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 활강의 지정학

2014-02-07     기욤 피트롱 - 언론인

소치 동계올림픽 경기장 건설 현장 소장은, 인권 존중과 환경 보호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 제정신이냐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반복되는 부정행위들을 일일이 처벌하고, 모든 행정적 결정에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했다면 아마 지금쯤 기껏해야 스케이트장 기초공사를 마쳤을 거라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러시아 외교전문지 <글로벌 어페어즈>의 효도르 루키야노프 편집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너무도 짧은 시간에 대규모 공사들을 마치도록 강요함으로써 모든 민주주의적 이니셔티브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소치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절대 러시아의 법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이런저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제때 공사를 마친 덕분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첫 번째 상징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셈이다. 러시아는 이제 20년 전의 굴욕적인 파산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번영과 질서를 누리는 국가로서 위상을 뽐낼 수 있게 되었다. 서방에 의해 사회 제도와 공공 서비스의 파괴가 가속되고 민영화된 자본을 올리가르히(과두지배자들)가 독차지하고 생산이 곤두박질치던 시기, 러시아가 추락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만연하던 터였다.  1991년에서 1998년 사이, 러시아는 무려 40%의 생산성 하락을 겪었다. 아울러 러시아가 대규모 국제대회를 유치할 자격이 없다는 믿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 만큼 2014년 2월 소치의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 성화가 점화될 때 러시아인들이 느낄 자부심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글라스노스트(개방), 집단생산모델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 등 러시아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보리스 옐친 집권 당시, 혁명적인 시기를 경험했다. 그 후 안정화의 시대가 도래했고, 푸틴과 소치 올림픽이 그 상징이다.” 정치비평가 콘스탄틴 폰 에게르트의 설명이다.

러시아의 자존심 전속력 질주

소치 올림픽은 또한 되찾은 강대국의 위상을 상징한다. 소비에트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때, 위성국들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도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체첸 분리주의가 득세하고, 2003년 조지아, 2004년 우크라이나, 2005년 키르기스스탄에서 잇따라 혁명이 일어났다. 이른바 ‘색깔 혁명’이다. 하지만 2008년 8월 러시아는 조지아에서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펼치면서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 주민들에게 이 전쟁은 러시아와 미국의 싸움을 조지아가 대리하는 양상으로 비쳤다. 2014년 현재,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 지역에서 러시아가 힘을 과시하는 상황은 소치 올림픽 성화 봉송 경로에 담긴 지정학적 의미로 설명이 가능하다. 북극과 우주 공간, 일본과 영토분쟁 중인 사할린 섬까지 경로에 포함됐다.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HSE) 국제정치학 교수 세르게이 메드베데프는 “이런 국력 과시용 퍼레이드는 푸틴이 대 러시아를 건설한 이반 대제를 얼마나 닮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분석한다.

성화의 마지막 도착지 소치 역시 지정학적 상징성을 지닌다. 러시아가 무력 충돌이 빈발하는 캅카스 지역을 평정했다고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체첸 반군 지도자와 캅카스 에미라트 지도자의 소행으로 알려진, 2010년 3월 모스크바 지하철역 테러(39명 사망)와 2011년 1월 도모데도보 공항 테러(36명 사망)로 자존심을 구긴 러시아는 동계올림픽 개최를 통해 안보 능력과 영토 수호 의지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도리어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2013년 7월 체첸 반군 지도자 우마로프는 “모든 수단을 써서” 올림픽을 방해하라고 촉구했다. 실제로 지난 12월 말 코카서스 북부 볼고그라드에서 두 차례의 테러가 발생해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치정보센터 소장 알렉세이 무힌의 4륜구동 자동차가 모스크바 시내를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소치 올림픽은 스포츠 대회가 아니라 힐링이다!”라고 말한다. 서구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한 러시아는 러시아만의 특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누군지 더 이상 알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소치 올림픽 개최는 사실상 러시아의 정체성 찾기의 일환이다. 폰 에게르트가 설명한다. “러시아는 1991년 탄생한 젊은 국가다. 민족 구성, 정치 조직, 경제 기반, 헌법, 모든 게 새롭다. 러시아인들은 공산주의가 아닌 새로운 정체성으로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 앞에 놓여 있다.” 아울러, 그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제국에 대한 향수와 예외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도사리고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민족주의가 다시금 기승을 부릴 토양이 되고 있다. 2012년 3월 재집권에 성공한 푸틴 대통령은 이런 경향을 앞장서서 이끌고 있다.

“푸틴은 우선 국가 조직을 재건함으로써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치료해주는 인물로 등장했다. 다음 순서는 조국의 현대화였다. 하지만 이 단계는 실패로 끝났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으로 있던 2008~2012년의 기대와 달리 민주주의적 개방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푸틴이 광범위한 여론적 지지를 등에 업고 민족 지도자로 재부상하게 되었다.” 고등경제대학 교수 안드레이 멜빌의 분석이다. 푸틴은 러시아식 모델과 정체성의 독특함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는 전략을 동원한다. 멜빌은 이것이 “명백한 정치적 현상이며, 소치 올림픽 역시 이런 경향에 동원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제22회 동계올림픽은 “위대한 러시아”의 귀환이라는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이상적인 기회가 될 것이다. 2007년 뮌헨에서 한 연설에서 푸틴이 강조한 “다극화된” 세계 속에서 러시아의 안전과 번영,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 12월 재벌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를 석방하고 ‘푸시 라이엇’ 활동가 나데즈다 톨로코니코바와 마리아 알료키나를 특별 사면했다.) 2008년 올림픽 대회를 개최한 후에도 한 발짝 물러나 국제정세를 관망하고 있는 중국과 대조적으로 러시아는 이 기회에 미국, 더 나아가 서방의 리더십을 대체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대안 세력으로 발돋움하고자 한다.

이미 러시아는 2008년부터 외교무대에서 이런 경쟁심을 드러내왔다. 2008년 조지아와의 짧은 교전, 유럽연합과 미국이 미는 나부코 프로젝트에 타격을 입힌 (우크라이나를 우회하는) 러시아-이탈리아 간 사우스스트림 가스 수송로 건설 프로젝트의 추진, 무력 사용보다 대화를 촉구하는 푸틴의 적극적인 중재 덕분에 2013년 11월 타결된 이란 핵 재협상, 시리아 화학무기 폐기 유엔결의안 발표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연합협정을 체결하는 대신 러시아와 관세동맹을 맺었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부터 국가 통합의 중요한 요소였던 스포츠는 러시아의 외교력 확대에 이바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폰 에게르트는 “이번 올림픽 대회는 러시아적 정체성의 바탕이 되는 두 제국, 즉 로마노프 왕조와 소비에트의 위대함을 구현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국력을 총동원하여 개최하는 이 스포츠 행사는 이상화된 과거와 영광된 미래를 연결하는 국가적 서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무사히 대회를 치러내고 러시아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 주기만 한다면 푸틴은 국내 정치 무대에서도 상당히 유리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푸틴 개인을 위한 영광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러시아 현대화에 성공한 국가 지도자로서 역사에 기록되고 싶어 한다.” 모스크바 프랑스-러시아 옵세르바투아르 대표 아르노 뒤비앙의 말이다. 하지만 많은 평자들은 그것도 잠시뿐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인구 감소,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직업이민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 이슬람주의단체의 테러와 가혹한 탄압의 무대가 되고 있는 다게스탄 등 산적한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더욱이 재정부 장관은 러시아의 경제 성장률을 2013년 1.4%, 2030년까지 2.5% 정도로 산정하고 있을 만큼 미래 전망은 밟지 않다. 인구 감소로 더욱 악화된 외국인 투자와 수출 감소 현상 때문이다. 1991년 1억 4870만 명이던 러시아 인구는 2013년 1억 4250만 명으로 줄었다. 2030년에는 1억 2800만 명까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푸틴은 다양한 국제행사를 유치하며 러시아의 후진적인 인프라를 재건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루키아노프는 “20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300주년 기념행사를 포함해 그 후 개최된 모든 주요 행사들은 개발을 위한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주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모스크바, 2009년), APEC 정상회의(블라디보스토크, 2012년), G20 정상회담(상트페테르부르크, 2013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카잔, 2015년) 뿐 아니라, 2018년 월드컵까지 유치했다. 소치, 칼리닌그라드, 모스크바, 볼고그라드를 포함하는 10여 개 도시에서 경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덕분에 프랑스의 33배 크기의 광활한 영토 곳곳에서 개발 붐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러시아식으로 치러지는 행사준비

그리고 당연히, “행사 준비 작업은 러시아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소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대가를 치르든, 무슨 수를 쓰든 행사 개시 전에 공사를 완수해야 한다는 식이다.” 모스크바 카네기 센터 연구원 니콜라이 페트로브의 말이다. 전략적 공사 현장들을 중심으로 조성된 상시적 비상국가는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거대 프로젝트들을 낳는다.” 카네기 센터 정치학 연구원 릴리아 셰브초바는 “각각의 도시가 러시아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전함 포템킨(수병들의 반란으로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됨-역주) 같은 구실을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러시아의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다.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 소비에트 군산복합체의 영향이 남아있는 산업 분야(무기, 철강, 우주 산업), 미발전 분야인 금융 등이 그 예다. 인프라 강화라는 목표 배후에는 구 제국의 주변 지역에서 위상을 강화하려는 전략이 숨어있다. 러시아의 야심은 동아시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중국과 경쟁하고, 서쪽(칼리닌그라드)에서는 유럽연합의 확대에 맞서고, 캅카스 지역(소치)에서는 경제개발을 통해 민족주의 분쟁을 종식하는 것이다. 독립 사회정치연구소 연구원 나탈리아 주바레비치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결국 “국가 안보에 직결되는 문제이며, 러시아 정보부가 가장 신경을 쓰는 주제들이다.”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다면 그에 대한 해석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국가주도 경제 분야의 직원들, 관료, 지역 엘리트 등 푸틴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수입이 달린 국가의 위상 강화를 축하할 것이다. 반면, 독재로의 회귀와 경제 다원화에 무능한 경제정책을 비판해오던 이들은 러시아가 흑해 연안의 소도시에서 내실 없이 힘만 과시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길을 재촉하게 되리라는 예견을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소치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모든 것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잦은 방문으로 인한 교통체증, 코트다쥐르처럼 온화한 날씨, 부드러운 야자수 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만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글·기욤 피트롱 Guillaume Pitron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