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단, 무너지는 민주화의 희망

2014-02-07     제라르 프뤼니에 -아프리카 전문 컨설턴트

 


2013년 말, 독립한 지 불과 3년도 되지 않은 남수단에 격렬한 내전이 발발했다. 살바 키르 대통령 지지자들과 리에크 마차르 전 부통령 지지자들의 충돌은 지역의 안정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국경 너머에서는 수단 정부군과 반군세력 간의 전투로 주민들이 대거 이동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2013년 12월 15일, 남수단의 수도 주바에 위치한 대통령 경호대 사령부에서 격렬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시작된 내전은 규모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대통령은 지난 7월 23일 자신이 해임한 리에크 마차르 테니 두르곤 전 부통령이 쿠데타를 시도했다고 주장하며, 마차르 전 부통령은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대통령 본인이 획책한 총격전이라고 말한다. 당시 마차르는 목숨을 바친 경호원들의 희생 덕분에 간신히 살아났다. 그러나 의심이 허용되지 않을 만큼 상황은 명백했다. 2014년 1월 19일, 린다 토머스 그린필드 미국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차관보는 “쿠데타를 시도한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잠옷 바람으로 도망쳐야 했다”는 마차르의 생생한 증언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 후에도 마차르 지지파와 정부군 간에는 여전히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

2011년 7월 국민투표를 통해 수단에서 분리 독립한 신생국가 남수단공화국이 어쩌다가 이토록 흔들리게 된 걸까? 그 시발점은 2012년 9월 27일 수단과 남수단 간에 체결된 석유협정, 그리고 2015년 대선에 출마하여 재임에 도전하겠다는 키르 남수단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키르 대통령이 집권한 지난 8년(1)은 결코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족 간 분쟁, 잦은 반란, 무능한 행정, 부진한 경제발전, 만연한 부패 등으로 얼룩진 세월일 뿐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각료들을 꾸짖으며 보낸 공개서한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내용은 이러하다. “당신들이 훔쳐간 40억 달러를 돌려주시오. 국가발전을 위해 필요한 돈입니다.”

미국은 신생국 남수단의 뒤를 돌봐주었고 잘못까지 묵인해 주었다. 수단 정권에 반대하며 주바에서 세력을 잡고 독립국을 세운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에 우호적인, 그야말로 ‘외교 마피아’ 덕분에 남수단은 오바마 정부의 총애를 받게 됐고, 남수단에 대한 비난은 일절 금기시됐다. 수단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했다. 오마르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은 키르 남수단 대통령의 재선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고 협박 정책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모든 반정부 세력을 아우른 우산조직인 수단혁명전선(SRF)이 이끄는 북부 게릴라를 제압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수단혁명전선은 2011년 가을부터 흑인 무슬림 부족들이 중심이 되어 투쟁을 벌여왔다. 흑인 무슬림들은 종교공동체를 기반으로 오래 전부터 아랍인들에게 신의를 보여줬다. 그러나 내전(1983~2002)을 치르면서 이러한 신의는 차차 약해지더니 급기야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기독교인들과의 투쟁에 오랫동안 동원된 흑인 무슬림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했고, 결국 진영을 바꾸게 됐다. 이들의 첫 활동은 2003년 다르푸르 사태(2)였다. 두 번째 무대는 역설적이게도 2011년 기독교계 남수단의 독립이었고 이를 계기로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수단의 이슬람 정권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 투쟁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종교적 이유를 들어 무슬림들을 회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남은 방법은 인종주의를 이용하고 ‘노예’들에게 위협을 강조하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노예’란 아랍계 수단인들이 흑인들을 지칭하며 흔히 쓰는 표현이다.

 

수단이 노리는 고양이와 쥐 놀음

당초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이 남수단에 바라는 바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2012년 9월 체결된 석유협정을 이행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키르 남수단 대통령이 수단혁명전선에 대한 지지를 중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절망적이던 당시 수단의 경제상황을 감안한 알바시르 대통령은 남수단이 비교적 유리한 협정 조항(남수단이 북부 송유관을 통해 원유 수송 시 1배럴 당 10.25달러 지급)을 포기하고, 대신 수단의 석유생산 중단에 따른 ‘보상금’부터 당장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협정에는 보상금의 지급 시한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를 얻어내기 위해 수단은 남수단을 더욱 철저히 장악해야 했다.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은 석유 수출을 중단시키더니 이내 부분적으로 허용하면서 키르 남수단 대통령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한마디로 고양이와 쥐 놀음을 하자는 것이었다. 2013년 7월, 수단의 의중을 알아차린 키르 대통령은 내각을 경질하고 마차르 부통령을 내쫓았다. 그리고 열흘 뒤, 친(親)수단 인사(리아크 고크, 텔라르 링 뎅, 압달라 뎅 니알) 위주로 내각을 새로이 구성했다. 이후 다시 석유 수출이 활발해졌고 수입도 늘어났다.

2013년 11월, 알바시르 수단 대통령은 주바를 방문하여 남수단 대통령에게 이제 보상금을 지급할 때가 됐음을 알렸다. 그리고는 당장 결제를 시작하되 운송료를 인상하는 방식으로 점차 지급할 것을 제안했다. 키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운송료는 조금씩 오르기는커녕 폭등했다.(3) 알바시르 대통령은 이리하여 원하는 바를 모두 얻어냈다. 딩카족(레크, 아가르) 및 이들을 지지하며 대가를 받는 기타 부족민들로 구성된 파벌이 남수단 정부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석유 수출 덕분에 높은 수입까지 올리게 된 것이다.
수단 정권이 주도한 이러한 작전은 남수단의 민주화에 방해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실 남수단은 ‘국가’라고 보기에는 미흡하다. 독재적 게릴라 세력의 초중앙집권적 조직들이 투영된 형태에 불과하며, 1983년부터 2002년까지 수단 내전에 참여한 각지의 여러 투쟁조직을 바탕으로 여러 종족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부대들이 정부군을 이루고 있다. 내전 당시 수단을 위해 싸운 민병대들이 아무런 통일성도 없이 점차적으로 정부군에 ‘통합’되면서 내재된 분열구도는 더욱 심화됐다.

 

아프리카 최연소 국가의 위기

이제 2015년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느냐 뿐만 아니라 과연 선거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대대적인 질적 변화를 통해 남수단은 패거리 정권에서 완연한 법치국가로 변모할 수 있을까? 지난 12월 발발한 사태 이전까지만 해도 ‘개혁 움직임’과 ‘민주화 투쟁’의 가능성이 조심스레 언급되곤 했지만 이제 그런 시나리오는 별로 실현성이 없어 보인다. 흔히 현 사태의 과격한 전개양상이 부족 간 갈등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민주주의적 현대화와 인기영합적 강경화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독재정권이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한 것이 주된 이유다. 아프리카에서는 활동주체들이 자신의 종족에서 정체성을 찾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즉, 독립을 주장했던 수단인민해방운동 지도층 일부가 자신들의 이익이 위협을 받자 마음을 바꿔먹고 전개한 광범위한 운동이 그 핵심이다. 이제 막 태동하는 남수단 정치에서 대부분의 토론은 의회가 아닌 민족해방위원회(NLC)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과거 레닌주의 운동의 수직적 조직구조를 계승하여 탄생한 이 기구는 수단인민해방운동이라는 ‘정당 속의 의회’ 역할을 하고 있다. 키르 대통령은 이 기구에서 민주화를 지향하는 어떤 표현도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있다.

키르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은 민주주의적 현대화로 인해 자신들의 소중한 기득권을 잃을 수 있다고 여긴다. 지난 12월 15일, 한창 조직 정비 중이던 야권은 민족해방위원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대규모 총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대통령 경호대원들 중 딩카족이 누에르족의 무기를 빼앗고 제압하려 들었다. 참고로 키르 대통령은 딩카족, 마차르 전 부통령은 누에르족(4) 출신이다. 한편 또 다른 군인들이 ‘개혁파’ 정치인 11명을 위험인물이라며 체포했다. 마차르는 피신했고, 누에르족 출신 군인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내전은 그렇게 시작됐고 끔찍한 피해를 야기했다. 마차르 전 부통령이 쿠데타를 주도했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없지만, 야심에 찬 대통령이 자신의 소속정당이 주도한 민주주의적 도전에 맞서 권력 강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브뤼메르 18일(5)에 비견할 만하다.

이러한 정치적 구도에 인종적 요소가 개입한 것이다. 누에르족 출신 군인들은 자신들의 영웅인 마차르 전 부통령을 지키기 위해 즉각적으로 들고일어났다. 곧이어 주바에서는 딩카족 군인들이 누에르족 민간인과 군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열은 보다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수단인민해방운동의 지도자였던 존 가랑의 미망인 레베카 가랑은 딩카족 출신이었지만 개혁파 진영에 합류했고 그의 큰아들은 마차르를 지지하는 누에르족 대표단의 일원이 됐다. 수감된 개혁파 정치인 11명은 서로 다른 5개 부족 출신들인데 그 중 2명은 딩카족이다. 북쪽의 유전도시 벤티유에서는 키르 대통령 편에 선 누에르족이 마차르 전 부통령을 지지하는 다른 누에르족들과 전투를 벌였다. 누에르족도 딩카족도 아닌 에콰토리아 지역에서는 군소부족들(마디, 바리, 로투코, 토포사)이 각기 자신의 진영을 택했는데 상당수는 마차르와 개혁파의 편에 섰다. 맹목적으로 자신의 부족을 추종하는 경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좌우됐다. 무력충돌은 극단으로 흘렀고, 중재국가들 즉 아프리카정부간개발기구(IGAD) 회원국들끼리도 분열되어 있었고 심지어 서로 분쟁을 벌이기까지 했기에 상황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에티오피아는 궁극적으로 자국 안보를 위협하는 남수단 분쟁에서 중립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애썼다. 잠시 키르 대통령을 지지하는 듯했던 케냐도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우간다는 여기에 한술 더 떴다. ‘선출된 정부’인 남수단 정부를 지지한다는 구실로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은 남수단 반군지역에 폭격을 가했고, 1월 중순에는 보르지역 대대적인 군사공격을 동참하는 등 한마디로 북치고 장구치는 격이었다.

미국, 유럽연합, 그리고 중국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국제사회는 원론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것 이외에는 이상하리만큼 침묵을 지키고 있다. 3년 전 모든 이의 축복 속에 탄생한 아프리카 대륙 최연소 국가에 갑작스레 닥친 위기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목소리를 잃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수단 석유의 주요 수입국인 중국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그저 기다려볼 작정인 듯하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 간접적으로나마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불편해하고 있다. 미국은 남수단의 반민주적 격랑을 묵인해줬고 지금은 이를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에 대한 반발이 무장투쟁으로 표현된 것을 용인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앞으로의 상황은 어떻게 진행될까? 우간다의 개입으로 악화된 폭력사태가 빠른 시일 내에 중단되지 않는다면 남수단은 민주화 투쟁의 움직임으로 잠시나마 뒷전으로 밀려났던 종족주의가 되살아나면서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남수단처럼 제도화가 미진한 국가라면 완전히 해체될 위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 전체의 재앙이 될 수 있다. 내전 중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소말리아, 경제 붕괴 위기에 처한 수단, 독재로 신음하는 에리트리아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전체가 대대적인 위기에 빠질 우려가 있고, 이 경우 궁극적으로 에티오피아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글·제라르 프뤼니에 Gérard Prunier
대서양위원회(Atlantic Council) 회원, 아프리카 전문 컨설턴트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르몽드세계사2>(공역)(2010) 등이 있다.

(1) 키르 대통령은 남수단 독립 이전 2005년부터 2011년까지 과도정부를 이끌었다.
(2) 제라르 프뤼니에, ‘Darfour, la chronique d’un génocide ambigu 다르푸르, 모호한 인종학살의 일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7년 3월호.
(3) 금액은 국가기밀이며 배럴당 30달러 안팎으로 추정된다.
(4) 딩카족은 남수단 최대 종족(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인구의 40% 추정)으로 방대하게 퍼져 있어 여러 개의 소부족으로 나뉜다. 이들 소부족은 각기 독자적 개체로 활동하곤 한다. 두 번째 규모의 종족인 누에르족도 마찬가지다.
(5) 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스스로 제1집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