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광란함과 잔혹함
세계에서 도시화가 가장 진전된 지역인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괴물도시들의 출현이 두드러진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에 거주한 적이 있는 작가 마티아스 브레인이 증언한다.
상황에 따라서 너는 벌거벗고 있거나 입고 있겠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태양의 눈을 가진 너. 때로는 불타기도 하고. 그것들을 바라볼 줄을 알아야 할 테지만. 에로티즘이란 옷을 어떻게 걸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지. 넌 끊임없이 옷을 벗거나 또 입거나 하겠지. 하지만 말해봐야 소용없겠지. 내가 너의 관능성을 알아보는 건 너의 습관, 나의 향수, 너의 우울, 너의 얕은 여울, 파헤쳐진 보도, 아름다운 동네들, 격자모양의 건물들, 너의 울창한 가로수들, 너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라는 걸 말이다. 화려한 너는 혼란스럽고 지겨운 술책으로 침울해져버렸다. 단절과 불균형, 변두리와 재생지. 지방의 원시적인 풍요로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모든 걸 결정하는 유럽인인 나는 발코니에서부터 너를 바라본다. 발코니 역시 홍수에 젖어있다. 불은 꺼져 있다. 오고가는 사람들, 살롱과 방들, 광란의 도시는 눈을 잠들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처럼 열광하는 도시에서 굳이 잠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23시에 다니엘 베로 네스의 연극을 관람할 수 있고 자정하고도 반에 다니엘 피피 피아졸라의 콘서트를 들을 수도 있다. 나는 몇 번이나 동네를 옮겨 다녔다. 네가 가진 매력들이 나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나는 겨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창녀의 값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식민지 시대에 지은 오래된 집들에 살았다. 집은 오래되었지만 정신은 새로웠다. 거리에는 물이 격류를 이루며 큰 도로 쪽으로 흘러갔다. 낮에는 수십 만 명의 행인들이 동시에 걸어가고 밤에는 어느 정도 시각이 되기까지는 수만 명 정도가 걷는다. 지금처럼 비가 내릴 때는 몇 십 명 정도가 걸어간다. 도대체 이 도시에서는 하루에 몇 사람이나 걸어갈까? 한번은 밤새 문을 여는 바의 종업원에게 물어보았었다. 브레인 시티는 수백 만 명이 걸어 다닌다. 모두가 그 모두가 너와 교제하고 있다.
너는 아느냐? 너는 도무지 너무나 크고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그러한 도시는 결코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내 나라보다 세 배나 인구가 많은 너의 나라 인구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너의 지붕 아래 살고 있다. 좋다. 그런데 그것은 틀렸다. 넌 잘 알고 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더구나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아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가 틀렸다. 너의 문학, 너의 예술, 너의 극, 너의 사진의 모든 작가들이 만들어낸 인물들 또한 너의 집에 살고 있다. 너는 믿겠느냐? 라울 스칼라브리니 오르티즈가 이미 1930년대에 이 소설을 발표했지만 너의 코리엔테스 대로와 에스메랄다 스트리트, 미크로 센트로 광장의 모퉁이에서 홀로 기다리던 남자는 아직 거기에 없다는 것을. 너는 믿을 수 있느냐?
좀 더 계속할까? 왜 전부 다 쓰게 내버려 두지 않지 너는. 너는 나에게 많은 활력을 주었는데 나는 너에게 무얼 주었단 말이지? 왜 너는 나를 이렇게 붙잡는 것이냐? 네가 낮잠을 잘 때 너의 몇몇 거리는 한산하다. 너는 마을의 대기를 맘껏 호흡한다. 나는 그 시간에 외출하기를 좋아한다. 덥다. 하지만 네가 나에게 있을 때는 밤과 같다. 너의 얼굴은 전혀 다른 것이 되고 수많은 기호와 상징들과 만남으로 가득하다. 너의 머리는 너의 혈관 조직을 그리고 기둥 역할을 할 심리학자와 시인들로 넘쳐난다. 때로는 편두통을 앓는 브레인 시티, 때로는 빛나는 브레인 시티, 벽력같은 소리로 반복되는 시대의 극. 그 극의 유물은 기억이라 명명된 또 다른 후미진 곳이 그것을 다시 끄집어 낼 때까지는, 터부라 명명된 너의 머리 후미진 곳에 응고되어 있다. 넌 너를 기억할 힘이 있고 너의 어두운 그늘은 기억의 또 다른 장이 된다.
내가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만성적 두통을 앓고 있었다. 고의로 들으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필요 이상으로 들으려고 한 머리를 가졌었다. 수 km가 넘게 긴 너의 몇몇 거리들이 너를 가로지르고 있다. 리바다비아 에브뉴는 30km의 길이로 세계에서 가장 길이가 긴 거리 중 하나다. 그 거리를 가자면 계속 구역을 바꾸게 된다. 너의 그 복잡성이 맘에 든다. 예전에 팜파는 디바가 되었었다. 너의 얼굴은 전통과 현대 사이에 존재한다. 나는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시대를 여행하고 그 느낌을 호흡한다. 서사시의 형태로 내가 접한 너의 첫 번째 고전은 <포로>였다. 그런데 그것은 팜파 위에서 전개된 것이 아니었던가? 같은 작가인 에스테반 에체베리아가 19세기 전반기에 남긴, 그 후속 작품인 너의 나라의 첫 번째 소설 <도살장> 역시 역사의 격변에 따라 너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던가?
나에게는 도무지 처음부터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성이 깃든 너의 육체를 몰아낼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비록 떨어져 있지만 아직 너의 품속에 있다. 낚시 바늘이 온힘을 다해서 강하게 나를 끌어당긴다.
글·마티아스 브레인 Matias Breyne
작가 겸 전문 번역가. <시대와 더불어 죽다(Mourir avec son temps)> 등의 저자
번역·이진홍
파리 7대학 불문학 박사, <진보와 그의 적들><자살> 등 저·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