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마법, 역사의 허구를 벗긴다

2014-02-07     제라르 모르디야 -작가

1990년대 중반, 피뇽 에르네스트는 프랑스 리용에 있는 생폴교도소에 가서 수감자들을 만났다. 2012년 이 교도소가 가톨릭대학교 건물로 리모델링되기에 앞서 그는 다시 이곳을 찾는다. 방문의 목적은 “이 벽들 사이에 수감되어, 프랑스당국 또는 나치에 의해 고문당하고, 처형당한 이들을 생각하고, 이곳에 새 얼굴을 부여하는 것, 또한 이곳에서 침해당하고 때로는 자살에까지 이르기도 한 ‘보편적 권리’에 대해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저지른 범죄의 희미한 흔적을 이제와 어디서 찾을 것인가?’ 
                                                                                 - 소포클레스

교도소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불안하고 가슴이 죄이는 느낌이 들면서 바로 지옥으로 떨어질 듯한 기분이 들어 프랑수아 비용의 ‘교수형을 선고받은 이들의 발라드’ 첫 소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보다 어린 형제여, 우리를 무정하게 대하지 말지니. 가여운 우리를 딱하게 여긴다면 신은 그대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프랑스 리옹에 위치한 성 바오로 교도소는 페라쉬역에서 두 걸음 거리이다. 역과 얼마나 가까운지 수감자들은 해질녘 오가는 열차 소음은 물론 사랑하는 이를 만난 반가움을 표현하거나 화를 내거나 낙심하는 승객들의 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교도소에 바오로나 펠라기우스나 나사로 등 성인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음침한 반어법이다. 이런 선택은 무슨 의미일까?

로마 군인에 붙잡혀 학대를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이미지는 상당히 의미심장해 처형대로 걸어가는 사형수가 마치 에케 호모로 비쳐지고 수감된 모든 인간에게서 기독교 성상학이 양산한 그리스도적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투옥은 죽음이고 자유는 부활인가? 아니면 더 잔인하게도 자칭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주의가 이 교도소 안에서 세리장 자캐오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 나온 예수의 끔찍한 명령을 실천에 옮긴 것일까?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내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루가복음 19:37)

성 바오로 교도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총살을 당하거나 목이 잘리거나 자살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음침한 교도소 벽에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는 교도소 통로 곳곳과 가시망으로 둘러싸인 마당에 설치한 거대한 그림으로 그들을 불러냈다. 그의 작품은 돌벽에 붙어있지 않다. 어떤 관람객의 말처럼 “벽이 그림을 베어내고 있다.”

이 형상은 마술사가 불러낼 법한, 이 교도소에 붙어있는 유령이나 무형의 악마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실재한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이고 레지스탕스이고 전투병이고 반란자이다. 숨을 쉬던 남자와 여자였고 투쟁을 하다가 죽었다. 기독교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등장을 ‘현현’이라고 한다. 성 바오로 교도소 수감자가 당한 범죄를 폭로하고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가 생명을 불어넣어 기억과 현대인의 의식 속으로 불러왔으니 이곳에서는 ‘범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화가가 벗겨낸 역사의 거짓 베일

가시철망에 걸린 거대한 천에 그려진 그림은 토리노의 ‘거룩한 염포’의 다른 버전이다. 성스러운 염포와 달리 이 그림은 죽은 자의 이미지를 드러내지 않고 덮는다.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아이젠슈타인(1)이 곧 총살당할 전함 포템킨의 해군을 방수포로 가려 사태의 잔혹성을 역설한 것처럼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는 자살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몸 위에 천을 덮었다. 성 바오로 교도소는 많은 수감자가 자살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화가는 연필이나 목탄으로 그린 그림으로 우리가 서둘러 장막을 걷도록, 위대한 프랑스 역사의 거짓된 베일을 벗기도록, 모든 사회가 억압하고 부인하고 프랑스 국민들이 유일하게 납득할 법한 성인전의 화려한 컬러로 미화한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도록 했다. 그러면서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는 이제 선 하나하나와 이미지 하나하나를 통해 국가적 소설로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리된 사실을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1880년대부터 알제리전쟁의 암흑기까지 역사의 이면을 다시 그렸다. 숨겨왔던 역사를 다시 환기시켰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정치적 행위가 됐다.

수감자들이 기억 속에서 또 교도소에서 다시 등장해 시간이 망각이라는 공동의 구덩이로 밀어 넣으려고 애쓰던 정체성을 회복했다. 그런데 누구보다 우리의 자리는 어디일까?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교도소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일까? 수감자인가 아니면 교도관인가? 우리를 대면한 모든 얼굴들이 암묵적으로 이 질문을 던지고, 누구도 대답을 회피할 수 없다. 그 누가 자신은 역사의 안전지대에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정의의 편일까? 언제라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쪽일까?

-아흐메드 셰르샤리, 알제리 독립운동가, 1960년 2월 23일 참수형됨.
-앙드레 솔로랑트, 1944년 2월 2일 프랑스 경찰에게 체포돼 한 시간 만에 총살됨.
-오귀스트 콜롱브, 프랑스 경찰에게 체포돼 1944년 4월 21일 총살됨.
-베르시 알브레히트, 레지스탕스, 리옹에서 체포됐으나 도주, 1943년 5월 31일 다시 체포돼 프레스네 교도소에 수감 후 교수형됨.
-산테 제로니모 카세리오, 이탈리아 출신의 무정부주의자, 사디 카르노 대통령을 암살한 혐의로 1894년 참수형됨.
-에밀 베르트랑, 23세, 1943년 10월 6일 프랑스 경찰에 의해 어머니, 여동생, 친구 피에르 블랑과 함께 체포돼 1943년 11월 3일 성 바오로 교도소 마당에서 참수형됨.
-장 물랑, 도지사이자 레지스탕스, 칼뤼르에서 체포, 게슈타포 본부에서 고문 당한 후 1943년 7월 8일 사망함.
-크로포트킨, 1842년 모스크바 출생, 1921년 사망, 무정부주의 이론가, 리옹 견직공 파업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880년대 수감됨.
-마크 블로흐, 역사학자, <경제사회연대기> 설립자, 1944년 3월 8일 리옹에서 게슈타포에게 체포, 고문 당한 후 총살됨.
-막스 바렐, FTP(2) 지휘자, 1944년 7월 6일 리옹 페라쉬에서 게슈타포에게 체포, 1944년 7월 11일 뜨거운 물을 끼얹는 고문 중에 사망함.
-레이몽 오브락, ‘남부해방운동’의 주동자, 1943년 10월 21일 탈출에 성공함. 로베르 나미앙(1913~1991), ‘전투’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고문을 받다가 국가법원의 특별부의 재판으로 4년형 선고받음.
-시몽 프리드, 폴란드 출생의 레지스탕스, 프랑스 경찰에게 체포돼 고문을 받다가 사형 선고 받음. 기념비에는 나치가 총살했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성 바오로 교도소 마당에서 비시 정부의 경찰에 의해 참수형됨.
-장 아르작, 레지스탕스, 1944년 1월 25일 프랑스 경찰에게 체포돼 1944년 2월 2일 총살됨.
-마르그리트 뷔파드, 공산주의 지식인, 레지스탕스, 고발당해 1944년 6월 10일 체포됨, 폴 투비에가 이끄는 친독의용대의 심문 중에 창 밖으로 투신 자살함.

이 목록은 반드시 필요하다.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의 그림은 아름답기에 아름답지 않다. 양식과 통찰력과 용기의 온화함을 용인하지 않아 아름답다. 그의 그림은 잔혹하리만큼 불편하고 끊임없이 현재에 말을 걸기 때문이다. 참혹한 경고이다. 현대 전쟁, 사회분쟁, 민중봉기 등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저항하고 투쟁하는 이들과 자신이 동급이라고 여길 수 있는가? 과하게 무기력하고 늙고 소심해져서 영원히 방관자로 남아있게 된 것일까?

원근법이 나타난 그림이지만 배경의 깊이가 거의 없다. 시선은 빠르게 종이의 하얀 벽에 부딪힌다. 그 벽이 명령을 내리는 것 같다. “멈춰!” 도망을 갈 수도 변절을 할 수도 없다. 벽을 따라 들어선 감방의 철창살 뒤로 나타나는 이와 나를 비교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은 그림에서 뼛속까지 벗겨져 있다. 화가가 그늘을 탐구하고 검정색과 회색을 사용했지만 그림의 비극적 측면은 활활 타오르는 빛에서 비롯된다. 전면의 빛은 캔버스가 반사경으로 활용될 만큼 잔인하게 밝다. 이곳에서는 예술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먹먹해진다. 어떤 의미에서 그림은 우리가 다른 곳을 보지 못하게 하고 제2경, 제3경, 그림이 희미해지는 저 멀리로 정신이 떠돌지 못하게 한다. 권투가 신사들의 야만적인 예술이라면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는 극도의 섬세함으로 이루어진 야만적인 예술을 구사한다.

표면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혔을 뿐인 예수처럼

초창기 기독교인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 소시지인지 쌍둥이인지 구레네의 시몬이나 유다, 시몬 피에르나 다른 이름 없는 청년 등 다른 누군가가 그를 대신했다. 형장에 나온 구경꾼들은 환영에 속았고 그저 ‘모형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졌고 코란 제4장의 한 구절에 등장할 정도로 널리 퍼졌다. 예수는 표면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뿐 실제로 살아있었다. 모든 종교적 관점을 벗어나, 아니 오히려 여기에 반하여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의 인물들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구시대 믿음을 전복시킬 만한 충격을 야기한다. 현존의 충격이다.

사진과 그림을 비교해본 사람은 사진이 그 자체로 한계가 있음을 알 것이다. 사진은 기술적 완벽함으로 원본과 거의 흡사한 ‘복제품’을 만들어내지만 예술가의 시선만큼이나 강한 사진은 관객과 거리가 생기기 마련이고 결국 재현에 불과하다. 반면 (아니 이와 다르게) 그림은 원본의 현존이라는 느낌을 준다. 마치 초창기 예언자들이 부활한 예수의 존재나 그의 환영을 느낀 것처럼, 단지 시선만이 자신의 것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몸 안에 화가의 정신이 구현된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뻗어나가 종이 위를 휘젓는, 파울 클레의 표현대로 ‘여행을 떠난’, 파도가 높아지는 바로 그 순간 뛰어드는 하이다이버처럼 완성된 작품에 서명을 하는 손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매번 죽음의 다이빙이기도 한 제비식 다이빙을 하는 것이다. 수정이란 없다.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의 작품은 그가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준 글자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강도로 볼 때 각각의 그림은 사형수의 마지막 말처럼 보이고 죽은 자만이 읽을 수 있는 알파벳을 만들어낸다. 벽에 손톱으로 새기고 피나 변을 묻힌 손가락으로 적은 기나긴 고통의 글이다. 은유적으로 볼 때 그의 그림은 전투병의 용기와 통찰력과 사회참여는 물론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와 그들을 이어주는 연대감을 기리는 오마주이자 묘비이다.

그의 작품은 하나하나 살피면서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진실은 원경과 근경에서 표출된다. 원경에서는 수감자들이 우리를 부르고, 근경에서는 수많은 얼굴들이 경이로운 평온함으로 우리 눈앞을 지나간다. 이곳에 과장이나 분노, 울부짖음, 반항의 흔적은 없고 쇠창살을 마주한 사형수의 마지막 저항 같은 존엄성만이 존재한다. 수감자들이 메시지나 담배나 물건을 서로 전하기 위해 사용했던 끈에 달린 플라스틱병에는 어떤 희망이, 어떤 슬픔이, 어떤 욕망이 담겼을까?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가 여기는 인형, 저기는 집게, 또 다른 곳에는 거미를 담아 봉헌물로 탈바꿈시킨, 창문에 걸린 요요에는? 자신의 이미지가 사라지는 마당에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이를 본능적으로 뒷걸음치게 만드는 음산한 그림자를 지닌 기요틴은 누가 불태웠을까? 교도소 마당 벽 위에 붙은 인물을 보는 관객들은 무엇을 상상할까?

그들은 그림에서 중국회화를 보기도 하고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회화에서 예수의 수난화나 성모 마리아나 법열을 느낀 성인을 그린 그림 배경으로 즐겨 사용된 장식을 보기도 한다. 그가 사막에서 튀어나와 우리에게 다가와 좋은 소식을 전할지, 아니면 반대로 결국 이 불모지 위 신의 품에서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될 종착역인지 모를 무미건조한 배경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들이 보게 될 관경은 그가 자신의 은밀한 비밀로 간직했고 그들이 의미를 축소하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는 그런 내면일 것이다.
장 주네는 꽃과 도형수가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지 밝혔다. 그에게는 장미의 기적이 있었다. 에르네스트 피뇽 에르네스트에게는 그림의 기적이 있다.

글·제라르 모르디야 Gérard Mordillat
영화인 겸 작가. 최신작으로 <베일에 싸인 거울과 이미지 위에 쓰인 다른 문자>(Calmann-Levy, 파리, 1월 출간)이 있다.

번역•서희정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있다.

(1)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아이젠슈타인(1898~1948), 소비에트 연방의 영화인이자 감독, 대표작으로 <전함 포템킨>(1925), <폭군 이반> 1부와 2부(1944~46)가 있다.
(2) ‘의용병과 유격대원’, 1941년 프랑스 공산당이 시작한 레지스탕스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