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저무는 '자이니치'의 생채기

2009-04-04     한승동

역사로 저무는 ‘자이니치’의 생채기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
이붕언 지음·윤상인 옮김·강상중 추천·동아시아 펴냄·1만8천원
그들은 자신을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른다. 일본에서 살고 있으면서 굳이 ‘재일’(在日)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것부터가 역설적이다. 일본에 있되 일본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면서 자이니치 뒤에 따라붙어야 할 ‘조선’이나 ‘한국’이란 말은 대개 생략된다. 흔히 그냥 자이니치로 통하는 정체 모호한 이 말에는 뒤틀린 동아시아 근대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일본과 한반도 간의 역사적 생채기들이 깊이 박혀 있다. 우리가 재일동포라고 부르는 그들은 실은 온전한 ‘동포’(同胞)도 못  된다.

재일동포 3세의 정체성 찾기

“대부분 무학에 빈곤했던 이들은 계급적 약자였으며, 영토 밖에 거주하는 이들은 공간적 약자였고, 일본 문화에 어설픈 형태로 동화된 이들은 문화적 약자였다. 무엇보다도 민족적 범주의 변방에 위치한 그들은 민족적 약자였다.”(옮긴이 윤상인 한양대 교수)
‘1913년 12월 24일 출생/ 91살/ 경남 진양군 출신/ 8남매/ 아이치현 지타군 미하마정 거주.’ 91명에 이르는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 등장인물 약전엔 모두 이런 식의 간단한 존재증명 기록이 글머리에 붙어 있다. 기록자가 만났을 당시 91살이던 강차대 할아버지. 1913년생이니까 구술 채록이 2004년에 이뤄졌다는 얘기다. 형제는 8명이었고 지금은 아이치현에서 살고 있다. “일본 군대는 무차별 학살을 하고도 군인연금을 받고, 살해당한 조선인 인부에게는 어떤 보상도 없어. 그저 개죽음이지.”
‘1924년 9월 18일생/ 80살/ 경북 고령군 출신/ 5남매/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사쿠라모토 거주.’ ‘1922년 4월 23일 출생/ 82살/ 전남 곡성 출신/ 5남매/ 와카야마현 와카야마 시오마쓰정 거주.’
기록자는 재일동포 3세 이붕언(50)씨. ‘야마무라 도모히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아가던 오사카 출신의 이 사진작가는 24살 때 이른바 ‘본명 선언’을 했고 나이 마흔을 지날 무렵부터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나선 사람이다.
아직 생존해 있다면 지금은 85살이 됐을 경북 고령 출신의 김명년 할머니는 18살에 결혼하고 이듬해 남편과 함께 나가사키의 미쓰비시광업 탄광에서 일했다. 군마현 노무자 합숙소로 옮겼고 일본 패전 뒤 남편은 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10년 뒤 밀항선을 타고 다시 일본에 갔다. 가와사키 사카린 공장에서 트럭 운전을 하고 있던 남편은 일본 여자와 살림을 차려 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마흔 나이에 남편이 죽고 재혼했으나 새 남편마저 죽자 도부로쿠(탁주) 장사를 하다 야키니쿠(고기구이) 집을 차렸다. 지금은 맏며느리가 그 가게를 맡고 있다. “한국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 거기서 고생했기 때문에…. 부모도 형제도 전부 세상에 없고.” 자이니치 여자들은 차별로 상처받은 남자들한테서 전근대적 성차별까지 당했다.

사회적으로 격리된 약자들의 게토

일본말도 배우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간 무학의 차별받는 조선인들. 공사장·탄광·군수공장을 전전했고, 돼지를 키우고, 장사판과 암시장을 떠돌고, 고철을 주웠다. 청소도 똥 푸기도 조선인들 몫이었으며 사정이 좀 나아지면 호르몬(가축 내장) 야키, 야키니쿠, 고리대금, 파친코 등 일본인이 기피하는 밑바닥 풍속 산업을 전전했다. 지독한 빈곤(개중에는 거부가 된 이들도 있지만)과 차별 속에 내던져진 자이니치 집단거주지는 “일본 사회로부터 문명·문화적으로 격리된 게토”였다.
이 책의 추천자인 강상중 도쿄대 교수도 규슈 구마모토에서 돼지를 키우고 고철 장사를 하던 자이니치 1세의 아들이었다. 그가 1990년대 후반 귀화하지 않고 일본 이름(통명)이 아닌 본명을 쓰는 자이니치 신분으로 도쿄대 첫 정교수가 된 것은 뉴스거리였다. 20세기 말에 그런 사실이 화젯거리가 되는 현실이야말로 자이니치의 처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역설일 수 있다. 취직할 때는 일본식 통명으로의 ‘창씨개명’을 요구당한다. 또 한 사람의 자이니치 2세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최근 그 대학을 졸업한 자신의 자이니치 제자 취업난 소식을 통해 일본 사회의 차별이 정도 차이는 있지만 여전한 야만적인 현실을 증언했다.
그들은 조국으로부터도 소외당하고 잊혀졌다. “재일 조선인들의 존재는 (일본 군대 위안부와 같은) 민족 수난담의 완성도를 손상시킬 수 있는 거추장스러운 집단이었다. 주류 민족 담론은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난 잔류 조선인을 표상의 대상에서 제외했다.”(윤상인)

일본 전역 돌며 91명 풍상 담아

20대 초반에 ‘본명 선언’을 할 정도로 의식 있는 청년이었던 이붕언씨도 마흔이 넘어서야 자신의 조부모와 부모들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체감했다. 조부모·부모 세대들의 삶을 추체험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첫걸음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고향에 가고 싶지 않느냐는 지극히 간단한 질문과 몇 마디로 압축된 91명의 답변과 오랜 풍상의 흔적을 담은 단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우리는 파란만장했던 자이니치 1세들의 삶을 풍성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국을 돌며 그들의 얘기를 채록하고 그들의 사진을 남긴 이붕언씨의 작업은 유일무이하고 의미심장하다. 이제까지 그런 작업물은 없었다. 그의 기록은 급속히 스러져가는 자이니치 1세들의 마지막 유언이자, 비로소 역사 속으로 그들을 불러들이는 작업의 시작이다. 인터뷰한 고령의 자이니치 1세들은 인터뷰 뒤 4명 중에 1명꼴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제 빠르게 주역이 3, 4세로 교체되고 있지만 일본에는 아직도 60만의 자이니치가 존재한다.  

글•한승동 언론인
sdhan@hani.co.kr, <한겨레>의 출판 전문기자이며 주요 역저로 <대한민국 걷어차기>(2008), <시대를 건너는 법>(2007), <우익에 눈 먼 미국>(200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