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의지의 주체인 ‘우리’ 안의 ‘나’

2014-02-07     뱅상 데콩브 - 파리사회과학연구원 교수

 

   
 

프랑스의 대표적 사전인 라후스 불어 사전은 ‘정체성’을 어떤 한 개인 또는 집단의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특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개인의 역사와 상황, 각자가 맺어온 모든 관계에 따라 다중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주장 또한 전혀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정체성이 지니는 이러한 모순적인 개념이 각각의 개인에게, 또한 개인이 속해있는 각 집단에게는 어떤 의미로 와 닿고 있을까?

우리는 ‘말’이 아닌,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체성’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국가적 정체성, 유대교적 정체성, 사회주의적 정체성, 성적 정체성 등…. 이 정체성이란 말은 분야를 불문하고 온갖 종류의 논쟁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매번 정체성에 붙는 ‘~적(的)’이라는 수식어에 논쟁의 핵심은 가려지기 일쑤다. 정체성에 붙은 수식어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이 표현들은 한 개인이 내세울 수 있는 어떤 단체, 즉 집단 정체성에 따라 구분할 수 있는 단체를 정의내리는 역할을 한다. 요컨대 한 나라, 민족, 정당 따위에서 던지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하는 셈이다. 또는 개인이 스스로에게 다중 정체성을 부여하고 자기 자신에 관한 관점을 다각화하고자 할 때 쓰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이 수식어들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과거에는 ‘아이덴티티’라는 말이 지칭 대상의 신원을 판단하기 위한 경우에 쓰이곤 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인지, 정말 우리가 부르는 그 이름에 해당하는 사람이 맞는지를 확인하거나, 각기 다른 표현이지만 하나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인지 확인하는 경우에(예를 들면, ‘레만 호수’와 ‘제네바 호수’ 모두 동일한 호수를 지칭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쓰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됐다.
 
미국 사회과학이 도래하면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바탕으로 한 개념, 현대사회의 상식적인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여기서 정체성은 개인에게 자신이 전체 사회 안에서 어떤 집단에 속해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소속감을 표현해야 한다는 당위를 요구한다. 결국 정체성은 유권자들의 선택이 개인의 의견이 아닌 자신의 출신 집단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정체성 정치의 개념으로 돌아오게 된다. 여러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나’를 나라고 규정할 수 있나?

개인의 다양성과 각자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있을 자유는 물론 매우 중요한데, 이 다양성과 자유의 진정한 수호자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진정한 수호자는 소수 집단에게 의복 문화, 식문화, 역법(曆法) 등 그들만의 관습을 고수할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일까? 아니면 한 민족이 하나의 집단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동일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본이 되어야 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는 구성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 체해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쪽일까? 이를테면, 프랑스인으로 살아간다면,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먼 프랑스인에 대한 수많은 고정관념에도 스스로를 맞춰가야 한다고 스스로 당위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선 나중으로 미뤄두는 일종의 지연책을 쓰기도 한다. 우선 집단 정체성은 존재한다. 만약 집단 정체성이 개인의 개성이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가로막지 않는 조건이라면 인정해야 한다. 또한, 실제로 개인의 정체성은 언제나 다중적으로 나타난다. 실로 그러하다. 그 이유로는 첫째, 우리는 삶의 매순간마다 우리가 온갖 형태의 인간관계 속에 있음을 발견하고, 이 관계들 안에서 우리가 가진 수많은 소속감만큼이나 다양한 자기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평생에 걸쳐 끝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개인의 정체성을 불변하는 하나의 정의로 고정시킬 수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집단 정체성과 개인적 정체성의 판단 간에는 별다른 갈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중 정체성이라는 개념은 말하는 우리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내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여러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하다. 그저 여러 종류의 명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여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명함들이 전부 ‘나’의 명함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명함들은 동일한 한 사람을 소개한다는 역할 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특히 구성주의 이론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하나로 고정시킬 수는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각 개인은 과거를 살아왔으며 현재를 살고 있는 존재이고, 주변 환경이 실질적으로 삶에 영향을 주는 일종의 신진대사 과정을 언제나 겪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성주의 이론은 결국 우리의 정체성이 가변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나 스스로가 다른 누군가로 바뀌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 정체성이 변화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내가 내 자리를 타인에게 넘기는 경우, 평생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를 ‘나’라고 규정해줄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우리는 다양한 직업과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소속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각기 다른 여러 집단마다 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속의 다중성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역할들 간의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에너지를 쏟을 권리, 더 나아가 그렇게 할 독점권을 어떤 역할에 주어야 할까? 이러한 집합적인 관계들은 우리에게 각각 일종의 약속을 요구해 결국 ‘다중 역할’이라는 문제를 야기한다. 한 인간이 여러 역할을 맡으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일어나고야 만다. 이렇게 여러 갈림길 앞에 서서 망설이는 개인은 결국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된다. 정체성의 위기란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이 제시한 개념으로, 이것을 겪는 개인은 우유부단에 빠지고 미래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정체성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 관계를 다시 정의하여, 가능하지도 않은 자아 다중화의 길로 스스로를 더 이상 몰아세우지 않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외면적 자아와 내면적 자아의 분리 현상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수많은 소속 관계 중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칭 대상의 신원을 판단하는 경우에 쓰이는 ‘신분’의 의미를 알고 있다. 이를테면 같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지 확인하는 경우, 예컨대 “낭시 출신 위인 푸앵카레?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정답, 낭시 출신이다) 전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오답, 낭시 출신이 아니다) 둘 중 누구 말인가?”라고 묻는 경우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 말이다. 그런 반면, 우리는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길 원한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 현악사중주단은 최근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와 같은 문장에서 마주치는 ‘정체성’이라는 뜻도 설명할 수 있는가?

개인정보 서류를 작성할 때는 누구든지 ‘남/녀’ 중 한 군데에 동그라미를 표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성별을 규정할 뿐이지, 그 사람 자체를 규정하는 답은 아니다. 전 세계 인구 중 반이 같은 답을 하지 않는가. 종교 성향도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은행 정보도 마찬가지인데, 은행인식코드는 내가 어떤 은행의 계좌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증명할 뿐이지 나의 자아를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면서 사용하는 수많은 ‘아이덴티티’들은 사실 우리 개인의 특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그것들이 드러내는 것이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몸 안에 있는 나의 자아를 여러 개로 나눌 능력도 없다. 이 아이덴티티들은 우리의 다중 정체성에 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집단 정체성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현대 사회철학은 지배적인 개인주의 정치이념을 형성하면서 이러한 사실에 반기를 들곤 한다. 여기서 다중 정체성이라는 듣기 좋고 애매한 담론들을 앞세워 세상의 다양성을 억누르고(물론 단일 정체성이란 것은 일종의 종교이자 구시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경제 변화를 비롯해 온갖 분야의 모든 변화들을 우리가 관심을 여러 군데로 흩어 반응해야 할 삶의 신호라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라는 집단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가 대표적인 예다. 그녀는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인과 가정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 유럽 협상 자리에서 “내 돈을 돌려 달라”고 단언했던 사례나 여러 국제무대에서 보였던 모습들을 떠올려 보면 대처 총리도 자신의 국가가 관련된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모른 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회학적 극개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내 실재하지 않는다고 기만해왔던 ‘집단’이라는 개념을 다시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인간 사회가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회가 서로 유사하거나 또는 유사하다고 믿는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개개인이 분명히 실재하고, 각 개인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여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나아가 이 집단에게 ‘모딜리아니 사중주단’, ‘상브르-뫼즈 연대’, ‘미합중국’이라는 식으로 이름을 붙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름을 가지게 된 집단은 곧바로 역사를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결국 한 집단에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동일한 집단임을 규정해주어 그 집단에 역사적 실체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 사회집단이 늘 변함없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고대 철학이 가졌던 고전적인 난제이자, 현대 분석철학에서 다시 나타난 화두인 ‘정체성의 기준’에 대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실제 세상은 동일한 정체성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화강암에서 금강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각각 고유한 정체성의 기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 사회가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지난 세월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고 지내왔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란 강과 같은 존재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고인 강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야 하는 것처럼, 국가도 세대교체를 통해 구성원들이 변화하고, 사회적 내부 기능이 변화하며, 주변 환경에 따른 적응양식이 변화하여 끝없이 새로워져야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동일한 강’을 지칭할 때는 지리적 기준이라는 특정한 정체성의 기준을 사용한다. 다양한 형태의 사회집단을 지칭하는 경우도 비슷하다. ‘동일한 국가’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정체성의 기준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한 것처럼 그 집단이 법과 관습을 물려주는 정치적 공동체인가에 대한 기준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회집단에 대해 논할 때 사용하는 정체성의 기준은 누가 결정하고 적용한단 말인가? 집단 정체성을 다루는 현대 담론들은 그 초점을 일인칭 복수 대명사인 ‘우리’에 두고 있다. 우리가 자기소개를 할 때 자기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삶의 중요한 몇 가지 영역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회집단도 그러한 영역들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개인의 삶의 영역 중에서 어떤 것이 자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개인에게 의복, 언어, 관습 등의 요소들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에게 원래 모습 그대로 있을 권리를 포기하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하면서 남에게 보이는 하나의 외면적 자아와 드러나지 않는 내면적 자아를 분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집단정체성이 없는 사회의 ‘우리’는 누구인가

구성원이 세상에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일종의 언어 형태를 가지고 있는 집단은 하나의 집단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마을, 기업, 극단, 국가 등 집단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해당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들은 누구인가’에 대해 표현하는 모든 순간 속에서 그 집단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이 늘 완벽한 문장, 즉 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 집단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드러내는 ‘기념물’을 통해, 그들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각종 ‘의례’와 ‘의식’을 통해, 또한 그들이 후대에 물려주고 싶은 것들을 담아내는 ‘교육’을 통해 그들이 가진 집단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집단은 이렇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드러내는 것일까? 바로 그들이 집단 고유의 이익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분명히 표명하기 위해서다. 각 집단이 ‘공공이익’ 또는 ‘공동이익’이라고 불리는 고유의 이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명제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사회학적 개인주의 신봉자들뿐일 것이다. 모든 집단에게는 각각 자신들에게 유익한 결정과 불리한 결정이 존재한다. 결국 몇 가지 정치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사회집단은 고유의 이익에 대해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는가?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이 있는가? 사회 집단의 구성원, 즉 국민이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집단 정체성이 없는 사회는 ‘우리’라는 개념도 없는 곳이고, 정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민주적인 주권 실현이 없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주 정부는 각각의 국민이 일반의지의 주체인 ‘우리’ 안에서 ‘나’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는 오늘날 종종 커다란 반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 중 국민들의 만장일치를 강요하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우리’란 개념은 실제로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이론상으로도 그다지 달갑지 않다. 민주주의는 의견의 불일치를 인정하고 각 개인의 표현할 자유와 반대 목소리까지도 존중하는 반면, 그들이 말하는 ‘우리’에의 갈망은 모두가 같은 의견을 내는 단결성 있는 정치단체에 대한 급진 민주주의가 앓고 있는 강박증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우리’, 국민(Demos)의 단순한 집합 명사로 쓰인 ‘우리’의 개념이 빠진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민주정부는 ‘우리’ 안에서 ‘나’의 성장 도모

민주주의가 정말로 존재하도록 하려면, 개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품고 표현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의견이 때로는 주류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보다 넓은 의미로 보자면,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성장시키고 대립과 갈등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에 대한 대립과 갈등인가? 바로 정부에 대한 대립과 갈등이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의미는 정치와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역할을 지닐 수 있도록 하려면 국가의 고유한 이익에 대한 문제가 반드시 논의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토론을 필요로 하고 의견 대립을 인정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고유한 이익이 있고, 정부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바로 그 이유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사실, 바로 이것이 정치 공동체의 원칙 그 자체이다.

오늘날 해방의 권리는 인류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는 권리라 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인류가 사회계약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회적 관계들을 자신의 정체성에 포함시키도록 이끌어간다. 또한 인류는 정체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고유한 인성과 다시 손을 잡기 위해 한 발짝 나아가고자 애쓰고 있다. 일반의지의 주체로서의 ‘우리’를 통해서는, 정치 단체의 정체성과 현재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속되고자 하는 열망을 표명한다. 결국, 집단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과거를 살아온 역사를 지니고, 동시에 미래에 관해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집단 정체성이 그 집단이 특정한 상태, 요컨대 완전히 하나로 통일된 상태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스스로가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하는 의미의 ‘정체성’과, 모든 사람이 동일한 답을 해야 한다는 ‘단결성’을 더 이상 혼돈하지 않을 것이다.

글·뱅상 데콩브 Vincent Descombes
1943년 생. 프랑스 언어 철학 및 인지철학의 권위자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현대철학이 헤겔, 후설, 하이데거의 3H에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드의 ‘회의의 3대가들’로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밝혀 주목을 받았다. 현재 파리사회과학연구원 부설 레이몽 아롱 연구소에서 강의하며, 시카고 대학 초빙 교수를 겸직하고 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