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의 테러, 케냐의 불안

2014-02-10     제라르 프뤼니에 -아프리카 전문 컨설턴트

2013년 9월 21일, 샤바브(소말리아의 이슬람 무장세력 하라카트 알-샤바브 알 무자히딘의 약칭)의 특공대원들이 케냐 나이로비의 대형 쇼핑몰 웨스트게이트에 난입해 쇼핑객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테러리스트들은 미로와 같은 상점들 안에 숨어 나흘 동안이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그로부터 4개여 월이 지난 2월 2일, 케냐 경찰은 이슬람 무장단체의 훈련 장소로 지목된 마젱고 지역의 마스지드 무사 이슬람 사원을 급습해 129명의 청년을 테러조직에 가담한 혐의로 검거했다. 경찰이 사원을 급습하자 일부 청년은 소말리아 이슬람 무장단체 알-샤바브의 문구가 적힌 검은 현수막을 흔들며 저항했다. 그러나 사건발생 당시, 케냐 당국은 이 학살을 저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공대의 정체를 확인하지도 못했고, 도주로를 차단하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그중 한 명도 체포하지 못했다. 사건 발생 넉 달이 지나고서야 혐의자들을 체포한 것이다.

이 사건은 먼저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두 가지 측면이 과소평가되고 있다. 그 하나는 1988년 게릴라 공격을 시작으로 소말리아 전국을 휩쓸고 있는 내전 중의 한 사건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진 2007년 케냐 대통령 선거 이후(1) 끊이지 않고 있는 정치 불안이 심화되는 징후라는 점이다. 소말리아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 1991년 시아드 바레 독재체제가 붕괴한 이래, 그리고 국제적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2) 소말리아 북부의 소말리랜드가 1991년 독립을 선포하며 대규모 폭동을 일으킨 이후 줄곧 분열되어 있는 상태다. 2004년부터 무장세력 샤바브(원래 ‘청년세대’라는 뜻)가 급성장한 것은, 케냐의 계속된 정치력 약화를 상징한다. 알카에다와 연계된 샤바브는 지난해 9월 수도 나이로비에서 67명이 목숨을 잃은 웨스트게이트 쇼핑몰 테러를 저지르는 등 케냐에서 크고 작은 테러를 벌이면서, 아프리카연합군의 일원으로 소말리아에 배치된 케냐군 병력의 철수를 요구해왔다.
 
샤바브 내부의 갈등

샤바브의 웨스트게이트에 대한 테러를 케냐에 대한 보복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2011년에 케냐 군대가 소말리아연방정부군과 프랑스 공군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과격단체의 베이스캠프에 진입한 적이 있다. 하지만 케냐 군대는 소말리아에서 작전 수행 중인 수많은 외국 군대 중의 하나, 그것도 가장 비효율적인 군대 중 하나일 뿐이다. 그보다 우간다, 부룬디, 지부티 군대는 아프리카연합과 국제연합이 공동으로 재정을 지원하는 소말리아 내 아프리카연합(AU) 평화유지군(Amison)의 보호 아래 2007년부터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에티오피아 부대는 평화유지군과 관계없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한다. 케냐는 소말리아의 평화 정착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국 이익만을 추구할 뿐이다.

케냐는 시프타(소말리아 도적떼)의 계속된 기습공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동부 국경 수비와,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인도양 지역을 장악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2011년 케냐 군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200km를 진격하는 데 9달이 걸렸다. 이렇게 진격 속도가 느렸던 것은 보급망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은 탓이다. 2012년 9월 키스마요 항 점령 시 케냐 군대는 아메드 마두베와 동맹을 맺고 마두베의 지역민병대를 앞세웠다. 이후 이들이 바스 주바 지역의 치안을 담당했다. 그런데다가 2013년 1월 마두베가 게도로 진격하며 케냐에게 배후지 ‘청소’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자, 케냐 군대는 샤바브와 대치할 능력이 없다 여기고 빠져 버렸던 것이다.

2012년에 이슬람 세력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소말리아의 여러 마을을 잃었다. 그 결과 소말리아에 새로운 헌법과 새 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다. 2012년 9월 10일 하산 셰이크 모하무드 대통령이 선출되는 것으로 2004년부터 UN의 감독을 받아온 과도정부 체제가 마감됐다.

나이로비 기습을 통해 이슬람 세력이 새로운 전략적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보는 것도 잘못이다. 소말리아 내전이 케냐로 투영되는 상황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웨스트게이트 테러는 지난 4월부터 7월 사이에 벌어진 샤바브 내부 갈등의 결과다. 소말리아 내 아프리카연합(AU)평화유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이슬람 세력 내부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이슬람 무장 세력의 중요 지도자 중 한 명인 아메드 고단에게 많은 부하들이 저항했고, 이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다. 그들 중 한 명으로, 오래 전부터 소말리아 이슬람 운동을 이끌어온 하산 다웨르 아웨이는 결국 연방정부에 항복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모가디슈에서 국제평화유지군의 보호 아래 생활하고 있다.

웨스트게이트 테러를 자행한 특공대가 고단 휘하의 부대인지, 그 반대자들의 부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반면,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현재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 지출을 줄이고 있는 알카에다의 자금을 끌어들이려 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런 식으로 고단은, 이슬람마그레브 알카에다(AQMI), 아라비아반도 알카에다(AQPA), 인도네시아의 이슬라미야 자마, 나이지리아의 보코 하람, 시리아의 여러 단체 등으로 이미 복잡해진 국제무대에서 이슬람 테러리즘의 ‘스타’ 반열에 올랐다.

물론 테러가 케냐로 수출되었다고 해서 소말리아에 근거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샤바브는 아직까지 소말리아 영토의 반 가까이를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점령지역에서 사회기반 시설공사를 맡거나 대중 집회, 심지어 아동 축제행사까지 개최해가며 연방정부에 맞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테러가 그들의 주요 활동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패는 아니다. 소수 부족들을 대변한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장점이다. 소수 부족들은 다수 부족의 ‘제국주의’에 희생당했다고 느낀다. 다수 부족 중 가장 영향력이 큰 부족은 하위예 족으로, 소말리아연방정부군 내에 대거 포진해 있다. 소말리아연방정부는 샤바브와 전투를 벌이면서 위선적인 협정을 맺기도 하고, 주바 지역 등에서는 마두베에게 힘든 전투를 떠넘기기도 한다. 마두베가 케냐를 위해 일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가 케냐 사람들을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군사력이 미미한(3) 케냐는 심각한 정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2007년 대선 당시, 케냐 독립 때부터 시작돼 다니엘 아랍 무아 정권(1978~2002) 때 심화된 부족 갈등으로 1300명이 사망하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30만 명이 다른 부족의 공격을 피해 출신 부족 영내로 피신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원래의 거주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부족민병대가 구성되었고, 그중 가장 난폭한 부대가 키쿠유 부대와 칼렌진 부대다.(4) 집단학살이 일어나자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수사를 지시했고 키쿠유 족 주요 정치인 중 한 명인 우후루 케냐타(조모 케냐타 전 대통령의 아들)와 칼렌진 부족 지도자로 2007년 케냐타와 맞서 싸웠던 윌리엄 루토를 반인륜범죄로 기소했다.

국제적, 사법적으로 강한 압력을 받게 된 두 사람은 부자연스럽지만 효율적인 선거동맹을 맺고, 전체 유권자 1440만 명 중 1230만 명이 투표한 2013년 3월 1차 투표에서, 50.07%의 지지를 얻어(8,400표 차) 한 사람은 대통령으로, 다른 한 사람은 부통령으로 당선됐다. 반인륜범죄로 기소돼 국제형사재판소에 출두해야 하는 두 사람은 궁지에 몰렸다. 웨스트게이트 테러는 그들에게 마지막 구원의 길이었다.

“국민의 연합인가 독재자들의 모임인가?”

루토는 9월 21일 테러 발생 당시 이미 헤이그 사법재판소에 출두해 심문을 받는 중이었고, 케냐타 대통령은 11월에 출두하기로 되어 있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논의를 벌인 지 24시간도 안 되어 루토 부통령이 “자신의 직분을 신속히 수행할 수 있도록” 나이로비로 돌아가게 허락했다. 이후 케냐타와 루토는 피의자 신분이 아니라 ‘테러 위협’에 맞서는 국제적 합법성의 책임자가 됐다. 웨스트게이트 테러 당시, 쇼핑몰 지붕의 주차장에서 폭발물이 폭발해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 잔해에 깔려 매몰됐다. 군인들이 상점과 술집을 약탈하고,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할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 그렇게 치안군의 상황관리 능력이 한심한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경찰이 건물 평면도를 확보하지 못하고 하수구를 지키지 않아 테러범들이 하구수를 통해 도주하게 내버려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건 첫날, 지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군대의 실수로 경찰책임자가 사망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위기를 해결할 임무를 맡은 줄리어스 카랑기 장군과 데이비드 키마이요 경찰청장이 공개적으로 언쟁을 벌이고 모순된 명령으로 부하들을 당황케 하고, 대중이 단 한 순간도 믿지 않았던 내무장관이 쇼핑몰 화재가 테러범 탓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도 중요하지 않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됐던 케냐 대통령과 부통령, 두 사람은 조나단 굿럭 나이지리아 대통령과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에티오피아 외무장관, 그리고 2013년 10월 12일 아디스아바바에 집결한 아프리카연합회원국 대다수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르완다와 다르푸르 학살에 회한을 갖고 있는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만이 “목숨을 잃고 가정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지도자들이 정의를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을 위한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할 뿐이다. 인권보호 활동가인 수단의 블로거 하피트 모하메드는 자신의 글에 “아프리카 연합은 국민의 연합인가, 독재자들의 모임인가?”(5)라는 제목을 달았다.

케냐에서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케냐타와 루토가 기소에서 벗어났지만 케냐의 정치 불안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 케냐타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에게 절제를 요구했지만 국회의원들은 9월에 국회의원 월급 인상을 가결했다. 케냐의 국회의원 월급은 1만2천 달러로 전 세계에서 가장 세비를 많이 받는 상위그룹에 속하는 데도 말이다.

글·제라르 프뤼니에 Gérard Prunier
대서양위원회(Atlantic Council) 회원, 아프리카 전문 컨설턴트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장 크리스토프 세르방, “케냐의 대단히 정치적인 대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2월호.
(2) “소말리랜드, 아프리카적 예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0월호.
(3) 1963년 케냐가 독립한 이래 케냐방위군(KDF)의 실전 전투 경험은 전무하다. 케냐방위군의 ‘치안유지 작전’은, 1984년 3천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와갈라 학살처럼 유혈 참극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4) 케냐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을 지낸 조모 케냐타는 키쿠유 족이었고, 후임자인 다니엘 아랍 무아는 칼렌진 족이었다.
(5) 하피즈 모하메드, “아프리카연합은 국민의 연합인가, 독재자들의 모임인가?”, 2013년 10월 14일, http://sudantribu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