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류 대학’ 브랜드를 소비하는 시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을 이루는 데는 돈이 들게 마련이다. 등록금과 기숙사비, 책값, 용돈, 방학 때 집으로 가기 위한 교통비 등 4년간 이들 학교에 다니기 위해 드는 비용은 외국인 유학생의 경우 30만 달러에 육박한다. 비싼 가격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값어치는 지불한 비용만큼의 효용을 얻었는가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미국 대학은 비싼 등록금 값을 하고 있는 걸까? 뉴욕타임스의 여기자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대학에서 보낸 노교수가 함께 쓴 책 <비싼 대학>(지식의 날개)은 이 질문에 대한 친절한 답변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질문에 대한 저자들의 답은 “아니오”다. 원저의 제목 <Higher education?- How Colleges Are Wasting Our Money and Failing Our Kids>(고등교육? 대학은 우리의 돈은 어떻게 낭비하며 우리 아이들을 망치고 있는가)는 한층 직설적이다. 저자들은 현장에서 얻은 생생한 근거를 토대로 “미국 대학은 대학 교육 본연의 목적을 상실했다”고 못 박는다.
저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대학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스스로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메리칸 드림을 위협하고 있는 것처럼, 개발국 젊은이에게 고등 교육의 이상으로 여겨졌던 미국의 대학교육 역시 벽에 부딪혔다. 뭉게구름 같은 환상은 아직 건재하지만 언제 흩어질지 몰라 위태로울 지경이다. 미국 일류대학의 학부 교육이 차별성과 우수성을 잃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학생들의 생생한 증언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교수님들은 우리를 위해 여기에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하버드대학교 3학년 학생 한 명이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가 하버드에 온 이유는 우리가 받는 교육 때문이 아니라 이 학교의 학위가 우리에게 주는 명성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오리건주립대학교에 다니는 네이선 십먼의 경험담은 더 적나라하다. “여기에는 선생님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교수님들은 강의 첫날에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연구를 위해 이 학교에 있는 겁니다. 강의는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은 한 학기를 재미있게 보내지는 못할 겁니다.’” (102쪽, ‘가르치지 않는 대학’에서) 이 뿐만이 아니다. 졸업 후 10년이 지나도 갚기 어려운 대출을 받아 학비를 냈지만 시간 강사나 대학원생, 심지어 학부 선배가 교단에서 수업을 진행한다. 강의 내용은 학생의 지적 성장보다는 교수의 논문 주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연구 업적을 쌓는 것이 주업인 교수는 학교에서 도통 찾아볼 수 없어도 등록금의 상당 부분을 가져간다. 이 같은 외적인 부실함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대학이 가르치는 내용의 얄팍함에 있다. 대학 교육 중에서도 학부 교육에 초점을 맞춘 저자가 대학 교육에 들이대는 잣대는 확고하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현실과 정신세계를 자극하는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사고하면서 지성을 사용하기를 바란다.” (13쪽)
대학은 사고와 비판 정신을 기르는 곳이며, 이를 바탕으로 지성의 싹을 틔우는 곳이기 때문에 직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배우는 직업 훈련장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업 경영의 시뮬레이션장 같은 경영학과의 학부 수업은 대학 교육의 본질에서 벗어난 좋은 예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남의 나라의 일만도 아니다. 기업은 대학이 쓸 만한 인재를 만들어서 졸업시키지 않는다고 투정하고, 사회는 이를 함께 개탄하는 일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대학 교육과 취업 교육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도 오래다. 높은 취업률은 대학의 신입생 모집 광고에 등장하는 주요 자랑거리이며, 교수가 학교에서 고시생만을 위해 마련한 ‘고시반’을 운영하며 취업 학원의 관리자로 전락한 슬픈 현실도 있다.
돈벌이도 못하면서 고담준론만 일삼게 하려고 비싼 돈을 들여야 하냐고 되묻는 실용주의자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대학을 나와도 설 자리가 없는 취업난 속에서 배움보다는 일자리에 목마른, 졸업이 두려운 대학생들을 누가 탓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 교육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의 변화에도 본질에 집착하는 것은 유연성 부족이라 비판 받을 수 있겠으나, 뿌리를 잃은 나무는 결국 흔들리기 마련이다. 거기에 미국 대학이 흔들리는 이유가 있고 한국 대학에게도 닥쳐올 위기가 보인다.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성인기로 막 들어선, 인생의 다시 못 올 시기를 회사에서 몇 달이면 체득할 수 있는 얄팍한 앎으로 채워버리는 것의 기회 비용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러므로 취업 교육이 빠진 자리를 채울 주인공은 인문학 교육이 돼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동의한다. 인문학은 스트레스의 해방구를 찾는 기업 경영자들이나 은퇴한 60대를 위한 교양강좌가 아니다. <현대사회와 윤리 문제> <시각예술의 이해> <동양미술사> 등 실생활과 무관해 보이는 인문 강의들이 대학 문을 나선 순간 우리에게서 얼마나 쉽게 멀어져 가는지, 그 시기의 배움이 우리 삶에 얼마나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돌아본다면 학부의 인문학 교육은 젊은이들의 삶에 넓이와 깊이를 더하는 보석 같은 시간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은 미국 대학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겨눴지만, 한국의 현실은 더욱 비극적이다. 강의는 회피하면서 대학 교육이 제대로 되려면 미국 대학만큼 학비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취업 준비반 같은 동아리 모임과 기업 마케팅을 위한 공모전에 청춘을 거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눈물겹다. 기업에서 오기와 생존 본능으로 무장된 ‘준비된 사회인’인 신입 사원을 마주치는 것도 반갑지만은 않은 일이다. 어수룩해도 생각에 잠긴 풋풋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는 건 점점 옛일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진정 대학 교육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물을 틈도 없이 우리의 대학 교육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의 속도전을 숨가쁘게 쫓고 있다.
그러므로 비판을 받아야 할 곳은 대학만이 아니다. 현명한 소비자만이 좋은 물건을 얻을 자격이 있다. 명품을 소비하듯이 일류 대학이라는 ‘브랜드’를 소유하는 게 목표이고, 가격이 비쌀수록 좋은 제품이라고 믿는 소비자가 다수인 게 현실이라면, 점점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대학은 변화할 필요가 없다. 이들 대학에 필요한 건 본질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트렌드를 읽는 눈과 기업 못지 않은 마케팅 능력, 스타 교수를 영입할 수 있는 자금력일 테니 말이다. 이 책은 대학 교육이 비싼 등록금의 값어치를 하는지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교육의 소비자인 우리에게 다시 되묻는다. 당신이 원하는 대학 교육은 무엇인가?
글·김은하
<비싼 대학> 역.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보건정책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에 중앙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정책사회부, 문화부 기자로 일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