 국민감정을 고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애초의 의도와 달리, 속인주의는 외국인의 진입을 막고, 이민 수입국에 유리한 방식으로 그들을 이등 시민의 위치에 묶어두기 위한 방편으로 쓰인다. 사실상 세계 모든 나라에서 외국인은 일부 사회적 권리에서 배제당한 채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다.(6) 프랑스의 경우, 외국인은 민간 부문의 일부 직위를 역임할 수 없다. 가령, 언론사 편집장, 주류 소매인, 보안 회사 사장이 될 수 없다. 태국은 그 목록이 훨씬 길다. 외국인은 미용사, 회계사, 관광 안내인이 될 수 없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한다. 속인주의를 통해 신분이 대물림되는 셈이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속인주의를 적용하고 있다. 해외로 빠져나가는 인구 비율이 낮은 국가들은 때로 시간적 제약이 부과된 속인주의를 채택한다. 가령, 캐나다인 어머니에게서 출생한 아이는 “해외에서 출생한 첫 세대에 속한다는 조건”에서만 어머니의 시민권을 물려받을 수 있다.(7) 반면, 유출 인구가 많은 국가(중국, 필리핀, 베트남, 아이티, 태국, 알제리, 모로코, 말리, 세네갈 등)에서는 해외 동포 자녀들이 부모의 국적을 물려받는 것이 훨씬 쉽다. 디아스포라가 증가하는 이유다. 비율로 보면 아이티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1천만 인구 중 3백만 명이 해외에 거주한다. 심지어 정부에 ‘재외동포부’라는 부처가 있을 정도다. 무조건적 속인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은 해외 거주민과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동포 네트워크 구축, 외국으로부터의 송금, 초국적 파트너십 등 다양한 이점을 누릴 수 있다.

때로 외국인을 배제하기 위해 사용되는 속인주의는 성차별에도 동원된다. 아랍 국가들 대부분(한국판 12월호 기사 참조)과 부룬디, 스와질란드, 네팔, 수리남의 여성들은 자식과 남편에게 자신의 국적을 물려줄 수 없다. 파키스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과테말라, 말레이시아, 태국에서는 자녀에게만 국적이 부여된다. 서구 나라들에서도 오랫동안 여성의 국적을 자식이나 남편에게 물려주는 것을 금지했다. 프랑스는 멕시코보다 4년이 늦은 1973년 이런 금지를 철폐했다. 그 후 독일(1979), 이탈리아와 스페인(1983), 벨기에(1984)가 뒤를 이었다.

성차별 문제 해결에 큰 진전이 없는 아랍 국가들과 달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변화의 기미가 보이고 있다. 1992년 보츠와나의 여성 변호사 유니티 도우는 미국인 남편과 자녀들에게 자신의 국적을 부여하지 못하는 것에 반발해 위헌 신청을 냈다. 더욱이 남편은 보츠와나에 10년 넘게 거주해온 터였다. 3년간의 공방 끝에 보츠와나 법정은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관은 “여성이 가축처럼 취급 받고, 남성의 변덕과 욕망에 복종하는 존재였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 에티오피아, 말리, 니제르 등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도 그 뒤를 따랐다. 최근에는, 세네갈이 2013년 6월 남녀평등이 보장된 국적법을 도입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성차별이 감소하는 데 반해 인종차별과 민족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해방된 노예들이 세운 나라 라이베리아는 오직 ‘흑인 혈통’의 아이들에게만 출신 국적을 부여한다. “긍정적인 라이베리아의 문화, 가치, 성격을 간직하고, 전파하고, 유지하기 위해” 비 흑인의 귀화는 금지된다. 말라위에서는 최소한 부모 중 한 쪽이 ‘말라위 시민권자’이며 동시에 ‘아프리카 혈통’인 경우에만 출신 국적이 주어진다. 나이지리아 헌법에는 인종 선호가 더 미묘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부모 혹은 조부모 중 한 쪽이 나이지리아 토착민 공동체에 속하거나 속했던 경우에만” 국적을 획득할 수 있다.

속지주의와 속인주의 사이에서 이중국적

오로지 속인주의만 택하는 국가와 속인주의에 속지주의적 요소를 결합하여 적용하는 국가로 양분된 세계에서 일부 아이들은 이중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가령,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레바논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아르헨티나 국적(속지주의)과 레바논 국적(속인주의)을 동시에 취득할 수 있다. 반대로, 베이루트에서 아르헨티나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는 레바논 국적 취득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편, 아제르바이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일본 등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에서는 외국 국적을 취득하면 곧바로 국적을 박탈당한다.

거의 1세기 넘게,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국민에게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중국적은 배신, 간첩 행위, 국가 전복 등을 연상시켰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이런 편견을 “명백하게 부조리하다”고 비판했다. 국제 상황이 불안정할수록 의심은 커졌다. 이중국적자는 어느 쪽에서 군복무를 할까? 전쟁이 나면 어느 편을 들까? 1963년의 스트라스부르 협약은 여전히 “복수 국적자 감소”를 목표로 명시했다. 이처럼 예전에는 금기시 됐던 이중국적이 오늘날에는 지구상 절반 가까운 나라에서 허용되고 있다. 이중국적자들의 “국제적 영향력”이 유용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조엘 가리오멜랑 프랑스 상원의원은 “절반이 이중국적자인 250만 명의 해외 거주 프랑스인들은 경영자, 프로젝트 책임자, 무역업자, 컨설턴트, 교육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밀도 높은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프랑스의 무역과 ‘소프트 파워’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다”(8)라고 역설했다. 서구의 이민자 수입국들이 가장 먼저 변화에 적응했다. 새로운 상황에 저항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 국가들은 차례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편을 택했다. 어떤 국가도 개인의 국적 취득이나 박탈 사실을 타국에 알릴 의무를 지지 않는다. 1949년 영국, 1973년 프랑스, 1976년 캐나다 등이 이중국적을 인정했다.

이런 움직임은 1990년대 아프리카로 확산됐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직후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은 식민 지배 유산과의 분명한 단절을 위해 이중국적을 금지했다. 각 개인은 한 나라만을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대륙 안팎에서 이민이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국적 선택을 강요당한 해외 동포들이 거주국 국적을 취득할 경우 동포들과의 연계가 단절되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중국적을 인정하는 나라가 점차 늘어나 현재는 이중국적을 금지하는 나라(앙골라, 베냉, 부르키나파소, 지부티, 말리, 나이지리아, 알제리 등)보다 많아졌다. 그 중에는 정부 허가를 조건으로 인정하는 나라(이집트, 에리트레아)도 있다.(9)

매년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나라가 늘고 있다. 2010년 벨기에, 2011년 아이티, 2012년 니제르가 목록에 새로 이름을 올렸다.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추세다. 이민 양상의 변화뿐 아니라 지정학적, 경제적, 기술적 요소들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냉전 종식, 국제 정치 협력 강화로 국가 간 긴장이 완화된 것도 한 원인이다. 전쟁 위험이 감소할수록 이중국적에 반대하는 논리로 자주 동원되던 시민들의 충성도에 대한 염려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에 덧붙여, 더 빠르고 더 저렴해진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이민의 경향이 변화했다. 일단 이민을 간 후에는 본국의 지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19세기 이민자들과 달리, 21세기의 이민자들은 거의 매일 전화와 인터넷으로 본국의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휴가 기간 동안 본국을 방문하거나 퇴직 후 귀국하여 여생을 보내기도 한다. 이처럼 이민자들과 출신국의 연계는 더욱 강화되는 추세여서 출신 국적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법학자 피터 스피로가 이중국적 허용을 “세계화의 불가역적 귀결”(10)로 본다면,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은 “민족국가 개념에 입각한 주권의 부분적 가치 절하”(11)로 평가한다. 어쨌든 이중국적이 전 세계적으로 허용되는 날이 곧 올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 일본, 우크라이나, 이란, 태국, 버마, 쿠웨이트, 아랍 에미리트 연합 등에서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일부 국가들은 특정 경우에만 허용한다. 가령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에서는 망명자 혹은 국적 포기를 허용하지 않는 국가 출신의 이민자에게만 이중국적을 허용한다.(12) 이중국적 금지나 제한은 귀화 과정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독일 거주 터키인들은 출신 국적을 포기하기 싫어서 독일 국적 취득을 포기하기도 한다. 어차피 국적 없이도 독일인들과 비슷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독일은 서구 국가 중 외국인 귀화율(13)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그 뒤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영국, 스웨덴, 스페인, 슬로바키아 순으로 낮은 비율을 보인다.(14) 일반적으로 국적 취득 요건을 결정짓는 기준은 과거, 현재, 미래의 거주지와 혼인관계다. 후자의 요건이 만족되면 거주 기간 제한이 완화되기도 한다. 출생과 함께 자동으로 부여되는 출신 국적과 달리, 취득 국적은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제약을 받기도 한다. 가령, 프랑스에 5년 이상 거주했고,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충분한 소득이 있고, 전과가 없는, 즉 정부가 제시하는 국적 취득 요건을 두루 갖춘 베트남 출신 이민자의 신청이 반려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각국 정부는 국적 취득 대상을 선별함으로써 그 수를 조절한다. 2010년 9만 5천 명이었던 프랑스의 귀화자 수는 2012년에는 그 절반인 5만 명으로 급감했다. 3억 인구 중 연간 60만 명이 시민권을 취득하는 미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지만 일부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는 그래도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가령, 인구 1250만의 세네갈은 지난 50년간 고작 1만 2천 명의 외국인에게만 국적을 부여했다. 중국의 경우 2000년에 발표된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체 인구 12억 명에 달하는 이 나라에서 귀화자로 받아들여진 외국인은 941명에 불과했다.

서구 국가에서 국적 취득은 통합 과정의 완결로 간주된다. 그래서 외국인 동화 정책을 위해 완화된 규칙이 적용되기도 한다. 가령,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 대륙에서는 국적 취득 신청자의 최소 거주 기간이 길지 않다.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국적취득 신청을 위한 최소 거주기간이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는 2년, 우루과이는 3년, 브라질과 캐나다는 4년, 페루, 칠레, 멕시코, 미국은 5년이다. 유럽대륙의 경우도 비슷해서 불가리아 3년, 벨기에, 프랑스, 영국, 폴란드는 5년이다.

유럽에서 가장 엄격한 나라로는 리히텐슈타인(30년), 안도라 공화국(25년), 스위스(12년), 룩셈부르크(10년) 등이 있다. 그 외 아랍에미리트(30년), 카타르(25년), 브루나이(20년) 등도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대부분 석유나 가스로 벌어들인 달러, 유리한 조세 제도 등 국부를 소수 인구가 공유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2013년 카타르 전체 인구 1900만 중 외국인 비율은 80%에 달했다. 대부분 인도, 이란, 방글라데시, 이라크 출신이다. 이들은 국가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채, 즉 가스 수출로 벌어들인 국부로부터 배제된 채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수를 받고 일한다. 노조에 가입할 수도 없고 언제라도 노동허가를 박탈당할 수 있다. 걸프 만의 이 작은 군주국은 그들에게 국적을 부여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국가에 이익을 안겨준 혹은 안겨줄 여지가 있는 소수만이 국적 취득 기회를 얻는다. 1992년 아랍에미리트에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을 선사한 소말리아 출신 육상선수 무함마드 술래이만이 대표적이다. 두 번째 메달은 사이드 사이프 아사드라는 새 이름으로 귀화한 불가리아 출신 역도 선수 안젤 포포프가 가져다주었다.

특수한 언어, 역사, 문화, 민족 관계 때문에, 혹은 인구의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국가들은 선별 제도를 운영한다. 아랍 에미리트 연합에서 3년 이상 거주한 카타르와 두바이 출신 주민은 국적 신청 자격을 획득한다. 반면 아랍국 출신은 7년, 그 외 지역 출신은 30년 이상을 거주해야 한다. 바레인의 경우는 비아랍인(25년)과 아랍인(15년)에게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15) 이스라엘은 유대인에게 특혜를 준다. 이른바 ‘복귀권’에 의거하여, 이스라엘에 거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모든 유대인은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는 이른바 ‘약식 귀화’라는 이름으로 출신국가에 따른 선별 정책을 실시한다. 아이슬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가 1969년 체결한 협약이 대표적이다. 가령, 덴마크에 사는 핀란드 이민자는 거주 기간이 2년만 넘어도 국적 취득 신청을 할 수 있다. 다른 외국인들은 7년 이상을 거주해야 한다.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 포르투갈, 안도라 출신, 세라파딤 유대인에게 거주기간 10년 대신 2년이라는 특혜를 주는 정책을 도입할 예정이다. 프랑스의 경우 과거 식민지에서 해방 전에 태어난 이들과 자녀들에게 특혜를 준다.

EU국가들, 투자를 통한 시민권 획득 허용

민족적 선호는 때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0세기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에서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일본인은 브라질로, 한국인은 중국으로, 베트남인은 프랑스로 떠났다. 국제결혼, 거주국의 속지주의에 따른 귀화 등의 이유로 그 이민자들의 후손들은 현지 국적을 취득했다. 1980년대부터 이 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체류증 발급 과정에서 특혜를 주는 방식으로 해외 동포의 귀국을 장려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로 이들의 국적 취득이 용이해졌다.

하지만 여권만 있다고 모든 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뉴욕의 한 사업가가 파리로 날아가서 사업 파트너를 만나 계약을 체결하는 데 1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반면, 그의 경쟁자인 보츠와나의 사업가가 파리에 가려면 비자부터 신청해야 한다. 신청서를 작성하여 수수료와 함께 제출하고 며칠을 기다려야 간신히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골치 아픈 행정 절차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시민권 취득 관련 전문 업체에 부탁을 하면 된다. 전문가가 두 번째 여권을 손에 쥐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이 분야의 선도적인 업체 헨리 앤드 파트너스는 “고객에게 신속하고 효과적인 행정 절차를 제공해 드립니다”라고 광고한다. 혈통의 권리, 땅의 권리에 돈의 권리를 덧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이 세 번째 권리 덕분에 남반구 국가의 부자는 타고난 불운을 극복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 회사는 유럽연합이 제공하는 이동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고객들에게 간단한 방법을 권한다. 오스트리아의 ‘투자를 통한 시민권 획득’ 프로그램이다. 오스트리아에 4백만 유로 이상을 투자하는 이는 18개월 내에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다른 이민자와 달리, 이 부유한 신청자들은 10년 이상 거주 기간을 채울 필요도 없고, 독일어를 할 줄 몰라도 되며, 출신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점점 더 많은 유럽 나라들이 오스트리아의 본을 따라 국내에 큰돈을 투자하는 외국인에게 체류증을 부여하는 내용의 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가격은 나라마다 차이를 보인다. 헝가리 25만 유로, 아일랜드 50만 유로, 포르투갈 1백만 유로, 네덜란드 125만 유로 순이다. 몇 년 안에 부유한 이민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국적도 취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혈통으로 보건대 어느 나라에서나 호의적인 대접을 받을 게 확실하다.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리듬분석> 등이 있다.

(1) <레키프>, 파리, 2013년 10월 13일. <Le Canard Enchaîné>, 파리, 2013년 10월 23일자에서 인용.
(2) John Torpey, ‘Aller et venir: le monopole étatique des moyens légitimes de circulation (출입국: 합법적 이동 수단에 대한 국가적 독점)’, <Cultures & Conflits>, 파리, n°31~32, 1998년 봄-여름호.
(3) Ernest Renan, <Qu'est-ce qu'une nation?>, Pocket, 파리, 1993. [에르네스트 르낭 저, 신행선 역, <민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 2002.
(4) <Reuters>, 2012년 4월 29일.
(5) Patrick Weil & Randall Hansen(편), <Nationalité et citoyenneté en Europe (유럽의 국적과 시민권)>, La Découverte, coll. ‘Recherches’, 파리, 2010.
(6) Alexis Spire, ‘Xénophobes au nom de l'Etat social(제노포비아의 포로가 된 사회복지 정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12월.
(7) ‘캐나다 시민권의 취득과 상실’, 캐나다 시민권·이민부, 오타와, 2009년 4월, www.cic.gc.ca
(8) <La Tribune>, 파리, 2011년 6월 17일.
(9) Bronwen Manby, ‘아프리카의 국적법: 비교 연구’, Open Society Institute, 2009. 법에 이중국적 문제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국가들은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10) <The New York Times>, 2012년 7월 18일.
(11) Saskia Sassen, ‘Critique de l'Etat. Territoire, autorité et droits de l'époque médiévale à nos jours(국가 비판. 중세에서 현대까지의 영토, 권한, 권리)’, Demopolis-Le Monde diplomatique, 파리, 2009.
(12) Thomas Faist, Jürgen Gerdes, ‘Dual citizenship in an age of mobility’, Migration Policy Institute, 워싱턴 DC, 2008.
(13) 전체 외국인 중 연간 귀화자 수를 백분율로 나타낸 것.
(14) Dietrich Thränhardt, ‘Naturalisations en Allemagne: progrès et retards(독일의 귀화: 발전과 지연)’, <Hommes et Migrations>, n°1277, 파리, 2009.
(15) ‘Discrimination in granting citizenship in Bahrain’, Bahrain Center for Human Rights, 2004년 3월 1일, www.bahrainright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