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새로운 전투

2014-01-13     올리비에 자제크

<영광스러운 임무>가 2013년 8월에 출시된 이후로 젊은 중국인들은 이 게임을 서로 먼저 하려고 난리를 피우는 중이다. <영광스러운 임무>는 인민해방군과 공식적으로 제휴를 한 최초의 온라인 가상전투 비디오 게임이다.(1) 이웃 일본에게서 댜오위다오 열도(중국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혹은 센카쿠 열도(일본에서는 이렇게 부른다)를 되찾아오고 말겠다는 한 가지 임무가 중국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이 게임의 시나리오는 2012년부터 취항 중인 새 항공모함 ‘리아오닝’호에 전투명령을 내리면서 사실성을 한층 더 높였다. <영광스러운 임무>의 광고 문안은 이 게임이 노리는 바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게이머들은 무장한 중국군과 함께 싸울 것이며, 그들의 무기를 사용하여 일본인에게 일본은 우리에게서 도둑질해 간 우리 영토를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2)   

의례적인 수사(修辭)? 그러나 1년도 넘게 전개되어온 국제적 사건들은 동아시아의 두 강국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다투는 영토인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가상적 표현과 현실의 지정학 간의 경계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과연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현 상황을 이렇게 악화시킨 것일까? 두 나라는 이 섬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는데 말이다. 그것은 2012년 9월 11일, 느닷없이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의 섬 세 개를 개인 소유주로부터 사들인 일본 정부인가? 일본 정부는 잘 알려진 민족주의자로서 당시 도쿄 주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를 몰아내기 위해 그랬다고 말한다. 그 당시 도쿄 주지사로 널리 알려진 민족주의자인 이 인물이 세 개의 섬을 사기 위해 국민성금을 거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하면 중국을 쓸데없이 자극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조처는 거의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이후로 중국 선박들이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에서 12마일 떨어진 해역까지 침범하는 일이 계속 늘어났던 것이다.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한 중국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한 격렬한 시위를 임시로 허용하였다. 

극우주의자들이 유발한 센카쿠 분쟁

위기가 악화된 것은 그 반대로 2013년 11월 22일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를 포함시켜 남(南)중국해에 대한 상징적 통제를 확대하는 ‘방공식별구역(ZAI)’을 설정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금지선을 넘어선 중국 탓일까? 이 같은 움직임은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유사한 요구와 관련된다. 즉 2012년 4월에 중국 해군은 필리핀에 속한 스카버러 환상산호초를 실질적으로 통제했던 것이다. 위협을 느낀 필리핀은 2013년 1월 영해권에 관한 유엔협정(CNUDM)의 범위 내에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3)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의 경우에 일본과 미국의 반격은 달랐다. 그리고 훨씬 더 빨랐다. 2013년 11월 27일, 미국은 두 대의 B-52 폭격기를 급파했고, 곧이어 일본과 한국의 전투기들이 중국의 ZAI가 무효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지역의 상공을 공공연히 비행했다. 식별되지 않은 외국 국적 항공기가 이 지역을 침범할 경우 ‘위급시 방어조처’를 취하겠다고 공언했던 중국은 중국의 전략적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한 다른 태평양 주변의 강국들이 취한 이 같은 반응에 전혀 응수하지 않았다.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의 역사에서 이렇게까지 긴장이 고조된 적은 결코 없었다. 2013년 초에 미국과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두 나라를 결합시켜온 방어협정의 개정안에 서명했다. 새로운 물자를 구매하겠다는 미국의 발표는, 그것을 위해 서명을 하러 온 존 케리 국무장관이 “우리는 일본의 ‘센카쿠 열도’ 관리를 인정한다”라고 한 발표만큼 효과를 낳지도 못했다. 그는 일본의 바람과는 달리 ‘주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4)

2013년 12월 17일에 아베 신조 정부는 2014~19년 국방예산을 5%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아베 정부는 우선적으로 해군력을 강화하기로 확실히 방향을 바꾸었다. 2013년 8월에 해군은 구축함 이주모 호를 진수시켰는데, 길이가 148미터에 달하는 이 구축함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건조한 전투함들 가운데 가장 위압적인 전투함이다. 일본은 류큐 제도(와 그것을 서쪽으로 연장하는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를 전략지정학적 선점의 새로운 전선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같은 단계적 확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지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 열도는 동중국해에 고립된 길이 7km의 네모진 섬들인데, 중국 해안에서는 330km, 대만에서는 170km, 일본의 류쿠 열도에서는 410km 떨어져 있다. 이것은 세 개의 바위산과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초목이 없는 열도다. 가장 큰 섬의 이름은 우오추리시마(물고기를 낚는 섬)인데, 이 이름으로 미루어 사암과 산호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축함과 폭격기의 피신처가 아니라 멸종 위기에 있는 짧은 꼬리 갈매기들의 피신처인 이 섬의 유일한 관심사가 오랫동안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이 이 문제를 두고 벌이는 격렬한 논쟁은 1970년대부터 비로소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이미 14세기 명나라 때부터 이 열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로 계속 남아 있다가 1884년에 일본의 한 대담한 남성이 이곳에 조분석 광산을 세웠다. 그렇지만 두 나라 모두 이 열도를 공식적으로 점유하지는 않았다. 즉 이 열도는 국제법의 관점에서 볼 때 여전히 무인도인 것이다. 1894년에서 1895년 사이에 일본제국은 망해가던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여 센카쿠/댜오이다우 열도를 실제로 점령한 다음 몇 개월 뒤에 중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포트-아서와 대만을 강제로 넘겨받았다.   

일본이 패배하고 2차 대전이 끝난 뒤에 중국은 대만을 되찾아 시모노세키의 굴욕을 씻었다. 그러나 센카쿠 열도는 조약에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 간의 결정적인 평화조약인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에도 일본이 세계 외교무대에 복귀하는 대가로 포기한다고 선언한 영토를 열거하는 제2조에 센카쿠 열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1952년에 체결된 일본과 대만(그 당시 유엔에서 중국인민공화국 대신 중국을 대표했던)의 조약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명기된 영토 포기를 다시 한 번 확인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센카쿠/댜오이다우 열도는 언급되지 않았다.    

석유·탄환수소 개발권 놓고 갈등

명목상 미국의 관리 하에 있는 이 열도는 1971년 6월에서야 류쿠 제도와 함께 일본에 반환되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당시 미국이 신중한 지도 제작 전문가와 능력 있는 법학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두 열도를 반환할 때 미국은 영토 분쟁에 말려들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센카쿠 열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30년 뒤인 2007년에서야 비밀목록에서 빠진 1971년도 미 중앙정보부(CIA) 비밀 보고서는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요약하고 있다.(5) 이 보고서는 일본의 주권을 보장해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사실 이 문제는 부차적일 뿐 더 중요한 문제가 감추어져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랭글리(CIA 본부)의 분석가들은 나무 한 그루 안 자라는 이 열도가 대만과 중국, 일본이 서로 먹겠다고 덤벼드는 불화의 사과가 된 것은 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CESAP)가 이 열도 주변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CIA의 이 같은 판단은 정확했다. 이 세 나라는 19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2014년에도 석유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가 원인이라는 이 같은 주장만으로는 여전히 존재하는 정치적 긴장을 설명하기가 힘들다. 중국과 일본은 2008년에 동중국해에 매장되어 있는 탄화수소의 일부를 공동 채굴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협정은 이 지역의 매장량(2천억 입방미터 이상)을 고려해볼 때 가능한 타협안의 토대를 이룬다. 장기적으로 볼 때 두 파트너의 경제적 활력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부상하고 있는 강대국인 중국은 세계를 군사적으로 정복할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자신의 국지적 지배권을 서태평양 지대에 강요하려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중국이 수십 억에 달하는 인구와 압도적인 경제력으로 내리누르는 지정학적 지역에서 중국의 이 같은 복귀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억제할 나라는 없다.(7)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대만이 민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고, 미래에 이루어질 한국의 통일을 그들 마음대로 통제하고, 남중국해(파라셀스 열도, 스프라츠레이즈 군도, 스카버러 산호초, 프라타스 군도)에서의 요구를 관철시키고, 센카쿠/댜오이다우 열도 문제를 해결하는 등 네 가지 당면과제가 특히 중국에게는 중요하다. 이 센카쿠/댜오이다오 열도는 중국의 새로운 ‘마하급’ 함대(8)가 이 태평양 심해에 자유로이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열도의 빗장 중 하나다. 이 열도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는다면 중국은 그토록 열망하는 지배력 행사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양국 불화에 주변국 불안 가중

되살아난 중국의 야망은 구 일본 제국에 대해 역사적 불만을 품도록 교육하는 중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민족주의의 배출구는 현대화된 사회에 직면하고 권위적 자본주의라는 모델의 불평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정부가 국민들을 국외 문제로 돌려 국내의 갈등을 잠재우도록 해준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영광스러운 임무>는 이 같은 감정 분출구의 상징으로 보인다.

중국과 일본의 이 같은 불화 속에서 역사적 권리의 규모는 가장 특이하다. 게임 속 심각한 대사들은 민족의 요구에 의지하여 중세의 영롱하게 빛나는 카드에 쓰여 있는 표의문자들을 분석하고, 이제는 잊혀진 오키나와 왕국 어부들의 항해를 언급하는 고대 시들을 인용한다. 그렇지만 논란의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역 지정학의 전망과 중국 국내정치의 상황을 상징에 관한 토론에 포함시켜야 한다. 1978년에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의 평화협정에 관한 협상을 진행할 당시 등소평 주석은 댜오이다오 문제가 “얼마 동안은, 나아가서 수십 년 동안은 중단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 우리 세대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갖지 못한다 해도 다음 세대가 분명히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해결책은 그때 발견될 것이다.”(9)  

그 당시 소련과 우호적 관계에 있는 대륙의 열강이었던 중국은 해군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경제적으로도 아르헨티나보다 약했다. 이제 중국은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되찾았으며, 이 사실이 주변국들을 불안하게 한다. 짧은 꼬리를 가진 갈매기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센카쿠/댜오이다우 열도는 현재 진행 중인 구조지질학적 침하의 전략적 단층선 위에 있다. 

글·올리비에 자제크 Olivier Zajec

번역·이재형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박사과정 수료. 전문번역가.

(1) Giant Interactive Group, Shanghaï에 의해 출시된 게임, www.plagame.cn
(2) Jonas Pulver, ‘센카쿠 열도를 중심으로 벌어진 중국과 일본 간의 가상전쟁’, <Le Temps>, Genève, 2013년 8월 9일.
(3) François Bougon, ‘필리핀인, 스카버러 산호초를 두고 중국인과 적대적 관계가 되다’, <Le Monde>, 2013년 1월 23일. 
(4) 케리의 전임자인 힐러리 클린턴도 2013년 1월에 같은 말을 함으로써 중국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대만에 대해서 그러는 것처럼 중국에 대해서도 현 상황이 유지되는 한 이 주권 논쟁에 공개적으로 편을 들지 않았다.
(5) <The Senkaku Islands dispute : oil over troubled water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Langley, 1971년 5월.
(6) Stephanie Kleine-Ahlbrandt, ‘중국해에서 벌어지는 민족주의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1월
(7) ‘중국, 바다에서의 야심을 확인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9월.
(8) 19세기 말 미국의 해군제독이었던 알프레드 테어 마한은 위대한 해군력 이론가이다. James R. Holmes et Toshi Yoshihara, Chinese Naval Strategy in the 21st Century : The Turn to Mahan, Routledge, New York, 2008.
(9) 1978년 10월 25일 기자회견. 프랑스 주재 일본대사관 인터넷 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