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강이 나눈 파리의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

2009-04-04     남종영

파리가 태어난 건 기원전 3세기경이다. 켈트족의 한 지파인 파리시족이 센강 시테섬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로써 2천 년 동안 영속한 유럽의 중심이 시작됐다. 켈트족과 로마제국과의 전투, 바이킹의 침공, 백년전쟁, 제2차 세계대전 나치의 점령까지 ‘빛의 도시’ 파리는 항상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2천 년 넘게 파리지앵들이 한 거라곤 사랑과 혁명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파리는 세월을 허송하기에 좋은 곳이다. 파리의 거리들, 광장들, 골목들, 묘지들, 카페들에는 하나같이 파리에서 세월을 허송한 사람들의 자취가 배어 있다. 세월을 허송했지만 그것은 혁명을 준비하고 예술적 감성을 충전하는 계기가 됐다. 파리는 기념품을 만들거나 표지판을 세워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굳이 기리지 않는다. 그랬다면 파리의 진정한 매력은 떨어질 것이다. 파리에서는 혁명가와 예술가의 자취를 아무렇지도 않게 공유하는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기리지 않아 더 매혹적인 거리

하지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자취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을 주도한 그는 1909년부터 1912년까지 파리에 살았다. 18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운동을 하다 시베리아로 유배된 레닌은 그곳까지 동행한 크룹스카야와 결혼했다. 유형에서 돌아온 레닌은 최초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를 창간하고,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을 목도하고 연이은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 닿은 곳이 파리다.
“우리는 해외 망명 생활 중 파리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일리치는 늘 당시를 깊은 회한에 빠져 돌이키고는 했다. ‘도대체 어떤 악마가 우리를 파리에 가도록 만들었을까!’ 하고.” 크룹스카야는 그의 책 <레닌의 추억>에서 파리 생활의 회고를 이와 같은 내용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좀더 들어보면, 레닌의 파리 생활은 어느 때보다 한적하고 평화로웠던 것 같다.
레닌의 생활은 도서관과 카페로 이뤄졌다. 낮에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다녔다. 어느 날인가는 레닌이 자전거를 도둑맞았다고 크룹스카야는 썼다. 국립도서관 옆집 계단에 세워둔 자전거를 지켜주는 대가로 여자 수위에게 얼마간의 돈을 줬는데 없어진 것이다. 레닌은 여자 수위에게 따졌지만 그녀는 자릿세일 뿐이라고 도리어 화냈다고 레닌은 불평했다. 1909년 가을엔 마리로즈 거리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방 두 개와 부엌이 있는 단출한 집이었다. 레닌은 아침 8시에 일어나 국립도서관에 가서 오후 2시에 돌아왔다. 밤늦게까지 몽파르나스의 카페에 앉아 있곤 했다.
마리로즈 거리의 레닌의 집을 찾아갔다. 100년이 지났지만, 건물은 그대로였다. 다만 건물 앞에 경차들이 주차돼 있고, 도미노피자의 빨간 오토바이가 정적을 깨뜨리며 달려가는, 집을 둘러싼 풍경이 바뀌었을 뿐이다. 하지만 레닌이 마리로즈 4번지에 살았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도시 생활에 바쁜 이웃 사람들도 아마 모를 것이다.
프랑스공산당은 2007년 레닌의 집을 내놓았다. 그때까지 레닌을 기리는 소형 박물관이었다. 옛 소련 시절만 해도 파리를 방문한 공산당 서기장들은 ‘국립묘지 방문’하듯 이곳을 종종 들렀고, 가장 최근에는 고르바초프가 이곳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재정난에 허덕인 프랑스공산당은 고민 끝에 집을 내놓았다. ‘1909년 7월부터 1912년 6월까지 레닌, 이곳에 살다’는 안내판마저 그때 뜯겼다.
 레닌의 혁명 동지였던 트로츠키도 레닌의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살았다. 트로츠키의 집 주소는 다게르 거리 22번지다. 지금은 신선한 청과물과 수산물이 거래되는 시장 골목이다. 일반인이라면 한때 트로츠키가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없다. 그의 하숙집은 지금 아시아 음식점 맞은편의 4층 호텔일 뿐이다. 

‘레닌의 추억’ 마리로즈 4번지

레닌·트로츠키 등 러시아에서 망명한 혁명동지들은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회합을 하곤 했다. 몽파르나스는 당시 파리의 신시가지였다. 바뱅역 교차로의 카페 르 돔, 라 로통드가 이들의 아지트였다.
파리의 카페는 20세기 초반 지식인들의 영감의 샘터였다. 특히 좌파 지식인들과 아방가르드적 진취성을 가진 예술가들에게 카페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레닌과 트로츠키 외에도 사르트르, 샤갈, 모딜리아니, 피카소, 헤밍웨이, 장 콕토도 몽파르나스의 카페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물론 파리 카페의 가장 큰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나치는 파리를 점령했다. 공포정치 속에서 카페에서 샘솟는 자유와 혁명 그리고 아방가르드는 사라질 줄 알았다. 나치의 군인장교들도 카페를 들락거렸다. 하지만 카페 드 플로르에 군인이 들어오면 카페에 앉아 있던 파리의 지식인들은 일순간 말을 멈추었다고 한다. 일종의 침묵 시위였는데, 군인들은 끝내 카페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났다. 군인들이 나가자 지식인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파리를 거친 지식인들의 영원한 표지석으로 남은 곳이 묘지다. 페르 라셰즈 묘지와 몽파르나스 그리고 몽마르트르 묘지는 파리의 3대 묘지로 불리는 곳이다. 특히 페르 라셰즈 묘지는 좌파 지식인들의 위인열전이라고 불릴 정도다.
1871년 3월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코뮌을 수립했다. 파리코뮌은 무상 교육, 야간노동 폐지, 주택 임대료 면제, 교육에서 종교적 요소 제거 등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두 달뿐이었다. 5월21일 파리를 포위하고 있던 마르세유군이 파리에 진격했다. 총 한 번 잡아보지 않은 시민군은 중과부적이었다. 시민군은 멜빌 구역에 마지막 바리케이드를 쳤다. 언론인 장 바티스트 클레망도 거기 있었다. 바리케이드 안에는 스무 살의 앳된 처녀 루이즈가 있었다. 간호사로서 부상병을 돌보던 루이즈에게 클레망이 말했다. “곧 바리케이드가 무너질 것이오. 당신은 너무 어려요.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 하지만 루이즈는 클레망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르세유군은 주검을 넘어 진격했다. 최후의 코뮌 전사 147명은 페르 라셰즈로 끌려와 전원 사살됐다. 루이즈도 어디에선가 사라졌다. 클레망은 루이즈를 그리워하며 ‘체리의 계절’이라는 시를 지었다. 붉은 체리꽃 피는 5월에 코뮌 전사들의 핏빛 죽음을 추모하는 내용이었다. 장 바티스트 클레망의 무덤 건너편에는 코뮌 전사의 벽이 서 있다. 최후의 전사 147명이 즉결 처분된 담장이다.

사랑과 혁명의 혼이 깃든 묘지

페르 라셰즈에는 귀족을 풍자한 만평 화가 오노레 도미에, 공산주의자이자 초현실주의자 시인 폴 엘뤼아르, 사회주의자들의 애국가 <인터내셔널가>를 지은 외젠 포티에의 무덤이 있다. 발자크, 오스카 와일드, 이사도라 덩컨,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도 잠들어 있다.
몽파르나스 묘지도 만만치 않은 위인열전이다. 철학자 사르트르, 마녀사냥의 희생양 드레퓌스, 공상적 사회주의자 프루동, 사진가 맨 레이 등. 센강 건너 몽마르트르 묘지에는 에밀 졸라와 알렉상드르 뒤마, 스탕달이 묻혀 있다. 파리의 묘지에 잠든 위인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다. 사진가 맨 레이 묘비에 적혀 있듯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글 사진•남종영
fandg@hani.co.kr, <한겨레>의 esc팀 기자로 활동했으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담은 글을 즐겨 쓰고 있다.

헤밍웨이와 카뮈가 드나들던 그 까카페

19세기 중엽까지 파리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아지트는 몽마르트르 지역이었다. 20세기 들어 판도가 바뀌게 된다. 센강 건너 몽파르나스 지구가 신주거지로 개발됐기 때문이다. 이곳의 카페들은 몽마르트르를 서성이던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100년 역사를 가진 파리의 카페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생제르맹 거리의 레 되 마고, 카페 드 플로르 그리고 몽파르나스 거리의 카페 르 돔과 카페 로통드다.
레 되 마고는 1885년 문을 열었다. 우리말로 ‘두 명의 마고 인형’ 정도로 해석되는데, 현관 앞에 마고상이 걸려 있다. 사르트르, 헤밍웨이, 피카소, 앙드레 브르통이 사랑한 카페다. 카페 드 플로르는 꽃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 플로르의 이름을 땄다. 생텍쥐페리, 카뮈 등이 드나들었다. 두 카페는 나란히 붙어 있고, 지금까지도 100년의 라이벌이다.
 카페 르 돔과 카페 라 로통드는 몽파르나스 거리 바뱅역 교차로에 있다. 두 카페는 1920~30년대 전성기를 맞은 에콜 드 파리의 본거지였다. 피카소를 포함해 모딜리아니, 레제, 수틴 등이 몽파르나스의 카페를 드나들었다. 가난한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그려 술값 대신 줬다고 한다. 그는 술과 마약에 찌들어 1920년 숨졌다. 그의 그림에서 긴 얼굴로 등장했던 아내 잔도 이튿날 자신의 집 6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이들 카페에는 명사들이 과거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아련한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그들의 파리 시절을 기억한다면 이곳에서의 커피 맛은 더욱 새로울 것이다. 사실 유명세 탓에 이들 카페는 관광지가 됐다. 파리 주민이 반절, 관광객이 반절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