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혜노믹스 시대, “안녕들 하십니까?”
‘창조’가 한갓 입에 발린 말로 사용되는 순간, 그 말이 갖는 본래 의미인 “인간에 의한 독창성과 혁신”이라는 새로움과 명징함이 분해되어 사라져버린다. 예술 창작이라는 표현에 익숙한 우리의 귀에 1년 전부터 ‘창조’가 경제와 결합하여 흘러든다. 근혜노믹스의 요체라 할 ‘창조경제’이다. 문제는 그 내용이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오히려 한국 사회를 창조적으로 망가뜨리고 있다.
바닥으로의 질주를 강요하는 상황에서 받아든 책이 정승일의 신간 <굿바이 근혜노믹스>이다. 이 책은 대담집이다. 대다수 대담집은 알맹이 없이 과장하며 떠벌리는 고담준론 또는 가벼이 지나친 사건들에 대한 인상비평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이 책은 다르다. 이 책에는 깊은 이론적 토대와 역사적 식견이 자리 잡고 있고, 서구 복지국가의 제도와 문화, 그리고 일상의 다양한 사례들이 담겨 있다. 또한 우리가 직면한 경제민주화와 산업발전, 경제력 집중과 재벌개혁, 복지국가 만들기 같은 광범위한 쟁점들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복제품과 위작만 가득한 ‘창조 경제’
책을 읽다보면 “‘위선’과 ‘착오’에 빠진 경제민주화, 밥그릇 빼앗는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밥 먹여주는’ 경제민주화를 상상하자”는 저자의 에필로그에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 <굿바이 근혜노믹스>는 창조경제론을 과거 김대중 정부의 ‘지식기반 경제론’, 노무현 정부의 ‘혁신 주도형 경제론’과 다를 게 없다고 혹평한다. 창조경제 구현을 위해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창업 생태계 조성과 중소벤처 육성, 신성장동력 창출과 글로벌 창의인재 양성,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산업 역량강화와 창조적 문화예술 산업 조성 등은 이미 과거 정부들이 시행했던 정책의 재탕이라는 것이다. 창조경제론은 ‘원작’이 아닌 ‘복제품’ 또는 ‘위작’인 셈이다. 더구나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그 성적표가 말해주듯이 경제 성장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서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원작을 카피한 위작인 창조경제론의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고 정승일은 말한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제시한 5대 국정 목표의 첫째가 창조경제였다. 여기서 국민행복이란 복지국가와 연결된 표현이다. 복지의 영어 ‘Welfare’는 14세기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된 말로 ‘행복’ 또는 ‘번영’을 의미했다. 20세기 초에는 (국가나 사회의) 조직적인 보살핌 혹은 원조지급의 대상이라는 의미로 확대되어 사용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영국의 템플 주교는 독일 나치스의 ‘전쟁국가(Warfare State)’에 맞불을 놓으려고 ‘복지국가(Welfare State)’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복지국가의 규범적 의미는 사회구성원 전원이 행복한 사회이며, 건전한 정부라면 국정 운영의 최고 목표를 국민의 행복과 풍요에 두어야 한다.
사영화가 창조경제인가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대신, 창조경제와 고삐 풀린 서비스 산업 규제완화+민영화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요즘 들어 박근혜 정부는 출범 시 내세웠던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지키지 못하겠노라고 솔직히(?) 선언했다. 그 대신 양질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큰(?) 서비스 산업의 투자 활성화를 위하여 핵심적 규제를 자유화하겠다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금융업과 부동산업 같은 서비스 산업에서 대대적인 규제 완화와 함께 철도와 의료, 그리고 가스 같은 공공인프라 영역에서도 대대적인 사영화(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KTX 민영화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12월 13일, 박근혜 정부는 국민생활 필수 공공재인 보건의료와 교육 부문까지 자유 시장에 내주겠다고 했다. 공공시설 또는 공공재산이라는 표현은 국어사전에만 존재하는 사어가 될 신세이다.
공기업 개혁은 이해관계자들의 공동통치
<굿바이 근혜노믹스>는 공공재산과 경제력 집중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은 철도와 전기, 도로, 공항 같은 공공인프라의 경우 독점적 운영(경제력 집중)이 오히려 효율적이며, 따라서 시민을 위한 목적 하에 국·공영으로 운영되는 것이 더 저렴하다고 말한다. 철도 등이 사기업의 이윤 추구 하에 운영될 경우 비용 증가와 비효율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사영화된 철도는 대규모 인력 감축과 과도한 업무강도로 이어지고, 그것은 철도 안전사고 급증으로 이어져 사회 전체의 비용 증가를 낳는다. 사영화 기업의 고비용·저효율은 곧 사회 전체의 고비용·저효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기업 개혁의 올바른 해법은 사영화가 아니라 종업원과 시민 등 이해관계자들과의 공동통치라고 말한다.
그간 재벌옹호론자라는 오해를 받아온 정승일은 재벌 일가와 재벌 그룹을 분리하여 접근하면서 참된 경제민주화란 공정한 시장질서 구축 또는 주주자본주의 방향의 재벌개혁이 아니라, 재벌그룹의 통치구조에 종업원과 은행, 국가 등이 참여하는 공동통치 또는 사회적 통제 장치의 마련이라고 이해한다. 재벌그룹 또는 대자본에 대한 제대로 된 사회적 통제 장치의 구상과 제안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큰 흐름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힘입어 ‘응답하라’가 유행어가 됐다. 박근혜 정부는 ‘응답하라 1972’를 외치고 있다. 유신 공포 정치로의 회귀를 선언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의 자화상은 저하된 성장률과 극심한 사회불평등, 높아진 고용불안정, 자살율 OECD 1위, 출산율 세계 최저, 45%에 이르는 노인 빈곤율이다. 복지국가와는 사뭇 다르다. 장하준 교수는 추천사에서 젊은이들의 고생과 좌절을 언급하며 ‘생체실험’이라는 무서운 단어를 사용했다. 생체실험 당하던 청년들이 생체실험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고려대 학생이 붙인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가 출발점이다. “별일 다 보며” 살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을 향한 정승일의 “경제민주화가 밥 먹여줍니다”는 외침은 젊은이들에게 ‘꿈꾸고 실천할 자유’를 선물한다.
마지막으로, ‘부자 돈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복지라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다. 공공시설과 공공복지의 확대는 사회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고 건강한 시민으로 만들고 양질의 노동력 창출과 건전한 구매력으로 이어져 모두가 빼앗김 없는 사회라는 열매를 맺는다. “모두가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이들에게 이 책은 희망의 메신저임에 틀림없다.
글· 최재한
베를린자유대학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회민주주의정책연구회 연구위원, 협동조합 사회민주주의 연구 사무처장으로 활동 중이며 투기자본감시센터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