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프리카 대통령을 자처한 프랑수아 올랑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원군으로 파견된 부룬디 제1대대의 퐁티앙 하키지마나 중령은 “가장 큰 어려움은 누가 적군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군은 기한 내에 프랑스군과 교대해야 한다. 하지만 중앙아프리카의 뿌리 깊은 혼란 속에서 프랑스의 군사개입이 연장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도대체 어쩌자고 군함을 탔단 말인가”
-몰리에르, <스카팽의 간계>, 2막 7장
콩고의 격언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어깨에 올라탔을 때만큼 프랑스가 성대했던 적은 없었다.” 실제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실업률 곡선을 뒤집을 것’을 신중하게 목표 삼을 때와는 대조적으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해서는 단도직입적인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사안이 시급한 만큼 즉각 행동을 이행하기로 결정했다.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받아 오늘 저녁 아프리카와 연합작전을 벌일 것이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갑차와 헬리콥터(동물들의 이름을 딴 푸마, 가젤, 페넥)가 투입되었다. 이번만은 독일의 의사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거세게 요동치는 아프리카라는 파도 속에서 어설픈 프랑스 키잡이가 키를 움켜쥐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군사개입의 목적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가 상정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을 통해 ‘프랑스군의 지원 하에’ 아프리카 주도 중앙아프리카 국제지원단(Misca)이 창설되었다. 결의안에 따라 프랑스군은 “시민의 안전보장과 치안 및 질서유지의 임무를 띠며 정세를 안정화시키고 국민에게 필요한 인도주의적 원조 제공에 적합한 조건을 조성하는 데 힘쓸 것이다.” 무장한 용병대가 대치하고 있는 대혼란의 상황에서 프랑스 파병군 1천6백 명의 임무가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한 기자가 “만약 반군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묻자 장이브 르 드리앙 프랑스 국방 장관은 “우리가 그들을 제압하고 있다”며 모호하게 답변했다.(1)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태를 방관하기만 한 대통령을 내버려 둘 수는 없다”며 “국제적” 조치가 정권을 교체시킬 수도 있다는 암시로 혼란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올랑드 대통령이었다. 2011년 무아마르 카디피 리비아 전 대통령 축출 때처럼 한 국가 원수의 파면은 유엔이 위임한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고 국제법의 기본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이 국제법이란 것이 강대국들에 의해 점점 더 유연하게 해석되고 있는 현실이다.(2)
중앙아프리카, 불안정의 악순환
2013년 1월 말리에서 ‘세르발’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중앙아프리카에서도 어떠한 장기적인 정책이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프랑스 국외정책이 그렇듯이 아프리카에 대해서도 그때그때 긴급한 상황에 따라 닥치는 대로 외교 결정이 내려진다. 12월 10일 국회에서 장마르크 에로 프랑츠 총리는 “재앙의 위험도 무릅쓴 결정이었다”며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수단과 차드, 콩고민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자원빈국에 약소국인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은 불안정의 악순환에 빠져들 상황에 놓여 있으며 이미 사헬 지역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수단을 거쳐 근동지역까지 불안정의 위험이 퍼지고 있다. 에로 총리는 ‘상가리스’ 작전이 기껏해야 6개월 정도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개시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세르발’ 작전에서도 프랑스군을 대체하기로 한 아프리카 병력이 아직 반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가 중앙아프리카에 대해 회개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1960년부터 프랑스는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중앙아프리카의 정권을 세우고 해체하기를 반복했다. 프랑스 총리가 ‘보카사 1세’ 대관식에 참석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말리에서처럼 중앙아프리카의 정권 붕괴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세계금융기관과 유럽연합에 의해 강요된 신자유주의 정책이 수십 년간 지속되면서 지도층의 세력다툼에 의해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공권력은 뒤흔들렸다.(3) 도미노처럼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특히 프랑스어권 아프리카가 가장 타격이 컸다.
경제학자 필리프 위공은 “21세기를 전환점으로 프랑스어권 국가에 비해 영어권 국가에서 평균적으로 높은 경제수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동아프리카 및 남아프리카(짐바브웨 제외), 서아프리카(가나, 나이지리아) 경제공동체의 영어권 국가에서 두드러졌다”고 평가했다.(4) 예를 들어 서아프리카의 가나와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은 4%를 웃도는 경제 성장률을 기록한 반면 베냉과 기니의 성장률은 0~0.5%에 그쳤고 심지어 토고와 코트디부아르의 경기는 후퇴했다. 지리적 요건과 통화정책뿐만 아니라 정치체제의 성격이 크게 좌우했을 것이다. 상반된 발전은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고 2012년에 서아프리카 출신인 은코사자나 들라미니주마가 아프리카연합(AU)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가봉 출신의 장 핑과 치열한 접전 끝에 위원장의 자리에 오른 들라미니주마는 프랑스 군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한 프랑스 외교관은 “우리가 개입하면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개입하지 않아도 비난 받는다”라며 가식적이고 부드럽게 말했다. 물론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식민 지배를 종식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아프리카의 질서 유지를 이끌고 있는가. 아프리카에는 프랑스 해외 주둔군의 절반인 약 8천명이 파병되어 5곳의 영구기지에 배치되어 있다. 아프리카는 프랑스군이 상황에 맞는 다양한 훈련을 할 수 있도록(사바나, 사막, 숲, 도시, 해양 전투 등) 특별 훈련장을 제공한다. 군인들은 이곳에서 특공대 전투에 대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특별 훈련을 받고 있다.
아프리카 학자 앙투안 글라세르는 “프랑스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아프리카 역사에 매달린다”고 진단했다.(5)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1981~1995) 이후 모든 프랑스 대통령이 아프리카와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와 아프리카 식민지 간의 관계”를 청산하는 의례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동등하고 “투명한” 관계를 이루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대통령이 결국은 재난과 쿠데타로 얼룩진 이 대륙의 대부 역할로 귀결됐다. 감정을 자극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프랑스를 부추겼다 하더라도 역대 대통령들이 유엔의 깃발을 휘날리며 미망인과 고아들을 스펙터클하게 구하러 달려가는 권력의 맛에 취하게 된 것도 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 덕분에 영위를 누리고 올랑드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 열강’의 역할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지위를 즐기는 올랑드 대통령과 로랑 파비위스 외교부 장관을 보면 정의의 수호자로서 ‘악의 축’에 맞서 싸우는 카우보이 복장의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모습이 연상된다.
장기적으로 볼 때 군사 행동이 정치위기를 해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말리에서 ‘세르발’ 작전이 일어나고 몇 주 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지만 몇몇 지역에서는 투표소가 열리지도 못했고 총선 투표율은 38%에 그쳤다. 작년 말에는 프랑스가 투아레그 반군에 호의를 베풀었다가 말리 국민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중앙아프리카에서는 모든 집단이 스스로를 대표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교섭 상대를 식별하려면 거의 투시능력을 갖춰야 한다. 프랑수아 보지제 전 중앙아프리카 대통령 지지자들의 공격은 실패한 상태고 반군연합 셀레카의 쿠데타 세력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져 있다. 도미니크 드 빌팽 전 프랑스 총리는 기고문에서 “우리는 주먹질로 나라를 세우지 않는다”고 말하며 프랑스와 아프리카 관계의 ‘군사화’와 아프리카의 ‘호의적인 재식민지화’를 비난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본인의 관심 밖인 아프리카, 특히 프랑스어권 지역에서 프랑스 정부가 앞장서서 작전을 지휘하니 오히려 안심하는 듯 보인다. 프랑스 군인들의 사망으로까지 이어진 ‘세르발’과 ‘상가리스’ 작전이 성공할 기미가 안 보여도 그건 남의 일일 뿐이다. 반면 비옥한 땅,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의 유럽연합 경찰대(Eupol) 작전에 대해서는 프랑스가 광산을 둘러싼 경쟁무대에 끼어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독일은 의심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를, 더 정확히 말하면 앙골라가 포르투갈을 선점하고 있고 영국은 시에라리온을 지켜보고 있다. 글라세르는 “각각 자신의 세력권을 지키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프리카 위협하는 헤게모니 부재
유럽연합이 중앙아프리카 작전에, 특히 미래의 아프리카 군대 조직을 위해 5천만 유로 이상을 지원했지만 프랑스는 군사행동 지원 특별기금을 조성하고 싶어 한다.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가 “28개국과 함께 유럽연합에 속해 있지만 프랑스의 입장은 특별하다”며 “다른 유럽 국가들은 가지지 못한 군대와 장비가 있고, 따라서 더 많이 기여하고 더 많이 참여해 서로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며 단순하게 설명했다.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있는 프랑스군의 활동은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들라미니주마 집행위원장은 아프리카 대륙이 마비된 것을 보며 크게 실망했다. 한 아프리카 외교관은 “세르발 작전은 집행위원장에게 응어리처럼 남아있다”고 언급했다. 알파 콩데 기니 대통령도 “우리가 프랑스를 찬양해야만 하는 현실이 부끄럽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감사하긴 하지만 아프리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에 조금 모욕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아프리카 상비군(ASF)은 출범하기로 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이유로 여전히 탁상공론에 그치고 있다. 2012년에 아프리카 연합 회원국들이 조직 예산안의 3.3% 정도만 부담했고 이 때문에 유럽연합과 프랑스, 미국도 덩달아 지갑을 열지 않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ASF보다 유연하게 투입할 수 있는 아프리카 신속대응군(Caric) 창설을 제안했다. 그리고 중앙아프리카에서는 Misca가 빠른 시일 내에 프랑스군과 교대해야 한다.
카메룬의 정치학자 아칠레 음베베는 “아프리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헤게모니의 부재다. 헤게모니의 부재가 강력한 흡입력으로 외국군을 끌어들이고 있다. 우리에게 개입하는 강대국들은 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이런 모험에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오면 그들은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범아프리카주의적인 논점선취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대륙은 여전히 분단되어 있다. 말리 사태에 침묵한 알제리를 두고 논쟁이 분분한 가운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이지리아는 개별적으로 국제회담을 착수했다. 도미니크 드 빌팽 전 총리는 “우리는 프랑스가 개입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배운다. 사실은 정반대다. 프랑스가 개입하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강대국(미국, 중국,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 대국들도 여유를 만끽할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글·안세실 로베르 Anne-Cécile Robert
<서구를 구하는 아프리카>(L'Afrique au secours de l'Occident, L'Atelier, paris,2004년)의 저자
번역•배영미 hahoym@naver.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
(1) LCI, 2013년 1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