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한국적 특수상황이 만든 ‘물건’
2014-02-10 김석봉 -울산대 교수
기억 둘. 201X년 1월 X일. 오늘은 뭘 하나 하고 집안을 둘러보다가 딱히 할 일도 없고 내가 뭘 한다고 아내가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아,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는 무심히 화면을 쳐다본다. 문자 메시지 온 것부터 시작해서 통화 기록도 확인하고 전화기에 내장된 브라우저를 통해서 신문 기사도 검색한다. 그래도 시간이 가지를 않자 TV를 켠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간다. 이것이 21세기에 신년을 맞이하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렇다. 신문사가 주최하고 1월의 어느 날 신문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발표되던 신춘문예라는 행사는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우리의 기억 속 작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물론 요즘도 가끔 문예를 자신의 갈 길로 정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위의 두 기억의 풍경 가운데 하나쯤은 40세가 넘은 우리 세대로서는 한 번쯤 지녔을 법한 기억의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춘문예. 그 이름만 들어도 떨리고 흥분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떨림이나 흥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일간지에서는 왠지 모르게 ‘해야 할 일’이라는, 뭔지 모를 압박감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이 행사를 계속하고 있으며 몇몇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왠지 신춘문예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래서 계속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적인 곳이다. 때문에 여기서 잠시 과거로 돌아가 신춘문예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성장했고 어떻게 한국 문단의 거대한 뿌리가 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新春文藝(신춘문예). 그 이름을 이렇게 한자 원문으로 써 놓고 보면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새로운 해/봄을 맞이하는 때의 문예’ 정도로 뜻을 풀이할 수 있는 이 괴물은 언제 생겨났을까부터 이 괴이한 물체가 어떤 경로를 거쳐 성장했으며 그 힘이 왜 그토록 강력해졌을까까지 질문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 보자.
19세기 말 창간된 <한성순보>의 창간 이후 각종 신문 잡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지면을 통해 읽을거리를 비롯한 문예물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투고를 통해 활자화된 문예물이 해당 작품의 작가를 문인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을 투고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문인이 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작품을 보낸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한 것이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약 10년간 유일한 일간지였던 <매일신보> 역시 이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때 <매일신보>는 모집하는 글의 형태를 구분하고 글의 분량도 그 글이 취하는 형식과 관련하여 제한시키고 있지만 이 역시 편집상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을 뿐 해당 글의 창작자가 문인으로 대접받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1912년 시도한 ‘현상 모집’의 경우 당선자들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의 신문 구독권을 상품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이 제도가 현재의 경품 행사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이며 문인의 배출이라는 신춘문예만의 독자적인 성격과는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현상 모집’이 1919년 변화를 맞이한다. <매일신보>는 이해 11월 첫 ‘신춘문예’ 공모에 나선다. 그리고 1920년 1월 주요섭, 노자영 등 이후 문인들에게도 익숙한 당선자 명단이 보이는데 이 때 들어서야 비로소 <매일신보>의 신인 문인 등단이라는 구조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같은 상업적 민간지가 발행되기 시작하면서 문인 등단 방식 역시 변화한다. 1920년 창간 이후 1921년 「독자문단」을 설치하는 등 문인 재생산 구조에 관심을 갖던 <동아일보>는 이후 1922년 1월 1일자로 한시(漢詩) 한 장르만을 대상으로 한 독자 문예 공모 제도를 시행한다. 이 한시 공모가 주목되는 이유는 심사 과정을 공개하고 그 내역을 공개할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동아일보>는 여러 차례에 걸쳐 ‘현상 모집’이라는 이름 아래 독자들의 문예물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25년 1월 2일 <동아일보>의 ‘신춘문예’가 공고되기에 이른다.
다른 한편으로 <조선일보>의 경우는 어떨까. <조선일보>는 1920년 창간한 이후 1924년경부터 독자의 문예 작품을 모집했다. 특히 ‘신춘문예’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1926년의 신문 광고와 ‘현상 모집’이라는 명칭 아래 나온 1924년의 광고를 비교해 볼 때 1924년의 모집 요강이 훨씬 정밀하고 세부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신춘문예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이 결과 <조선일보>의 경우 1926년에 와서야 비로소 신춘문예라는 명칭이 사용되는데 당시의 행사 주최자들에게는 ‘신년 문예’나 ‘신춘문예’ 혹은 ‘신년 문예 모집’ 등의 명칭이 아무런 차이 없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1924년경부터 <동아일보>를 필두로 하여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1930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신춘문예’라는 명칭 아래 독자들의 문예물들을 모집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을 경과하면서 이 제도가 하나의 구조로 독자나 편집자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1935년을 지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그리고 독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신춘문예라는 틀이 받아들여지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등장한 신춘문예라는 제도에 대한 관심은 놀라운 것이었다. <조선일보> 심사평을 통해 정리한 자료를 보면 1935년 2,300여 명에 달하던 응모자 숫자가 1939년에는 5,300여 명에 이른다. 이 사실은 근대 문학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지닌 독자층이 그만큼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37년 당시 <매일신보>를 제외한 민간지의 총 발행 부수가 약 13만부이며 이 중 <조선일보>가 약 56% 정도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독자 중 5.2%에 해당하는 응모자가 신춘문예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현상을 보였다는 사실은 단순 통계 수치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변화를 통해 볼 때 신춘문예 심사과정 및 작품 선발 기준 등에 대한 공개(이 모든 과정에 대한 공개는 당선작품에 대한 발표와 동시에 신문의 같은 지면을 통해 연재되었다)는 행사 주최 측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해당 행사가 지닌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유력한 선전 방식으로도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초기의 시행착오를 정비한 신춘문예라는 제도는 독자 문예 현상 모집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되고 차츰 문인 재생산 과정에 있어 핵심적인 구조로 부상했다. 1935년을 지나면서 이제 신춘문예의 지위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것이 된다. 내부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심사가 진행된 후 그 결과가 공개됨으로써 입사 제도로서의 신춘문예의 안정성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신춘문예의 정착 과정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이 제도가 전국적 단위의 언론 기관인 신문사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규모와 동시성, 그리고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신춘문예는 여타의 문인 재생산 구조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를 주관하는 신문사의 경우에도 이 제도를 운영함으로써 최소의 비용을 통해 자사의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역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와 같은 경로를 거쳐 자리 잡은 신춘문예라는 괴물은 195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 문단에서 빠뜨릴 수 없는 존재로 자리매김 된다. 글의 처음에 밝혔던 것처럼 의례히 때가 되면 당연히 그 과정이 반복되고, 또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 보았을 “신춘문예 1등”이라는 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신춘문예라는 물질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왔다.
이렇게 한국 문단에서 누락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한 신춘문예가 2014년, 이제는 어떠한가. 사실 이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가 몹시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는 문학을 자체로서 자족적이고 완결적인 구성물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오히려 문학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문화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이란 사회의 변화, 그 가운데서도 언론의 변화 양상과 연관성이 깊은 것은 아닐까. 나아가 문학 자체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문학을 생산하는 문인들 역시 사회와 언론의 영향 아래 놓여 있으며, 언론을 통해 문인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과정 역시 문인 개개인의 상상력의 결과물인 작품의 완성도뿐만이 아니라 언론사의 내외적 환경의 변화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는 없을까.
한편 앞서도 몇 차례 지적한 것처럼 근대의 문학을 전대의 독물(讀物)과 구별할 수 있는 근거 가운데 하나는 대중적 언론 매체와의 관계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미디어를 통해 형성된 공공성과 공공 영역에 대한 인식이 개인에 대한 성찰과 조우함으로써 근대 문학이 정초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춘문예 역시 20세기 한국 상황 아래서 발생하고 정착했으며 성장한 특수자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그것은 원래부터 있어왔던 자연스러운 그 무엇으로 간주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되는 신춘문예 역시 어느 시점엔가는 특정한 목적으로 도입된 ‘인위적인 것’이며 상이한 방식과 유사한 내용을 지닌 다른 제도나 절차와의 치열한 경쟁 관계를 거치면서 생존에 성공한 시스템이다.
때문에 현재에도 신춘문예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면 그 제도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무결점의 제도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즉, 1935년에 정립된 이 제도와 틀이 2000년대의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틀 혹은 제도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 혹은 어떤 발전의 경로를 모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이 글을 통해서 이야기하기는 무리이며 그에 대한 논의나 혹은 입장의 정립은 다른 글을 통해서 다루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러운 무엇으로 수용되는 신춘문예라는 제도가 사실은 많은 시행착오와 20세기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낳은 ‘물건’이라는 점만큼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김석봉
서울대 인문대 국어국문학부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한국 현대문학의 현장>(2011), <신소설의 대중성 연구>(2005) 등이 있으며 주요논문으로 「식민지 시기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제도화 양상 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