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건축
러시아 아방가르드 건축물들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황폐한 상태로 버려지거나 철거될 위험에 처해 있다. 오늘날 러시아 엘리트들은 소비에트 초창기에 세워진 이 건물들에 구현된, 사회 변화를 향한 열망, 실험 정신, 소외 계층을 도우려는 의지 등의 가치가 부활할 것을 염려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넵스키 대로(1)와 화려한 주택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겨울 궁전에서 몇 킬로미터만 벗어나면 황량한 공업지대가 나타난다. 공산주의 시절에 지어진 공장들이 버려진 채 남아있는 곳이다. 경첩이 빠진 철문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거리를 배회하던 들개들이 오랜만의 인기척에 맹렬히 짖어댄다. 길가에 버려둔 낡은 라다 자동차 주위로 아스팔트 틈새로 자라난 잡초들이 무성하다.
녹슨 굴뚝들 사이로 특이한 구조물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오래 전부터 사용되지 않는 ‘붉은 못’ 압연 공장의 급수탑이다. 흉한 몰골임에도 일말의 자부심 같은 것이 남아있다. 1930년 지어진 건물 표면 곳곳에 길게 금이 가 있다. 회반죽이 벗겨진 자리마다 부식된 벽돌의 알몸이 드러나 있다. 꼭대기의 깨진 창문을 막아놓은 나무판자 중 하나가 부서져있다. 마치 키클롭스(그리스 신화의 외눈박이 거신-역주)가 허공을 향해 죽은 외눈을 치켜뜨고 있는 형상이다.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지치고 힘없는 괴물 같다.
얼핏 봐서는 소비에트 연방 초창기에 세워진 이 건물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다.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건물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그 장식 없는 표면, 단순한 선과 동그란 형태들을 고안하고 조합한 이는 바로 위대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건축가 야코프 체르니코프다.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당시 시각예술의 중요한 주제였던 기하학적 오브제의 미학적 배치라는 원칙을 우아한 형태로 작품화하는데 성공했다.
그 건물의 미학적 가치를 발견한 순간 마치 키클롭스의 어두운 눈구멍 속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듯 했다. 건축가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그 관념들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다는 신호일까?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역사박물관 연구 책임자 마리아 마코고노바는 “붉은 못 압연공장 급수탑은 체르니코프의 걸작이자 구성주의 건축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는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건축 전문가로서 이 주제에 대해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조교가 방금 내려놓고 간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연구실을 가득 채운 서류와 책들이 보인다.
마코고노바가 설명을 계속한다. “1925~32년의 짧은 시기 동안 이런 종류의 건축이 전성기를 구가하며 자유롭게 발전했다. 사회적 실험과 삶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에 개방적이었던 시대다. 이런 분위기가 소비에트 연방 초창기를 지배했다. 매우 이상주의적이었던 건축가들은 사회적 기획이 반영된 건물을 설계했다. 그들은 혁명에 대한 약속,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약속을 실현하고자 했다.” 아직 남아 있는 건물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극적인 사건들 속에 숨어있는 낙관주의와 에너지를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도 혁명 이후의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정확히 예견하지 못했다. 누구도 급진적으로 변화한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는 건물을 설계하고 시공해본 경험이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통째로 다시 사고해야만 했다.
건축가들은 노동자 클럽, 학교, 국영 백화점, 집단 거주시설, 새 정부를 위한 사무실, 노동자를 위한 체육시설, 산업화를 향한 사회주의적 열망을 실현시켜 줄 공장과 발전소, 흑해 연안의 휴양지와 요양소, 여성의 가사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거대한 공동 주방과 세탁 시설 등의 건설에 착수했다.
때로 구성주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했던 건축가들은 장식과 문양을 부르주아적 데카당스로 간주하고 거부했다. 건물의 형태는 기능을 표현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바실리 칸딘스키, 카지미르 말레비치 등의 동시대 화가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 그들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여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조합해 나갔다. 체르니코프 외에도 콘스탄틴 멜니코프, 모이세이 긴즈부르크, 베스닌 형제(알렉산드르, 레오니드, 빅토르) 등 다수의 선구적 건축가들이 혁신에 동참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아직 외부세계의 영향을 차단하기 전인 1920년대는 서유럽과 미국과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시기다. 스테판 즈바이크, 노르달 그리그, 버트런드 러셀, 발터 베냐민, 아서 쾨슬러, 조지 버나드 쇼 등 많은 서구 지식인들이 현실화된 사회주의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와 에리히 멘델죤 역시 “혁명의 건설”(2)에 참여하도록 요청받았다. 이런 식으로 서구 건축가와 소비에트 연방 건축가 사이에 활발한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졌다.
마코고노바는 그 결과물 중에서 멘델죤의 작품을 최고로 꼽는다. 1926년 그의 설계에 따라 세워진 붉은 깃발 섬유 공장은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제국 궁전 양식과 완전히 결별한 형태를 보여준다. 중앙의 웅장한 발전설비는 산업단지 전체에 전기를 공급한다. 둥근 기하학적 형태의 이 부분은 마치 예인선처럼 강력한 힘을 뽐내며 주 건물을 앞에서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인다. 건물 측면에 거의 중앙 홀의 천정높이까지 수직으로 좁게 뚫린 창들이 성당 같은 분위기를 한층 강화시킨다. 오늘날 이 멘델죤의 걸작은 황폐한 상태로 버려져 있다. 붕괴 위험 때문에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부속 건물은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그 옆에는 폐차들이 가득 쌓여 있다.
한 지역 전체가 구성주의 형식으로 건설된 상트페트르부르크의 나르프스카야 자스타바에는 뛰어난 건축가들의 선구적인 작품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러나 대부분 멘델죤의 작품과 비슷한 운명에 처해있다. 거주 구역의 3층 주택들은 뒷마당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어주는 우아한 아치들로 연결되어 있다. 트락토르나야 거리를 따라 걸으면 과거 공산주의 시절의 아름다운 노동자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1925~27년 사이에 건설된 주택들로 현재도 주민들이 살고 있다. 좀 더 멀리 투르비나야 거리와 오보로나야 거리가 만나는 곳에는 한때 공장이었던 듯 보이는 건물이 남아있다. 갈라지고 구멍 난 배수관이 칠이 벗겨진 벽에 쓸모없이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1920년대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이 노동자 거주 지역에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니콜스키, 알렉산드르 제젤로 등의 건축가들이 스타디움, 문화궁전, 노동자 식당, 학교, 백화점 등의 설계를 맡았다. 오늘날 이 건물들은 일부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상당수가 아직 남아있다.
이 몇 년간 새로운 건축 양식의 발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등과 같은 소련의 주요 도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혁신적 건축가들의 에너지와 창의적 열정은 우랄 산맥을 넘어 다른 도시들까지 확산되었다. 구성주의 건축은 러시아 이외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 우크라이나와 광대한 소비에트 제국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바쿠(현 아제르바이젠 수도)에도 구성주의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진 후 이 건물들은 무관심 속에 비참한 몰골로 버려져 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걸쳐 이 지역들을 여행한 사진가 리처드 페어의 탁월한 작품들이 현 상황을 증언한다. 앞에서 언급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역들을 방문해본 이들이라면 모두들 사태의 심각성에 동의할 것이다. 소유주가 국가이든 개인이든, 이곳의 구성주의 양식 건물들 대부분은 거의 혹은 전혀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건물들에 대한 철거 위협이다. 이미 3분의1 가량이 사라졌다. 마코고노바가 마우스를 클릭할 때마다 “불도저로 밀어버린 곳들”의 사진이 컴퓨터 화면에 차례로 나타난다. 이렇게 철거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방가르드 건축 유산들은 이제 그의 컴퓨터 하드 디스크 속에 파일의 형태로만 보존되어 있는 셈이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안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 이중창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마코고노바는 이곳에서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건축 유산의 철거 위협에 맞서 싸우고 있다. 다행히 이 유산의 보존에 찬성하는 여론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건축가로 일하는 알렉산더 스트루가크(29)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무지와 무관심, 파괴를 부추기는 힘에 맞서 싸우고자 한다.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그는 ‘Sovarch.ru’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홍보와 정보 공유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는 이 양식의 재생과 건물의 보수를 위한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한다.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토론을 활성화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철거 위험에 처한 건물들을 둘러보는 투어도 진행 중이다. 스트루가크는 상당수 젊은 세대 건축가들이 아방가르드 정신의 독창성과 힘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러시아 건축뿐 아니라 외국의 건축에 미친 영향력을 헤아리고 있다고 말한다. 니콜라스 라도프스키와 같은 구성주의 건축가들은 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기도 한다.
마코고노바는 “많은 이들이 무관심과 파괴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건물주가 철거를 결정하면 경찰은 언제나 시(市)와 부동산 업자, 건물주 편을 든다. 싸움이 격렬해졌을 때 이들 마음대로 일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1930년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역시 아방가르드 건축에 대해 현재와 같은 경멸감을 보였다. 그는 구성주의 프로젝트를 중단시키고 보수적인 예술과 건축 양식만을 허가했다. 그가 구축한 독재체제와 아방가르드적 열망은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 러시아 당국은 건물 복원 의지를 천명하고 나섰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본래 건물을 완전히 철거한 후 그 자리에 비슷한 건물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복원’ 방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마코고노바는 “이런 방식은 정식 복원 과정보다 돈이 적게 들지만, 결과는 참혹하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는 주택 고급화의 물결이 덮치기 시작한 지역에 위치한 체르니코프의 급수탑 역시 이런 방식으로 복원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 건축물들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비싼 돈을 주고 외국의 전문가들을 모셔올 수밖에 없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시는 예산이 없거나 그런 일에 돈을 쓸 마음이 없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서쪽으로 150km 떨어진 핀란드 국경 지역에서 거둔 성공은 대안적인 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러시아와 핀란드의 단체들은 알바르 알토가 설계한 유명한 비푸리(현재의 비보르크) 도서관을 구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펼쳤다. 덕분에 1935년에 세워진 이 걸작은 현재 매우 엄격한 기준에 따라 복원 중이다.
러시아 지도자들이 건물 복원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다. 이 건물들 속에 잠재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사상들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종류의 작품들을 무시하거나 철거해버리고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차르 궁전들의 가치를 높이는 편을 택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헤비메탈 그룹 판테라는 <힘의 천박한 과시(A vulgar display of power)>라는 제목의 앨범을 발표했다. 관광객들의 환상을 만족시키는, 화려한 장식의 바로크와 네오클래식 양식의 궁전들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그러는 사이 변두리의 구성주의 건축물들은 유령 같은 몰골로 연명하고 있다. 비유적으로 혹은 문자 그대로,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유산은 중심에서 밀려난 침울한 지역에서 유령생활을 하고 있다.
러시아의 현 체제에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이념이 구현된 이 건축물들은 발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한 존재다. 급진적 해방 정치의 실현 가능성을 물리적으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잊고자 하는 욕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글·옌스 말링 Jens Malling
번역·정기헌
(1) 4.5km 길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로다.
(2) 동명의 책 제목에서 인용. Maria Ametov, <Building the Revolution. Soviet Art and Architecture, 1915~35>, Royal Academy of Arts, 런던,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