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공산주의'는 과연 공허한가

2014-03-03     김동국<추계예술대 강사>

슬라보예 지젝의 사상에 관한 이택광과 홍준기 간 ‘논박’이 본지 지면에서 지난해 10월 이후 4개월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두 지식인 간의 격한 논박은 지젝 철학에 대한 논쟁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유효성 논쟁으로 발전하여, 독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두 지식인 간의 지젝 논쟁에 더하여 적지 않은 독자들이 의견을 보내왔는데, 그 중 한 분의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나는 우선 이론과 실천의 문제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홍준기는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공산주의’가 실제적 내용이 없는 구호에 불과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 실천을 제시하고자 하는 사민주의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실천’에 대한 어떤 수동적 태도이다. 철학적 사유는 구체적 방법의 제시와는 구분되어야 하며, 이론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실천할지를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론과 실천에 대한 통속적 이분법을 극복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칸트의 ‘실천’에 대한 논의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윤리의 문제를 다룬다. 어째서 ‘실천’이라는 테제에 대해 ‘윤리’를 제시하는가. 그것은 ‘실천’이 주체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무엇이며, 자유로운 주체란 오직 윤리를 통해서만 그 존재가 입증되기 때문이다.

  누구도 내가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 가르쳐줄 수 없다

  따라서 칸트는 이론과 실천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이성(현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실천이성(도덕적 행위의 원리에 대한 인식)을 구분한다. 여기서 우리가 공산주의에 대한 사유와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후자일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가 어떤 사회 및 행위에 대한 주체의 의지를 전제하며, 그런 면에서 윤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논의되는 공산주의는 실증적 이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회 변혁의 직접적인 방법론은 결코 제시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해석과 변혁에 대해 말했지만 공산주의 사회를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듯이 말이다. 지젝이 지적하듯,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바로 지식인이 아니라 전문가이다. 전문가가 가진 과학적·실증적 인식은 객관적 현상에 대한 철저한 복종에서 이루어진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인간은 자연에 복종함으로써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와 같은 명제에서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실천이란 이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오직 주체의 자유를 전제해야 가능하다. 실천이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의 철학에서 실천을 위한 구체적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스스로 실천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역설적으로 결국 그들이 다른 곳에서 수없이 부정했던 도구적 이성이 여기서 새롭게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우스꽝스러운 비극이다. 실천을 요구하면서 가장 비실천적이 되는 것, 이것은 현재 시점에서 철학이 접한 가장 심각한 위기일 것이다. ‘지금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당장 답해줄 수 있는 철학이라면 그것은 이미 철학이 아니다.

 근본적인 비판이야말로 가장 실천적이다

 지젝은 공산주의가 하나의 이념이라고 말한다. 지젝은 부정하겠지만, 그 이념은 윤리적 이념일 것이다. 여기서는 윤리에 대한 통속적인 비판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 즉 좌파들이 흔히 윤리를 비판하며, 개인의 윤리적 결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중요하다는 견해를 반복할 때, 그들은 윤리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놓치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성을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도덕적 명령은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결단을 촉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명령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우리는 엄밀하게 사유해야 한다.

 우리가 인간성을 오직 수단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도 대할 수 있는 사회 속에 살지 않는 한, 어떤 윤리적 결단에 의해서도 그러한 윤리적 이념을 실천할 가능성은 없다. 칸트는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 사용을 구분한다. 이것은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칸트는 이성의 사적 사용을 개인이 자신이 맡은 시민적 직책 혹은 공직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성의 공적 사용은 학자로서 전체 대중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경우로 설명한다. 그런데 칸트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전적으로 자유로워야 하지만, 사적으로 이를 사용할 때는 철저한 복종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언뜻 들으면 개인은 현재의 사회를 직접적으로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보수적 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를 도덕적 실천의 문제와 결합해서 사유한다면 전혀 반대의 입장으로 읽힐 수 있다. 즉 인간은 개인의 차원에서, 즉 자신이 처한 시민적 직책이나 공직 따위를 수행하는 한에서는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따라서 이로부터 윤리적 행위는 현재 사회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아포리아가 제기된다.

 따라서 윤리적 행위는 언제나 사회의 변혁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순간 완결되는 목표는 아니다. 사회는 그 자체로 완벽하게 윤리적이 될 수 없으며(마치 우리가 우리의 쾌락과 도덕적 행위를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듯이) 결국 윤리는 하나의 이념적 목표로서 주체에게 끊임없이 비판을 촉구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실천의 가치란 이 끊임없는 비판에 있다. 칸트는 윤리를 말할 때, 사실상 영구혁명과도 같은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윤리적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천도 존재할 수 없다. 공산주의란 이런 점에서 윤리적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표현에 거부감이 드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는 ‘윤리’라는 말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극복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철학적 실천을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란 말로 표현한다. 실천이란 그런 것이다.

 보편적 이념이자 역사적 실천으로서 공산주의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그의 책 <낭만주의>에서 ‘낭만주의’와 ‘낭만적인 것’을 구분한다. 전자가 특정한 시기에 문학, 철학, 음악 등의 영역에서 전개된 어떤 운동이라면, 후자는 한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 정신자세를 말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구분을 적용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 이전에도, 어쩌면 인류가 공동생활을 하면서부터 존재한 이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의 정치적 실험으로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는 이러한 공산주의 이념이 현실화된 하나의 판본일 뿐이다. 사고의 편협성에서 벗어난다면, 전통적인 수도원 공동체들도 공산주의 이념의 한 판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라는 개념이 현실정치적 개념과 철학적 개념 사이에서 혼동되게 사용된다는 비판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두 가지 층위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에게 공산주의란 ‘영원한 이념’과 같은 근본문제를 따지는 것이다. 그는 “공산국가는 몰락해도, 공산주의는 살아나곤 하는 보편적 이념이다”라고 단언한다.

 지젝의 공산주의자 동료인 바디우 역시 이 부분을 지적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집단적 행동의 장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적 이념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공산주의라는 지평이 없다면, 철학자의 관심을 끌 만한 역사적·정치적 미래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 우리에게 철학적 의무로 부여된 것은 공산주의 가설이 전개될 새로운 존재양식이 탄생하게끔 돕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젝은 국가에 의한 자본의 관리라는 형태를 취한 구소련의 공산주의를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다(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네그리나 하트 등은 이 국가들을 사회주의라는 말로 표현하고 이를 공산주의와 구별한다). 그러나 보편적 이념에 대한 추구는 언제나 구체적·역사적 국면에 대한 이론적 개입과 동시에 추구된다. 그는 공산주의가 실제 사회적 적대(들)에 대응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지젝은 공산주의의 활동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나 가능한 정책을 명확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파국적인 본질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라는 어떤 이념에 의해서이며, 여기서 공산주의는 하나의 구체적인 상으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비판을 통해서 정체성이 대항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도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분명히 했듯, 공산주의는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이다.

 

 지젝이 자본주의의 현재 위기에 대해 공산주의의 이념을 제기하는 것은 이 위기의 본질에 ‘사유화’의 원리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 자연, 화폐, 문화 등의 사유화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소유될 수 없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s)을 사유화함으로써 타자를 배제하고, 그 자연적 본성과 상징적 실체를 위협한다. 마르크스 시기의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을 통해 형성되는 계급적 주체라면 오늘날 프롤레타리아는 이 파국 속에서 주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스러져 가는 대중이다. 결국 공산주의는 현재 시점에서 파국을 극복할 프롤레타리아 주체를 새롭게 형성하는 이론으로 소환된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사유화의 문제는 20세기 정치적 공산주의가 행했던 국가의 통제라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한 국가의 전체 국민이 합의한 것이라도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특수한 국가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국유화라는 것도 자본의 관리라는 측면에서는 자본주의와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지젝이 공산주의 이념은 이러한 자본의 사적 관리와 국가적 관리 모두를 비판하고 있으며, 이러한 소유, 통제, 관리, 배제로부터 자유로운 공통적인 것의 장을 확보하고 이를 조직할 수 있는 제도를 대안적으로 모색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당연히 20세기의 현실사회주의 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서 다른 전망을 모색하는 시도이다.

지젝의 공산주의는 '사유화' 위기감 반영

 그렇다면 지젝이 왜 사민주의를 비판하는지가 명확해진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자본주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관점의 차이일 것이다. 지젝이 보는 자본주의의 미래가 파국으로 향하는 묵시론적인 것에 비해, 사민주의자들의 전망은 훨씬 더 온건하다. 그들은 현재의 위기(전 지구적 금융위기, 공적 공간의 사유화, 의료·교육·문화 등 공공 서비스의 축소, 정치 세력의 권위주의적 기능 강화,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단지 재분배의 문제에 따른 빈곤의 문제로 축소하고 이를 해결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위기 자체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주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자본주의는 기회주의적 체제이며, 현재의 전 지구적 위기 속에서도 쉽게 붕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 행하는 이런저런 보완책들은 위기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잠깐 유예하는 데 불과하다. 지젝은 이를 거짓 행동(false activ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거짓 행동이란 변화하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바꾸는 행동을 의미한다. 즉 자본주의에서 행해지는 이런저런 개혁들은 결국 모두가 자본주의를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그러므로 근본적인 변화를 막기 위한 시도인 셈이다. 지젝이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거짓 행동의 중지이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고쳐 쓸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근본 입장이 여기서 드러난다. 지젝은 오히려 자본주의의 위기를 심화시키기를 요구한다(지젝이 결국 다다르게 되는 이러한 태도는 분명 비판의 여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논점이 폐기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물론 사민주의가 단순한 복지제도만이 아니라 다양한 생산적 고용정책이나 산업고도화 정책을 통해 현재의 자본주의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럽의 거의 모든 곳에서 ‘현실적으로’ 사민주의는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유럽의 사례가 보여주듯 신자유주의에 투항하고 만 사민주의에서 어떤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찾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남한사회에서 마치 이상국가처럼 언급되는 스웨덴도 10여 년 전부터 각종 감세조치와 공공영역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부각한 철도민영화를 이미 사민주의의 천국이라고 할 스웨덴에서는 10여 년 전에 실시했다. 물론 이 민영화가 박근혜 정부의 민영화와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민주의가 말하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결국 기존의 사고방식과 사회적 제도를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 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의 실현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시스템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현재 자본주의가 처한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는 데 있다. 그를 위해서 우리는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급하게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 아무런 개혁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이 파국적 현실을 정확한 개념을 통해 포착해내는 일이다. 그야말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공산주의는 현재 시점에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의 이름이다.

 글․ 김동국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수료. 독일 근현대 미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추계예술대에서 예술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