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고용을 창출하지 않는다

부질없는 ‘책임 협약’

2014-03-01     프레데리크 로르동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발표한 ‘책임 협약’(1)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전문가는 정부가 신자유주의로 가는 커브길에 진입했다고 해석하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이를 커브길로 보기 위해서는 발효주를 지나치게 과음해서 모든 길이 꾸불꾸불하게 보일 정도로 취한 상태여야 가능하다. 과음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오히려 장 피에르 라파랭 전 총리가 재직 당시에 남긴 재미있는 어록 중 하나인 “길이 직선도로인 데다가 경사까지 매우 가파르다(게다가 브레이크도 고장 났다)”를 떠오르게 했다.(2) 실제로 올랑드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이래 끊임없이 주장해왔던 논리의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이번 발표 역시 올랑드 대통령 정부의 논리를 강하게 뒷받침해줄 뿐이다.

하지만 빈약한 논리는 절망과 포기의 전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이데올로기의 왜곡은 공황 상태로 인한 계산 오류와 뒤섞여 버렸다. 형편없는 유럽정책을 재정립해보려는 모든 의지를 포기해버려 재개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고 파멸의 늪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제 남은 마지막 수단은 메두사의 뗏목뿐이었다. 즉 ‘기업’은 최후의 구세주로, 프랑스 경제인 연합회(Medef)는 마지막 구원의 손길이라고 믿었다. 침몰하기 직전에 떠오른 기발한 발상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기업을 신뢰하는 것이다.”(3) 이 얼마나 훌륭한 발상인가. 기업을 신뢰하다니…. 인질범에게 잡힌 인질이 그의 품에 뛰어들며 그를 신뢰한다는 셈이다. 사랑의 손길에 감동한 인질범이 틀림없이 연민의 정을 느껴 그도 더 이상 몸값을 요구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에 가득 차서 말이다.

 우리의 ‘인질극’ 이야기에 분노한 논설위원 집단이 다 같이 화합해서 주장했던 것과 반대로 이 이야기는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고 오히려 최대한 정확하게 분석되었다는 지지를 받아야 한다. 직선을 ‘커브’로 보이게 하는 지각의 왜곡과 마찬가지의 또 다른 왜곡을 통해 철도 종사원이나 우체국 직원, 도로 청소부를 비롯해 자신이 목표가 된 반복적인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모든 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인질극’을 보게 된다. 실제로 자본은 모든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에드거 앨런 포우의 소설 속 도둑맞은 편지(4)처럼 명백하고 거대한 자본의 인질극은 너무 명백하고 거대한 나머지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미 칼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의 인생 자체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 노동 분업으로 이루어진 화폐경제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서는 삶의 재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고용주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힘들게라도 사회보장제도를 쟁취하지 못했더라면 자본주의 노동의 심오한 논리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자본은 개인들의 삶을 개별적으로뿐만 아니라 그들 집단의 삶까지 인질로 삼는다. 보통 이 개인의 삶 자체도 정치의 대상이 된다. 물질적·개인적·집단적 재생산은 자본축적의 논리를 따른다는 것이 자본이 벌이는 인질극의 주요 원리다. 그리고 삶을 재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 생산은 이익이 되는 상품화 논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도록 결정되고 자본주의자라 불리는 경제 주체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부차적인 원리는 자본이 누리는 결정권 능력이다.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의 지출이나 투자 비용, 채용 비용 결정에 자금을 조달해주는 현금 투자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자본의 전체적인 결정에 의해 개인이 재생산의 수단-급여-를 마련할 수 있는 환경이 정해진다. 생산주기에 대한 추진력을 가진 이 결정권 능력 덕분에 사회전체 구조에서 자본은 전략적인 위치 즉, 인질범의 지위를 부여 받고 나머지 사회 구성요소는 자본의 명령과 열의에 복종을 맹세하게 된다.

자본은 자신의 요구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투자 파업을 벌인다. ‘파업’은 일반 논설위원의 두 신경세포 속에 습관적으로 ‘인질극’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아닌가. 따라서 한발자국만 뒤로 물러서 보면 1980년대 중반 정부로부터의 해고 승인취득 조항 폐지부터 업종 간 국민합의(ANI)의 악덕 조항들과 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 스톡옵션의 면세 혜택, 정규직(CDI)의 권리 침해, 일요일 노동(5) 등 인질극의 효과를 더 쉽게 헤아릴 수 있다. 강압적으로 자본의 약탈을 억제하기 위해서 자본의 힘과 동급이지만 방향이 다른, 또 다른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이런 노략질은 끊이지 않는 운명임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인 것은 아마 올랑드 대통령과 고문들이 세운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쓸모없는 전략일 것이다. 프랑스 경제인 연합회식 관점에 완전히 점령당한 이들의 사고에서 비롯된 전략은 모든 머릿속에 박혀 곳곳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단호하고 구체적인 신자유주의의 발언에 오로지 기원을 두고 있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기업들이다.” 신자유주의의 급소인 이 발언을 뒤집어 보면 우리는 자본이 벌이는 인질극의 탈출구로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기업들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는다.’ 지난 20년간 그 자체로 쉽게 입증되었던 것처럼 이 문장은 결코 경험론적으로 해석되어선 안 된다. 개념적으로 바르게 해석하면 ‘기업들은 일자리를 하나도 창출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일자리는 기업들이 창출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기업들은 자신들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스스로 창출할 방법이 전혀 없다. 일자리는 외부 요인 즉, 기업의 고객인 가계나 다른 기업들의 소비의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기업들은 매출 평가를 통해 일자리를 제공할 뿐 스스로 결정할 능력은 없다.

 놀랍게도 프랑스 중소기업연맹(CGPME) 회장인 장 프랑수아 루보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충격적인 진실을 폭로해버리고 말았다. 바로 ‘보상’에 대한 논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협약’이 결론 내려지기 전 시간의 여유가 없을 때는 고용주는 시장의 논리를 바탕으로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 판단하지만 당연하게도 시간의 여유가 주어지자 갑자기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보 같은 루보 회장은 어처구니없게도 예고 없이, 하지만 조금의 악의도 없이 본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기업들은 협약의 대가로 채용을 늘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래도 기업들의 수주가 확대되어야…”라며 순진하게 대답한 것이다.(6) 루보 회장의 말이 맞다. 기업들이 스스로 수주를 늘릴 수 있었다면 자본주의라는 게임은 전혀 뜻하지 않게 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기업들이 달성한 수주실적은 주변 요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거시경제학이 응집된 단계에서 전혀 다른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수주실적은 고객의 소비력에 의해서만 좌우되며 또 이 소비력 자체도 오로지 고객의 수주실적(7)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하 마찬가지로 높은 상관성 속에서 되풀이 되어 유동하는 것이 경제순환의 매력이다.

 기업 간 경쟁을 통해 변동되는 수주 실적 달성은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루보 회장이 정확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기업 각각의 개별적인 소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거시경제 과정의 지배를 받는다. 기업들은 수주실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떠한 일자리도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여되거나 그들이 예측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일자리로 전환시키는 것뿐이다. 이렇게 고용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우리는 기업가의 최고 권력보다 앞선 창조력을 봄으로써 단순히 외부 수요에 대응하는 전적으로 타율적인 공급의 역학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기업들은 서로 구별되며, 다른 기업들보다 가격을 낮추고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는 일부 기업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결국엔 총수요를 놓고 기업들 간의 분배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또한 총수요는 거시경제의 가변적인 소득에 의해 한정된다. 내부 소득의 한계를 뛰어넘어 수요의 잉여분을 찾으러 외부로 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논거의 핵심이 바뀌지는 않는다. 국내 시장과 마찬가지로 수출 시장에서도 기업들은 구조상 개별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수주를 기록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수주를 고용으로 전환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거기에도 고용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그런 유형의 ‘창출하는’ 행위는 찾아볼 수 없다. 기업가와 기업들은 어쨌든 고용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창출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안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 많은 소득과 수주를 끌어 모으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고용은 경제 상황, 즉 경기가 창출

  결국 기업은 ‘고용 창출’에 대한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업의 과도한 모든 요구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기업은 가진 능력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고용이 기업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창출하는 것이며 우리는 누구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 고용 창출의 ‘주체’를 사람에서 찾으면 안 된다고 대답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주체는 비주체, 더 쉽게 말하면 고용 창출은 주체가 없는 과정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그 과정을 알기 쉬운 다른 말로는 경제 상황, 즉 경기(景氣)-영웅의 등장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꽤 실망스러운 답변일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경기는 총체적인 사회 구조를 이루며 이를 통해 소득과 총수요, 생산 등이 동시에 일어난다. 경기는 절약보다는 소비하려는 가계의 결정, 투자를 진행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기업의 결정과 같이 무수히 다양한 개별적인 결정들이 합쳐진 고정 불변의 종합체다. 자유주의를 영웅화시키는 사고에는 비극이겠지만 객관적인 과정에 주목할 줄 아는 지적인 현명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매우 구체적으로 경기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가능하다. 경기는 어느 정도 스스로 조정 당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경제정세를 중심으로 우리가 말하는 거시경제 정책이 세워진다. 하지만 유럽의 강압에 결박된 ‘사회주의’ 정부는 모든 생각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이제 다 함께 기업가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라는 비탈길로 굴러 떨어지는 일만 남은 프랑스 정부는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 기업이라면 그 기업에 관대해야 한다’는 강력한 추론을 이끌어냈다. 

앞으로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순식간에 깊숙이 스며들어 흔해빠진 논설위원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에 대한 매우 독특한 관점에서 비롯된 명백한 모든 오류가 정치적 담화에서 거의 사라지기 시작하고 이 오류에 의해 작동하는 무의식적인 사고가 정지하면 정치 상황은 전보다 조금 더 이성적으로 개선될 것이다.

 기업들이 일자리를 창출하지는 않는다. 기업들은 경기 상황에 의해 결정된 일자리를 ‘선택’할 뿐이다. 우리가 고용을 원한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상은 경제상황이지 기업이 아니다. 하지만 이 논리를 ‘사회주의자들’의 머리에 인식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은 상징적으로 정치적 전향을 시켜 사회당을 좌파로 간주한 것, 그리고 매우 경솔하게 사회당에 좌파를 맡겼던 분별력 없는 관습을 버려야 한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그 공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당은 우파다. 하지만 소심한 우파다. 하지만 사회당이 지금의 노선을 계속 유지한다면 정확하게 남아 있는 열등감이 무엇인지 조만간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경제학자. 최근 저서로는 <결함. 유럽통화와 민주주의 지배력>, (Les Liens qui libèrent, 파리, 2014년(3월 26일 발간 예정))이 있다.

번역·배영미 petite0222@hotmail.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