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내전으로 고통받는 민간인들

2014-02-07     장바티스트 갈로팽 -사회학자

2012년 5월 아침, 수단의 청(靑)나일 주(州) 잉게사나 산 아래 마을 가바니트에 폭격이 가해졌다. 우크라이나제 화물수송기 안토노프가 높은 고도에서 수제 폭발물과 금속으로 가득 찬 드럼통을 투하했다. 폭격이 끝나자 포병대가 북수단 인민해방군(SPLM/A-N)이 숨어있는 마을과 주변 산에 무차별 포격을 시작했다. 뒤이어 마을에 들어온 보병은 공포에 싸여 도망치는 민간인들을 향해 보이는 대로 총을 난사했다. 노약자들은 총에 맞아 죽거나 군인들의 방화로 산 채로 불타 죽었다. 폭격이 있은 지 7개월 후 군사기지로 사용하고 있는 학교 외에 마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이슬람 사원마저 파괴되었다.

건기 동안 잉게사나 산에서 주민들을 몰아내기 위한 초토화 작전이 계속되면서 마을이 하나씩 사라졌다. 28살의 아웨달라 하산도 안토노프의 폭격으로 고향인 호르 지다드를 떠나야 했고 지금은 2011년 7월 수단(북수단)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남수단의 마반 수용소에서 청나일 주에서 이주해온 2만 명의 난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햇빛과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해 나뭇가지와 방수포로 만든 가림막 아래서 하산은 아무런 감정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군인들이 여섯 대의 트럭과 스무 대의 지프를 타고 와서 가축을 모두 빼앗고 마을을 불태웠다.”

현재 청나일 주에서 3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유혈사태가 잊혀질 위기에 처해있다. 남코르도판 주와 마찬가지로 청나일 주에서도 수단 정부군과 친남수단 성향의 SPLM 해방군이 충돌하고 있는데 그 시작은 2011년 6월 남수단이 분리 독립을 준비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1) 수단 정부는 북수단의 주인 남코르도판과 청나일에 그때까지 주둔하고 있던 남수단 군대를 이동시키라고 남수단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수단군은 남코르도판 주에서 SPLM 해방군의 무장해제를 시도했고 이로 인해 내전이 촉발되었다.
 

독성 식물뿌리로 연명하는 피난민들


내전은 시작된 지 3개월도 안 되어 청나일 주까지 확산되었지만 SPLM 해방군은 국제 사회가 그어놓은 남북 국경선에서 북쪽에 위치하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로 인해 남수단 정권과 정식으로 결별하고 북수단 정권의 반군이 된다. 남코르도판 주에 있는 반군은 그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반면 청나일 주 반군은 준비 부족으로 주요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고 곧바로 전략 지역인 쿠루무크 마을과 잉게사나 산악지역을 잃게 되었다. 현재는 청나일에서 반군이 통제하고 있는 지역은 남수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손바닥만한 지역에 불과하다.

남수단에서 청나일 반군지역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것은 황폐한 풍경뿐이다. 국경을 지나면 아카시아 나무와 덤불숲이 보이기 시작하지만 반군기지와 군복을 입고 걸어가는 몇 명의 청년들을 제외하면 사람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구파 국경초소에서 좀 더 북쪽에 있는 마을 사마리로 가는 길에 방문한 학교에서 안토노프 폭격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수업이 중단된 지 오래 된 교실의 벽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전쟁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말해준다. 벽에는 두 명의 남자가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하는 모습과 헬리콥터 밑에 누워있는 몸이 잘려나간 시체가 그려져 있었다.

주민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는 수단 공군의 비행과 폭격을 피해 사바나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길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서 생활하며 먹을 것을 주우러 다니거나 난민수용소에서 불법적으로 들여보낸 유엔난민기구(UNHCR)의 배급품으로 연명하고 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에게 곱(gop)을 흔들어 보였다. 곱은 식물의 뿌리로 독성이 있어서 하루 동안 삶은 다음 먹어야 한다. 수단 정부는 구호단체가 반군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대규모 이탈이 일어났고 열악했지만 그나마 존재했던 구호활동마저 중단된 상태다. 청나일에 수만 명의 민간인이 있지만 학교와 보건소도 운영되지 않고 있다. 노약자들이 당하는 고통은 훨씬 컸다. 장애인과 노인은 버려졌고 병에 걸린 사람들은 수용소로 가는 도중 배고픔과 탈수로 사망했다. 폭격에 부상당한 아이들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부모의 품속에서 죽어갔다.

며칠 후 언론의 무관심 속에 남수단 수용소에서 난민을 돕고 있는 활동가들로부터 자신들이 처해있는 딜레마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겨우 십여 km 떨어진 청나일에 난민들이 아직 남아 있지만 국경에 가로막혀 있고 또 수단 정부의 보복과 안토노프의 표적이 될 것이 두려워 청나일로 가려는 활동가는 없다고 했다. 남코르도판 주에는 몇 개의 NGO 단체가 국경을 넘는 위험을 무릅쓰고 구호활동을 하고 있지만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청나일에게는 이런 행운조차 없다.
 

구호 활동을 봉쇄하는 수단 정부

수단 정부가 구호 활동을 봉쇄하는 이유는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의 주민들이 배고픔과 공포에 못 이겨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전략은 다르푸르와 2차 수단내전(1983~2005) 중 남수단 국경지역에서 사용된 바 있다. 이에 대해 반군은 인적, 물적 자원을 가장 손쉽게 확보할 수 있는 난민수용소를 활용하는 것으로 대응하고 있다. 구체적인 전략이 없는 반군에게 마반 난민수용소는 후방기지인 셈이다. 난민수용소 근처에 있는 도시 분즈에는 청년들을 진흙을 잔뜩 실은 흰색 픽업트럭이 들고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진흙은 안토노프의 폭격에 대비한 임시 위장 방법이다. 반군은 마반과 이디오피아의 야부스를 연결하는 비공식 교역로를 이용해서 분즈에서 병참지원을 조직하고 있다. 야부스는 청나일 주 남쪽에 있는 도시로 SPLM 해방군의 주요기지이다.

반군이 난민수용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SPLM의 의장인 말릭 아가르는 매달 난민수용소에서 회의를 열어 족장들에게 전투에 참가할 젊은이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반군은 처음에는 지원병 중심이었지만 2012년 11월부터는 강제적으로 병사를 모집하고 있다. ‘탈영병’이나 족장들이 보낸 병사들이 징병을 거부할 경우 밤에 무장군인에 의해 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반군은 매달 트럭을 타고 수용소로 들어와 ‘혁명세’ 명목으로 음식과 돈을 걷어가고 있다. 이러한 행태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려는 유엔난민기구 직원들은 협박을 받았고 이 문제를 외국인에게 공개적으로 말하는 난민들도 없었다.

이처럼 민간인들이 큰 대가를 치르고 있고 북수단과 남수단 모두 내부 균열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의 목적은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기적으로 반군이 전통적인 본거지인 청나일 주의 쿠르무크를 회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고 수단 정부도 코르도판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청나일에서 군사력을 축소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SPLM 해방군은 2011년부터 다르푸르의 주요 반군 세력과 수단혁명전선(SRF)이라는 이름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해 소모전을 강화하고 중앙정권의 방어선이라 할 수 있는 북코르도판 주까지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수단에서는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위기로 중앙정권에 대한 변방지역의 충성이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수단 내전의 최종 시나리오는 수도로 향하는 반군의 승리의 진격이라기보다는 이미 시작된 ‘소말리아화’의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얼마 전부터 남수단 내부에서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2월 살바 키르 대통령은 군복을 입고 국영TV에 나와 오랜 정적인 리에크 마차르 전 부통령이 쿠데타를 시도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마차르 전 부통령은 카누를 타고 수도를 빠져나가 무장봉기를 주도하고 며칠 만에 수도 주바에서 200km 떨어진 전략요충지 보르를 접수했다. 유니티 주의 대부분도 수중에 넣어 남수단 원유생산 시설 20%를 마비시키기도 했다. 그 후 주요도시에서 정부군과 반군의 충돌이 계속 일어났으며 벌써 20만 명의 민간인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SPLM 반군은 남수단 내전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코르도판과 청나일에서 온 난민들은 남수단의 정치적 불안으로 많은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분쟁이 확대되면 구호품의 지원이 끊길 것이고 수단 정부군과 친남수단 파벌 사이에서 희생양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마반 난민수용소에서 살고 있는 청년 알 준디는 “청나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미봉책으로 대응하는 국제사회


국제사회가 수단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면 마반 수용소에 있는 난민들의 걱정이 과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대국과 인접국들은 코르도판과 청나일의 상황을 무시한 상태에서 위기가 생길 때마다 미봉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한동안 북수단과 남수단의 관계에 신경을 쓰는 것 같더니,(2) 이제는 남수단 분쟁에 집중하고 있다. 아프리카연합(AU)의 지원을 받고 있는 국제분쟁조정기구들도 수단 정부와 SPLM 반군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지난 12월로 예정된 회담이 취소되었는데 공식적인 이유는 넬슨 만델라의 사망이었지만 실패로 끝날 것이 확실한 회담에 아무도 열의를 보이지 않은 것이 진짜 이유였다. “두 가지 사안을 동시에 다루지 못하는 중재자들의 무능력이 증명된 것”이라고 국제위기그룹(ICG)의 수단문제 분석가 제롬 투비아나는 말했다. 현재 남코르도판과 청나일 문제는 부차적인 사안으로 취급되어 사람들의 관심에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수단 정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로 특별한 제재 없이 이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현 상황은 지난 10년 동안 청나일/코르도판 분쟁, 다르푸르 내전 그리고 수단의 독재정권과 같은 수단의 문제를 별개로 다루어온 국제사회의 접근방법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3) 국제평화 관련 연구원인 클라우디오 그라미치는 “국제사회는 수단의 제반 문제들을 비밀리에 처리해 왔다. 수단 정부는 자신에게 유리한 이 정책을 지지했다”고 상황을 요약했다.

북수단 문제의 근원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편협한 엘리트들이다. 그리고 남수단의 경우에도 다르푸르 유혈사태가 절정에 달했던 2005년 2차 수단내전을 종식하는 평화협정을 맺고 자치권을 갖게 되었을 때 민주화 노력도 병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다원적 개방에 반대하는 북수단과 남수단의 엘리트들의 저항에 부딪혀 강대국들은 민주주의 정착 대신에 남수단의 분리 독립과 단기적 안정에만 집중했다. 현재 수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공조에 대한 필요성이 유럽과 미국 외교가에서 확산되고 있지만 수단에 민주정부 건설을 위한 노력이 병행되지 않고는 수단에서의 평화 정착은 갈 길이 멀 수밖에 없다.  

글·장바티스트 갈로팽 Jean-Baptiste Gallopin
예일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했으며, 진보매체에 주로 아랍 문제에 관한 기사를 기고하고 있다.

번역•임명주  

(1) Gérard Prunier, ‘Le régime de Khartoum bousculé par la sécession du Sud’ (남부 분리독립과 하루툼 정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2월호.
(2) ‘Amer divorce des deux Soudans’ (수단의 뼈아픈 결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3) John R. Young, <The Fate of Sudan  : The Origins and Consequences of a Flawed Peace Process> Zed Books, 런던,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